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
291화. 어린 계집아이
슉.
바람을 가르며 거대한 원숭이 꼭두각시가 다시 나타났다. 꼭두각시는 큰 보폭으로 다가와 소녀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중년인 등이 안색이 변해 걱정스런 표정으로 거대 원숭이를 올려다보았다. 황의 소녀도 붉어진 눈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너의 딱한 사정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관심도 없고 노부는 항시 이익이 없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아왔다. 다만 네가 남자를 겪지 않은 몸이고 나 역시 성취에 막힘이 있어 방도를 찾는 중이었으니 노정이 되어 수련을 돕겠다면 그 병 속에 든 지원단(至元丹) 세 알을 주겠다.
아비를 낫게 하는데 충분하고도 남을 테니 동문들에게 들려 보내고 너는 결계 안으로 들어오너라. 나는 강자라 하여 약자를 괴롭히거나 남에게 싫은 일을 강요하는 성정이 아니니 원하지 않는다면 즉시 이곳을 떠나면 된다.”
거대한 원숭이 꼭두각시가 손에서 하얀 병을 꺼내 소녀 앞에 내놓았다. 소녀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아직 어리지만 남녀가 함께 수련을 한다는 것과 노정의 의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창백했던 소녀의 얼굴에 어쩔 수 없이 붉은 기가 떠올랐으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예, 그러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원래대로 회복되신다면 선배님의 노정이 되어 수련을 돕겠습니다.”
소녀가 하얀 손을 뻗어 약 병을 쥐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깜짝 놀란 중년인이 서둘러 그녀를 막아섰다.
“행아! 정말 그리하겠다는 말이냐? 이 숙부가 본 문으로 돌아가 사형에게 무어라 말한단 말이냐.”
무리의 다른 이들도 안색이 변해 소녀를 만류했다. 소녀가 중년인의 말에 답하지 않고는 오히려 약병을 건네며 물었다.
“사숙 정말 이 단약이면 아버지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마음을 굳힌 소녀의 표정에 중년인이 탄식했다. 상대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중년인이 곧 어두운 얼굴로 약병을 열어 남색의 단약 하나를 꺼내보았다
“이것은…….”
독특한 맑은 향이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향기를 맡은 모두가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중년인이 단약을 코 가까이에 대고 향을 감별하더니 기쁜 마음을 표출했다.
“이것은 요단으로 제련한 단약이다.”
“지원단이 요단으로 제련한 단약이면 아버지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소녀의 담담한 물음에 중년인이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가 잠시 주저했으나 결국에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 단약의 구체적인 효능은 모르지만 엄청나게 귀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단약을 내주며 우리를 속일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그럼 저도 안심입니다. 꼭 단약을 가지고 무사히 돌아가 주세요. 아버지께는 이런 불효녀는 잊어 주십사 전해주셔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쉰 소녀가 붉어진 눈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호막으로 들어갔다. 중년인이 순간적으로 안색이 변했으나 결국에는 손에 든 병을 더욱 굳세게 쥐었을 뿐이다.
이때 거대 원숭이 역시 밝게 빛나는 결계 안으로 들어갔고 통로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건장한 청년이 초조하게 물어왔다.
“사숙, 정말 공손 사매를 이대로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다른 두 여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중년사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너희도 그 아이의 결심을 보지 않았더냐? 말린다고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정말 이 단약으로 장문인을 낫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청령문의 앞날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찌 사매를 노정으로 살 게 한단 말입니까! 어린 사매의 인생은 이렇게 끝나야 한단 말입니까?”
청년은 피처럼 붉어진 얼굴로 아직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질이 행아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친 형제자매처럼 지내 온 것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야.”
중년인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번민에 차서 답하고 있을 때 다른 여인이 돌연 소리쳤다.
“사숙! 공손 사매가 사라집니다.”
