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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90화 (47/2,000)
  • # 290

    290화. 청령문

    수풀은 온데간데없고 낯선 산맥이 나타나 엄청난 영기를 뿜어냈다. 남색 비단 옷을 걸친 여인이 놀라서 소리쳤다.

    “환영진입니다.”

    건장한 청년도 뜻밖의 사태에 기뻐하며 말했다.

    “이곳에 어떤 선사가 기거하고 있나 봅니다.”

    중년인이 의혹이 담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지도 모르지. 일단 응연수(鷹鳶獸)가 환영진에 속아 넘어 가는지 지켜본다.”

    모두의 시선이 환영진 상공으로 향했다.

    키륵키륵!

    키르륵!

    이때 포위를 해오던 괴조들이 목표를 잃고는 날카로운 소리로 소통하고 있었다. 응연수들은 그대로 방향을 돌리지 않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안 되겠구나! 응연수가 환영진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일단 산맥 쪽으로 더 들어간다. 저곳에서 금제의 기운이 느껴지니 정말 다른 선사가 있을 지도 모르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빛줄기가 된 그가 쏘아져 나갔다. 나머지 선사들도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얼마 가지 않아 하얀 보호막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

    이에 중년인은 반색하며 기쁨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서 한 장의 전음부가 나타났다.

    이어 그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손을 펼치자 부적이 순식간에 보호막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잠시 후 열댓 마리의 괴조가 결국에는 환영진 안으로 진입해 목표를 발견했다. 거침없이 달려드는 흉악한 새의 몸뚱이에서 눈을 찌르는 듯한 푸른빛이 요동을 쳤다.

    중년인이 어두워진 안색으로 괴조와 하얀 보호막을 번갈아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무리에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들 좋지 못한 안색으로 법기를 발동해 적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거대한 응연수들이 몸을 던져 육박전을 하려 할 때 또 한 번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하얀 보호막 속에서 난데없이 수백 개의 빛기둥이 솟아 오른 것이다. 비록 손가락 굵기에 불과했으나 예리한 공격은 응역수들의 몸에 무수히 많은 구멍을 남기고 말았다.

    쿵.

    무거운 것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며 괴조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게 어떻게 된…….”

    중년인을 포함한 무리가 쾌재를 부르며 재빨리 보호막 속의 상황을 살폈다. 그러나 그들은 깜짝 놀라 꼼짝할 수 없었다.

    빛 속에서 십여 마리의 거대한 원숭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순간 또 다른 요수가 나타난 줄 알고 중년인 일행이 크게 놀란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검은 빛이 도는 꼭두각시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모두 손을 모은 것이 방금 빛기둥들도 꼭두각시 손에서 방출된 것이 분명했다.

    이어 조용히 팔을 내린 꼭두각시들은 돌연 빛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하얀 보호막이 번쩍이며 사람이 지나갈 만한 통로를 만들어냈다.

    “……!”

    모두가 그저 눈치를 살피는데 차분한 사내의 음성이 안에서 흘러나왔다.

    “폐관 수련 중이라 나서기 어려우니 선사들은 진법 속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떠나시게!”

    중년인은 상대가 악의가 없다고 느꼈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의 초대에 응할 수는 없었다. 그는 상대의 심기를 거스를 것을 감수하고 완곡하게 호의를 거절했다.

    “선배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요수들이 사라졌으니 저희들은 이곳에서 잠시 쉬다가 떠나겠습니다.”

    “헤헤, 꽤나 신중한 자로구나. 그렇다면 어찌 이급 요수의 무리에게 쫓기고 있었는 지나 말해 보거라.”

    흥미롭다는 말투에 중년인이 조금 마음을 놓고는 공손히 답했다.

    “저희는 청령문(靑靈門) 제자들로 영초를 찾다가 응연수 무리와 마주쳐 쫓기게 되었습니다. 아마 선배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큰일을 겪었을 것입니다.”

    중년인은 여전히 감사를 표했지만 사내의 목소리는 별다른 말없이 사라졌다. 그러자 일행들은 조금 불안해졌다.

    중년인도 좌불안석이기는 매한가지였으나 다른 이들이 경솔히 행동하지 않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침묵하던 목소리가 냉랭히 물어왔다.

    ”너희 청령문은 사문에 장로도 없다더냐?  고작 이런 수행으로 바다에 나오다니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지?  결단기 선사는 아니더라도 축기기 선사라도 몇 명 더 있었다면 겨우 이급 요수 무리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에 중년인이 조금 당황하는 것 같더니 결국에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실대로 고했다.

    “청령문은 소규모 문파입니다. 한 분 계시던 결단기 장로님께서 20년 전 요수의 범람 속에 돌아가신 이후로는 축기기 선사도 몇 명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상대가 자신들의 문파 사정을 듣고는 나쁜 마음을 먹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상대의 엄청난 능력에 그들을 멸하고자 했으면 언제든 가능할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괜히 거짓을 고해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죽음을 자초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발설해서는 안 되는 문파의 내부 사정을 솔직히 고백한 것이다. 곧 복잡한 심경이 담긴 목소리가 다시 전해졌다.

