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
292화. 보물을 내주다
저녁이 되자 소녀가 복잡한 마음으로 한립의 침실 앞에 섰다.
그녀가 붉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문을 열었을 때는 의외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침실은 텅텅 비어 있었고 돌 탁자 위에 손수건 같은 것만이 펼쳐져 있었다.
공손행은 잠시 주저하다가 그곳으로 다가갔다.
“효심이 깊어 주는 상이다. 보물로 인해 화를 입고 싶지 않다면 남들에게 쉽게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잘 돌보거라!”
짧은 문장이었지만 소녀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충격적인 내용에 그녀는 한참동안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 * *
이때 이미 섬에서 천 리는 떨어진 한립이 푸른 빛 줄기가 되어 고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실소하며 유유히 중얼거렸다.
“지금쯤 얼떨떨해 하고 있겠네. 누구든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런 일이 생기면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할 테니까.”
그는 해무 속을 벗어나며 동굴에 전옥결과 여러 법기 외에도 다량의 단약과 법보 두 개를 남겨두고 왔다. 그녀가 수도자로서 살면서 이 보물들은 엄청난 도움을 줄 것이다.
이렇게 보물을 준 것은 갑자기 여인이 좋아져서가 아니었다. 바로 행아란 어린 계집아이가 아버지를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수도자로서 살면서 항상 아쉬웠던 점은 부모님을 오랫동안 모시지 못하고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고향을 멀리 떠나 왔으나 그는 그곳의 모든 것을 마음 속 깊이 남겨두고 있었다. 특히 소녀의 여린 체구가 어린 누이의 모습과 겹쳐졌다. 이런 이유로 수련을 핑계 삼아 소녀를 남게 한 것이다.
사실 그가 주고 온 법기나 법보는 버리기엔 아깝고 쓸데는 없는 계륵 같은 물건들이었다.
그런 물건들로 선심도 쓰고 소녀가 더 높은 수행에 이를 수 있게 도움을 주었으니 나쁠 것이 없었다. 소녀의 자질은 특출 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동굴 거처 또한 어차피 수련을 마치면 떠날 작정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중년 선사 등을 고이 보내 주었겠는가?
한립은 결단 중기에 이른 이후에도 스물 몇 해를 더 밀실 안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단약을 모두 복용하지 못하고 일부가 저물대에 남아있었다. 오랜 수련을 견디지 못해 밀실을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결단 후기에 이를 때쯤 수련 상의 정체기가 와서 이것을 극복하기 전에는 아무리 많은 단약을 먹어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체기를 지나는 방법은 말 그대로 하늘의 조화를 따라야 했다.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뜻이었다.
일부 선사는 가만히 앉아 수련을 하다가 또 다른 선사는 세상을 유람하다가 어떤 이는 생사를 걸고 혈투를 벌이다가 다음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가만히 밀실에 앉아 시간을 낭비하느니 일단 거처를 나와 반요초도 찾아내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 구곡영삼을 챙겨 떠나기로 한 것이다. 최후의 보루였던 구곡영삼도 놓고 가지 않으니 그리 쉽게 거처를 버린 것이다.
다만 구곡영삼이 주기적으로 흙과 돌의 기운을 머금어야 하는 문제는 그가 수련에 증진을 보여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섬에서 토양의 정기를 취해다 구곡영삼에게 주입해보았더니 멀쩡했던 것이다.
지금 그가 날아가는 곳은 바로 소녀가 말한 시장이었다. 선사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어야만 팔급 요수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 정보를 얻어야 반요초를 어찌 구할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가 속도를 높였다.
* * *
이틀 후 그가 전력으로 하늘을 가로 지르는데 돌연 붉은 빛이 여러 개의 회백색 기운에 쫓기는 것을 발견했다.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가 낮게 주술을 읊조리자 그의 몸에서 자잘한 폭발음이 들리며 푸른빛이 얼굴로 몰려들었다.
잠시 후 그는 기골이 장대한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폐관 수련을 하며 익힌 현음경의 비술, 환형결(換形決)을 쓴 것이다.
이 술법은 체격을 줄였다 늘렸다 할 수 있었으며 얼굴의 근육을 조절해 순식간에 모습을 바꿔주니 최상급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둔갑술이었다.
전설 속의 다른 둔갑술과 비교해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아 의식이 자신보다 강력한 선사를 마주쳐도 쉽게 탈로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술법의 결점도 분명해서 일단 환형결을 펼치면 전신의 법력 중 칠성까지만 운용할 수 있었다.
결투 중 칠성 이상의 법력을 소비해 버리면 환형결이 즉시 효력을 잃어 원래의 용모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다지 신경 쓰이는 결점은 아니었다.
모습을 숨길 때에는 대부분 자신의 수행을 속이려는 것일 텐데 법력에 제한이 있다 한들 문제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얼굴이 된 한립을 향해 붉은 빛이 자신이 살 유일한 희망이라도 되는 양 몰려들었다.
아예 허공에 멈춰선 한립은 그것을 보며 작게 탄식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또 성가신 일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의 수행도 모른 채 주저 없이 화를 몰고 다가오는 것이 심성이 그리 바른 자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하지만 그 뒤를 쫓는 회백색 기운은 분명 이, 삼 급 요수 무리에 불과했다.
붉은 빛 속에서 눈썹은 짙으나 눈은 생쥐처럼 생긴 노인이 그에게 근접하기도 전에 공포에 질려 애원하기 시작했다.
“거기 선사님, 살려 주시지요! 저는 황명례로 꼭 보답하겠습니다.”