중년인과 청년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통로 속에서 빛이 크게 번지며 소녀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 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건장한 청년이 바람 빠진 가죽 공처럼 허물어지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을 잇지 못했다. 중년 선사 역시 그저 청년의 어깨에 손을 올려 위로했다.
반 시진 후 무리는 해무가 짙은 섬을 떠나갔다.
* * *
노란 옷의 소녀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금제에 의해 전송이 완료되었다. 빛이 사라졌을 때 소녀는 이미 낯선 산골짜기에 당도해 있었다.
눈앞에는 푸른 색 석문뿐이었다.
소녀가 사방을 둘러보며 어찌해야 할 지 고민하는데 다시 빛이 번지며 아까 본 거대 원숭이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거대 원숭이가 앞으로 나서더니 푸른 석문을 밀어 입구를 내주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가 사라졌다.
“네가 공손행이구나. 꼭두각시를 따라 거처로 들거라. 이틀 후면 수련을 마치고 나가겠다.”
소녀가 붉은 입술을 다물고는 조심스레 푸른 석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거대 원숭이를 따라 이리 꺾고 저리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석실에 도착했다.
동물의 가죽이 깔린 돌침대와 돌 탁자, 돌 의자가 전부인 공간이었다. 거대 원숭이는 그녀를 이곳에 남겨두고 나가버렸다.
방 안 곳곳을 살피던 소녀가 문 밖을 쳐다보았다. 아마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소녀가 결국에는 침상에 자리 잡고 앉아 생각에 빠졌다.
이미 몸을 바치기로 약조였으나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게다가 생전 처음 낯선 곳에 홀로 있으니 처량한 마음도 주체할 수 없었다.
한 시진이 지나고서야 겨우 잡생각을 떨쳐낸 그녀가 통로를 쳐다보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석실을 나와 얼마 가지 않으니 복잡한 통로가 나타났고 여러 개의 둥근 문이 뚫린 대청에 이르렀다. 그 중 하나가 그녀가 나온 통로였다. 소녀의 눈길을 끈 것은 각 통로 마다 거대 원숭이가 꼼짝 않고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녀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으로 다가가자 거대 원숭이가 나타나 길을 막아섰다. 깜짝 놀라 소녀가 뒤로 물러났으나 거대 원숭이는 그저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었다.
검은 눈망울을 굴리며 소녀가 다시 한 번 다가서자 같은 반응이 일어났다. 공손행도 이제 이 문은 그녀가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방향을 바꾸어 다른 문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거대 원숭이가 막지 않아 그녀도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었다. 꽤나 특이한 화원을 지나자 굳게 닫힌 석실이 나타났다.
소녀가 다가가 밀어보니 석실 문이 가볍게 열렸다.
공손행이 맑은 눈으로 안을 살펴보니 여러 색깔의 다채로운 서책들이 돌 탁자 위에 쌓여있었고 그 옆으로 낮게 담이 쳐진 밭 안에는 기이한 청록색 풀들이 그윽하게 피어있었다.
잠시 귀엽게 입을 비죽거린 소녀가 고민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돌 탁자 위의 서책 중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의식을 불어넣어 보았다.
진법 지식에 대한 설명이 적힌 경전으로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서책을 골라 의식을 불어넣었다.
이번에는 법기를 제련하는 방법을 다룬 책이었지만 아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서책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하나씩 서책을 집어 안의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요수의 종류나 각종 단약을 설명한 서책도 그녀의 주의를 오래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음 서책을 확인하고는 그녀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것은 뜻밖에도 금진공(金眞功)이라는 공법 수련서였다. 손에 서책을 든 채 반 시진이 지나서야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의식을 거두어 들였다.
