# 293
293화. 교환
백 명에 이르는 선사들이 각 석실에서 각종 재료 등을 거래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명례가 어느 돌기둥 아래에 뚫려 있는 지하 계단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이곳은 일반적인 거래처이고 진귀한 재료를 사시려면 한층 더 내려가셔야 합니다.”
한립이 그곳을 보더니 걸음을 옮기지 않고 물었다.
“고계 요수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그것은 어떤 등급의 요수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오급이나 육급 요수라면 청풍각(聽風閣)으로 가 전문적으로 보물과 고계 요수의 위치를 매매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더욱 높은 등급의 요수를 찾으신다면 동급 결단기 선배님들끼리 정보를 교환하시는 수밖에 없지요. 어쨌든 그런 고급 정보는 일반적으로 쉬쉬하는 편이니 결단기 선사들만을 위해 준비된 교환회에 참여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교환회라면?”
한립이 흥미를 보이자 황명례가 자세히 설명했다.
“보통 결단기 선사들께서 원하는 물건은 다른 결단기 선사의 수중에 있는 경우가 많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매번 시장이 열릴 때마다 시장의 주인이 선배님들을 모아 사적으로 소규모의 교환회를 벌이지요. 결단기 선사들은 서로 거래를 할 수 있고 시장의 주인도 진귀한 재료를 구입할 기회를 갖는 것입니다.”
입 꼬리를 슬쩍 올린 한립이 천천히 물었다.
“그래서 교환회는 언제 열리지?”
“아마 며칠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시장이 열리고 중반쯤 되면 누군가 찾아와 참가를 청한다 들었습니다.”
잠시 생각을 하던 한립이 황명례를 보며 말했다.
“황 선사, 이제부터는 홀로 둘러보고자 하니 더 이상 함께 해주지 않아도 되네.”
천엽로를 찾는 것을 누군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바로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막 다른 재료들을 구입하러 가보려 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날 테니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찾아주십시오.”
황명례는 예를 취하고 원료상 중에 하나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그를 쫓던 요수 시체를 팔려는 것 같았다. 상대의 눈치 빠른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그 역시 뒷짐을 쥐고 여러 점포를 둘러 본 후에 각양각색의 재료가 쌓여 있는 한 지점을 향해 걸어갔다.
* * *
3일 후 한립은 어떤 조용한 방 안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답답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었다.
이곳에 온 첫날 지하 1층과 2층의 모든 점포를 돌았으나 역시 반요초는 많았으나 팔급 이상 요수의 주변에서 자란 반요초는 없었다. 그리고 칠급 이상의 요수의 정보도 전무했다. 이렇게 되니 정말 교환회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난 이틀은 조용한 방을 빌려 수련의 정체기를 이겨 내고자 수련을 했다. 당연히 어떤 수확도 없었지만 말이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지 예상은 했지만 한립이 냉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달콤한 여인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을 받아 려 선배님을 교환회로 모시고자 왔습니다. 참석할 의사가 있으신지요?”
“알겠다. 참석할 것이다.”
한립은 몸을 일으켜 바로 방을 나섰다. 문 밖에는 백의 여인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립이 나오는 것을 보더니 바로 얼굴을 들어 그를 살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한립의 표정이 묘했다.
‘어떻게 이 아이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
그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목덜미가 조금 붉어진 여인이 불안한 듯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재빨리 무표정으로 돌아온 한립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별 일 아니니 안내하거라.”
백의 여인은 그제야 안심하며 그를 이끌었다. 여인의 풍만하고 고혹적인 몸을 훑어 본 한립의 의혹이 더욱 증폭되었다.
지하 2층으로 내려온 여인이 한립을 데리고 구석진 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암석으로 된 벽에 손을 올리자 하얀 빛이 분출되며 주술이 가득 새겨진 돌문이 나타났다.
여인이 문을 열며 한립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려 선배님 이쪽으로 드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말없이 여인의 뒤를 따랐다. 석문은 바로 닫혀서 다시 보통의 벽으로 돌아갔다. 소리 없이 앞으로 걸어가다 보니 모퉁이를 돌아 또 한 번 둥근 문이 나타났다.
문 밖에는 결단 중기의 음침한 중년 선사가 푸른 문사의 차림을 하고 서있었다. 그는 한립을 발견하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맞이했다.
“려 선사시군요. 저는 이곳의 주인인 운천소라 합니다. 이번 교환회에 참석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른 분들도 대부분 도착해 계십니다. 문 소저는 려 형을 살뜰히 모셔주시게.”
운 선사가 한껏 예를 차리며 한립에게 말을 마치더니 여인을 향해 분부를 내렸다.
‘문 소저.’
백의 여인의 신분이 드러났다. 그녀는 한립이 이전에 마주쳤던 문장의 딸로 묘음문에 소속되어 있던 문사월이었다.
어떤 사정이 있기에 그런 그녀가 이곳에서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환형결 탓에 그는 문사월을 알아보았으나 그녀가 한립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사월이 중년 문사의 말을 듣더니 안색이 변해 황급히 대답했다.
한립은 뒤에 서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운천소란 자를 극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예의상 몇 마디를 나누고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네모난 대청으로 중간에 원형 탁자가 있어 주변에 드문드문 거대한 팔걸이의자 열댓 개가 준비돼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이미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의자를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결단기 수행을 지닌 두 여인은 각각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사내들 곁에는 아리따운 여 선사들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뜻밖에도 연기기 십이, 십삼 성이거나 아예 축기 초기에 이른 이들이었다.