나름 머리는 있는지 한립의 수행을 확인하지 못했음에도 평온한 태도만으로 그를 살려줄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립은 평온한 얼굴로 노인을 쳐다보다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다섯 개의 푸른 검이 손을 벗어나 노인의 뒤를 쫓던 다섯 마리 요수에게 날아갔다. 그 모습에 한시름을 놓은 노인도 바로 불이 붙은 고리 법기를 발동해 공격에 참여했다.
한립이 노인을 살피니 거의 축기기 최정상에 이른 경지로 많은 저계 요수의 추격에도 지금까지 버텨낸 이유가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는 비검을 시켜 요수들을 몰기만하고 서둘러 죽이지는 않았다. 그 기회를 틈타 한쪽에 있던 노인이 자신의 불 속성 법기를 이용해 요수들을 공격했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한립이 그제야 푸른 검을 움직여 요수들을 죽였다. 노인은 한립이 결단기 수사라 생각하며 공손히 예를 올렸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께서는 혹시 남려도(南黎島)에 있는 시장으로 향하는 길이십니까?”
“그래, 시장으로가 물건을 좀 교환하려는 참이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명례가 작은 눈을 깜빡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가시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마 허탕을 치실 테니까요.”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며칠 전 남려도 시장이 저계 요수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척살되었지만 살아 도망간 요수들이 대규모의 사, 오급 고계 요수를 불러들여서 수많은 선사들이 부상을 당하고 각자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게 되었지요. 저도 그 중 하나인데 오는 길에 또 요수 무리를 마주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한립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럼 정말 시간 낭비를 했군.”
황명례가 눈을 굴리더니 누런 이를 드러내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선배님께서 정말 물건을 매매하고자 하신다면 늙은이가 다른 곳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곳은 물건이 상당히 좋은데다가 축기기 이상의 수행을 지녀야만 들어갈 수 있지요.
다만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터라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추천을 받아야지만 이용할 수 있고 시장이 열리는 시간과 장소도 수시로 바뀝니다. 마침 제가 추천을 할 자격이 되니 원하신다면 목숨을 구해주신 보답으로 길을 안내하지요.”
“암시장이라도 열리는 것인가?”
“농담이시지요? 이런 상황에 암시장과 그냥 시장을 구분해 무엇 하겠습니까. 들어내 놓고 선사들이 왕래를 하는 시장이라면 요수들에게 진작 발각되어 좋은 꼴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도 그렇군! 그래서 자네가 말하는 곳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가?”
황명례가 비밀 시장에 익숙한지 오래 생각지 않고 답했다.
“이곳에서 서둘러 가면 반 개월 전에는 도착할 것입니다. 아마 그때쯤이면 시장이 열리는 때일 테고요.”
“잘 되었군. 그럼 자네를 따르지.”
“예, 그러시지요! 엇,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기분 좋게 앞장서려던 노인이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양해를 구하고는 해수면에 떠있는 요수의 시체를 향해 맹렬히 하강했다. 처음에는 왜 그러나 싶었던 한립이 곧 상대의 의도를 알아채 담담히 웃었다.
잠시 후 익숙하게 요수를 해체해 저물대에 담은 노인이 흥분해서 돌아왔다. 그가 조금 민망한 듯 입을 열었다.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저 요수들이 제게는 대단한 수확거리여서요.”
“상관없으니 서둘러 가지.”
노인이 한립의 말에 실실 웃고는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날아갔다. 그 뒤를 따르는 한립의 표정은 극히 침착했다.
황명례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선배님은 처음 뵙는데 존성대명과 어디 출신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전에 성함을 들어보았을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모습까지 바꾼 한립이 솔직히 답할 리 만무했다.
“나는 려 가로 폐관 수련을 하다가 최근 결단에 성공해 나오는 길이네. 황 선사가 들어보았을 리 없지.”
빈틈없는 답변에 무언가 의심스러우면서도 그저 축하를 전했다.
이어 눈치 빠르게 더는 한립의 정보를 캐려 들지 않고 먼저 최근에 선사와 요수들 간에 발생한 분쟁에 대해 이야기 했다. 하지만 줄곧 한숨을 쉬어 대는 것으로 보아 인간 선사들이 우위에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반 개월 동안 무사히 날아간 이들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섬은 백여 리 크기로 영기가 희박했고 풀떼기와 암석 몇 개가 있는 볼품없는 무인도였다. 아마 그런 점이 비밀 시장을 열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그래도 섬에 이르기 반나절 전부터 한립과 명 노인은 은닉술을 펼쳐 기운을 감추며 날아왔다.
비밀 시장 주인의 요청에 따른 행동이었다. 섬 근처에 다다른 노인이 섬을 몇 바퀴 돌더니 어떤 암석 무리에 떨어져 내렸다.
이에 한립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곳에는 어떤 금제도 없었던 것이다.
‘설마…….’
한립이 추측하는 동안 황명례는 벌써 어떤 암석을 골라 가볍게 주먹으로 세 번을 두드리고 있었다. 곧 암석이 갈라지며 일 장 높이의 검은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명례가 먼저 들어가 안에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더니 고개를 돌려 밖에 있는 한립에게 소리쳤다.
“려 선배님! 이곳입니다.”
한립 역시 허공에서 내려와 동굴로 들어왔다. 안에는 가파른 돌계단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옆에 하얀 수염을 기른 회색 장포의 노인이 서있었다.
축기 후기의 수행을 지닌 그는 한립을 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희 시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찾으시는 물건을 거래하실 수 있기를 기원하지요.”
“나 역시 그렇네.”
담담히 답을 해준 한립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요수에게 영기의 파동을 들킬까 걱정해 금제를 설치하기 보다는 지하 굴을 파 임시 시장을 연 것이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눈앞이 밝아졌다.
광대한 지하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높이가 대여섯 장 되는 암석으로 만든 공간은 푸른 돌기둥으로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중간에는 여러 석실들이 각양각색의 명패를 걸고 늘어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