금진공은 진귀한 최상급 공법이었는데 이렇게 귀한 물건이 아무렇게나 탁자에 쌓여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녀는 결국 아쉬운 표정으로 내려놓고 다른 것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반나절 후 모든 서책을 훑어보니 대부분은 단약이나 진법에 관한 수도계의 잡학들이었고 소수는 공법서였는데 하나도 최상급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 중 전옥결(纏玉決)이라는 공법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청령문은 난성해에서 아주 약소한 문파로 주로 익히는 청령공(靑靈功) 역시 위력이 전옥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소녀는 바로 석실을 나서 다시 대청으로 돌아 나왔다. 그리고 아직 가보지 못한 석실로 향했다. 남은 3개 중 2개는 거대 원숭이가 막아섰으나 마지막 하나에는 그녀를 들여보내 주었다.
그 결과 또 다른 대청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번에는 들어서자마자 넋을 잃고 한참을 서 있었다. 공간의 중심에는 거대한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은은한 붉은 빛을 띠는 투명한 결계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결계 안에는 열댓 개의 다른 모양의 소검과 창 등이 떠있었는데 맑은 울음을 내는 것이 마치 의식이 있는 물건들 같았다.
그리고 결계 밖에는 다양한 색깔의 법기들이 초라한 목제 선반에 진열되어 있었다. 이 법기들은 결계 안에 있는 것처럼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영력을 갖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전에 본 적은 없으나 결계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물건들은 법보일 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법보들을 이렇게나 많이 보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 중 한 가지라도 갖게 되었다면 떨리는 마음에 잠을 설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보물을 지닌 선사의 노정이 되어 생활할 생각을 하니 모든 의욕이 사라져 빈손으로 방을 나서게 되었다.
* * *
이틀이 지나고 소녀는 서책이 있는 석실 안에서 서책의 내용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이때 온화한 사내의 음성이 돌연 입구에서 들려왔다.
“전옥결이 여인이 익히기에 적합한 공법이기는 하지. 나는 어떤 사내에게서 얻었지만 말이야.”
소녀가 놀라 몸을 떨더니 의식을 거두어들이고 황급히 시선을 주었다. 남색 장포를 걸친 평범한 용모의 청년이 웃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손행은 의아해했다.
“다, 당신이 선배님이시라고요?”
목소리는 비슷했으나 젊어도 너무 젊어서 그녀가 상상하던 인물과는 영 딴 판이었다. 엄청난 능력을 보았으니 당연히 노인의 모습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지난 이틀간 안절부절 못하며 추측한 바로는 성정이 괴팍하고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괴상한 노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청년은 바로 막 출관을 한 한립이었다.
“왜 생각하던 것과 다른 가보지?”
소녀는 한립이 정말 고인이라는 것을 듣고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말을 더듬으며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선배님, 저 이 공법서는 그게…….”
“상관없다. 네가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을 때는 공법서를 읽어도 된다고 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온화한 한립의 말에 소녀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좋아서 폴짝폴짝 뛰는 어린 계집아이의 모습에 한립의 눈길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미소를 머금은 그가 가볍게 물었다.
“오래 이곳을 나서지 않아 아는 바가 없는데, 공손 낭자는 근처 해역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곳을 아는지 모르겠군?”
소녀가 무슨 생각인지 날듯이 다가와 한립 앞에 섰다.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라면 남쪽으로 반 개월 거리에 작은 무인도가 있습니다. 그곳에 시장이 서는데 결단기 선배님들이 연합해 세운 곳이라 상당히 안전하다고 해요. 혹시 그곳의 해역도가 필요하신가요?”
“한번 가볼 생각이니 해역도가 있다면 편하기는 하겠구나.”
그 말에 소녀가 허둥지둥 저물대를 뒤지더니 서책 하나를 한립에게 건넸다. 가볍게 웃은 한립이 서책을 받는데 붉어진 소녀의 귓가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손을 뻗은 그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공손행은 조금 두려워 몸을 떨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을 뿐이다.
이때 부드러운 한립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두려워할 것 없다. 저녁에 내 침실로 오는 것은 잊지 말고.”
말을 마친 그가 지체 없이 석실을 나섰다. 홀로 남겨진 공손행은 상대의 애매한 말에 심장이 빠르게 뛰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