누구 하나 외모가 빠지는 이가 없었다. 그가 멍해 있는 틈에 옆에서 누군가가 춘풍이 불 듯 부드럽게 기대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놀라게도 문사월이 자진해서 그에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립이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으나 바로 여인을 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이 하는 양을 보니 상황이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아예 여인의 가는 허리에 손을 두르고는 성큼성큼 빈자리로 가 앉아 버렸다 문사월도 함께 앉으니 거의 그의 품에 안긴 모습이 되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전해지니 나쁠 것은 없었다.
문사월은 말은 없었지만 그녀가 긴장해 몸을 굳힐 때쯤 허리에 감았던 손이 뜻밖에도 사라졌다.
“……?”
여인은 영문을 몰라 힐끗 한립을 올려다보았다. 이때 그는 조용히 다른 이들을 살피고 있었다. 다른 일고여덟 명의 선사들도 한립을 살피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낯선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대부분이 호의가 담긴 시선으로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립도 한결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다시 대여섯 명의 결단기 선사들이 더 들어왔고 모두 아름다운 여인을 옆에 데리고 있었다. 침착한 얼굴로 지켜보던 한립이 속으로 조금 놀랐다.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 선사들을 부리는 것으로 보아 운천소의 권세가 대단하다 여긴 것이다. 게다가 여인들은 하나같이 법력이 약하지 않으니 어느 정도 신분이 있어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운천소가 우아하고 점잖은 미부인과 함께 등장했다. 미부인은 축기 후기의 수행으로 보였으나 운천소의 팔에 달라붙은 것이 꽤나 친밀해 보였다.
‘범 부인!’
그녀를 본 한립이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묘음문 범 좌사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보아하니 이곳 주인과도 각별한 관계인 듯싶고 일이 흥미롭게 돌아가는구나.’
“아!”
그때 품 안에 있던 문사월이 몸을 떨며 작은 입술 사이로 소리를 냈다.
한립이 어리둥절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손이 언제부터인가 풍만한 문사월의 가슴에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방금 범 부인을 보고 놀란 와중에 손아귀에 힘을 주고 말았다.
부드러운 촉감이 그를 유혹했으나 재빨리 손을 거 둔 그가 시선을 돌리며 어색한 표정을 숨겼다. 문사월이 이상하게 여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립은 미세하게 어딘가 불편해 보였고 그녀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며 허리를 감은 손도 최대한 힘을 풀고 있었다.
그가 성인군자는 아니었지만 나름 지인의 딸을 상대로 추태를 부렸으니 난감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낌새는 오직 문사월 만이 눈치 챘을 뿐 다른 이들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운천소와 범 부인이 자리를 잡았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 덕분이었다.
“이번 교환회에는 뜻밖에도 열세 분이나 참여해 주셨으니 영광입니다. 두 분은 일이 있어 먼저 가셨음에도 그간의 교환회 중 가장 많은 선사분들이 모여 주셨습니다. 긴말 할 것 없이 모두 물건을 꺼내어 간략한 소개와 가격 혹은 원하는 교환 물품을 제시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좌측의 뚱뚱한 노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먼저 시작하라는 의미였다.
운천소의 시선을 받은 노인은 아쉬운 눈빛으로 여인의 허리에 두른 손을 풀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노부부터 시작하지요. 이번에 좋은 물건들을 많이 가져왔으니 누구든 필요한 물건만 제공한다면 교환하겠습니다.”
그가 두툼한 허리춤에서 저물대 하나를 풀어 원탁 위에 쏟았다. 빛이 사라지고 여러 물건들이 등장했는데 영기가 감도는 정도가 심상치 않았다.
“천령자 세 개, 와호사(臥虎鯊)의 요단, 화해수(化海獸)의 가죽 …….”
노인이 하나씩 물건을 들어 보이며 의기양양하게 소개를 해나가니 적지 않은 선사들이 관심을 보였다. 나름 상당히 진귀한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한립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뚱보 노인의 물건 중 가장 희귀한 것이 와호사의 요단이었는데 겨우 육급 요수의 것이었고 한립이 직접 해치운 와호사만 여덟 마리는 되었다.
소개를 마친 노인이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며 가녀린 여인을 껴안았다.
옆에 있던 여인은 은근히 꺼리는 기색이 있었으나 물건을 보고는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어서 노인 옆의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른 괴인이 헛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그는 너무 깡말라서 마치 대나무가 서 있는 듯했다.
“제가 들고 온 물건은 오급 요수 반려인(盤黎蚓)의 알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말을 맺은 그가 품을 뒤져 계란만한 노란 알을 꺼내 놓았다.
“반려인!”
괴인의 말에 많은 이들이 눈을 빛내며 알을 주시했다.
다른 이들이 하나둘 꺼내는 물건들도 다들 비범해서 이런 교환회를 개최하는 이유를 알만 했다.
한립은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아 서늘한 시선으로 방관하고 있었지만 좋은 물건들이 등장할 때마다 분위기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한립의 차례가 되자 그가 아무렇게나 쏟아놓은 저물대에서 희귀한 육, 칠 급 요수의 재료가 수북하게 쏟아져 나와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순식간에 마지막 선사인 새까만 얼굴의 중년인의 차례가 되었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결단 중기의 이른 세 명 중 하나였다. 다들 그를 보는 눈빛에 경외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품을 뒤지더니 두 가지 물건을 내놓았다.
하나는 손바닥만 한 동전 조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회백색의 뼈로 동물의 척추 같은 모양이었다. 다른 선사들이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물건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