    “요수의 범람이라니…… 그게 언제 일어난 일이더냐?  심연의 요수와 연관된 일이더냐?”

    그 말에 중년 선사는 물론이고 어린 소년 소녀들도 넋이 나갔다.

    중년인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정말 요수의 범람을 모르십니까?  오랜 세월 이곳에 계시느라 바깥 소식을 전혀 모르시나 봅니다.”

    “말투로 보아 바깥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중년 선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외성해는 그저 좋지 않은 상황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얼마나 오랫동안 폐관을 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늙은 괴물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스무 해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을 모르겠는가?

    이렇게 되면 그로서는 더욱 안심이었다.

    상대의 수행이 높아질수록 자신들과 같은 저계 수사에게 손을 댈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가진 것 중에 그의 눈에 찰만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생각을 마친 중년인이 다시 공손히 답했다.

    “요수의 범람은 스무 해가 넘은 일로 문중 어르신의 말씀을 전해들은 대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심연 해역에 서식하던 만 마리 이상의 요수가 어느 날 아무 전조도 없이 들고 일어나 기연도로 쳐들어온 사건입니다.

    요수들은 흑석성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세를 퍼부었는데 강력한 진법들과 원영기 선배들이 있었음에도 며칠 후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달아난 극소수 선사들의 말에 따르면 나머지는 전부 죽었다고 하더군요.”

    말을 하면서도 중년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이후에는 어찌 되었더냐?  요수들은 다시 심연으로 돌아간 것인가?”

    “심연으로 돌아갔다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심연 요수들은 흑석성을 폐허로 만들고는 뜻밖에도 고계 요수를 우두머리 삼아 무리를 나누고 사람이 사는 촌락을 소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소식이 전해진 뒤라 대다수는 거주지를 버리고 달아났으나 그래도 많은 선사들과 범인들이 화를 당했지요.

    반 년도 되지 않아 기연도 인근 해역에 있는 촌락은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일부 지능이 높은 고계 요수가 남아 사방을 돌아다니며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아 죽이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외성해의 범인들과 선사들이 대부분 죽었다고 합니다. 운 좋은 몇몇만이 기연도에서 멀리 떨어진 해역으로 달아나 구석진 섬에서 몸을 의탁하고 있지요. 지금 기연도는 고계 요수의 집합소가 되어 선사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바로 토벌하러 나서고 있습니다.”

    사내가 냉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비웃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허허, 우스운 일이로다. 이제는 처음 외성해를 개척할 때와는 반대로 선사가 요수들의 사냥감이 된 것이로군.”

    그는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기연도에 있던 원영기 노괴들이 모두 요수의 범람 때 죽었을 리는 만무하고. 어찌 그들이 나서서 전세를 역전하지 않는 것이지?  기연도에 이런 엄청난 변고가 일어났는데 어찌 내성해에서는 원병도 보내지 않은 것인가?”

    질문은 가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답변을 정리한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당시 요수의 범람 때 원영기 선배 두 분께서 사망하셨고 나머지는 위기를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들었습니다. 비록 그 후로 소식은 끊겼으나 상황을 역전할 큰 계획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내성해 쪽은 요수의 범람 직후 완전히 연락이 단절되어 이곳의 상황을 아는 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원병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말을 마치면서 중년인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요수의 범람에서 생존한 이들은 내성해 쪽의 방관에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침묵하던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질문했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너희들끼리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니더냐?  그리 빨리 목숨을 끊고 싶은 게냐?”

    그 말에 중년인의 얼굴에 근심이 떠올랐다. 그가 해명하려는 사이 뒤에 있던 노란 의복의 소녀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 그의 말을 잘랐다.

    “아버지께서 공법을 수련하시다 문제가 생기셨습니다. 진원이 역류하여 경맥이 엉망이 되었고 그 결과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수행이 높으시니 분명 아버지를 구할 방법이 있으시겠지요! 아버지를 구해만 주신다면 제가 무슨 짓을 해서든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

    소녀는 간절히 애걸하며 검은 눈에 눈물이 맺혀 당장이라도 떨어질 기세였다. 중년인은 소녀를 질책하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행아, 이 무슨 버릇없는 행동이더냐. 사형은 이미 몸져누운 지 오래라 인력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느니라. 이번에 영초를 찾으려 한것도 그저 사형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것뿐이니. 선배님께서 아무리 법력이 높으셔도 어찌 치료를 해주시겠느냐.”

    분명 말로는 가능성이 없다 하면서도 얼굴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내가 냉소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진원이 역류하고 경맥이 상했다?  성급히 성취를 이루려다 오히려 인생을 망친 녀석이 또 있었구나. 분명 법력도 충분히 쌓지 않고 더 높은 공법을 익히려다 그리 되었겠지.”

    고인이 직접 병자를 보지도 않고 정확히 원인을 집어내니 중년인의 얼굴에 희색이 번졌다.

    “선배님께서 역시 고명하십니다. 제 못난 사형은 절박한 마음에 수련에 매진하다 그리된 것이 맞습니다. 혹시 구할 수 있는 비방이 있으신지요?”

    사내는 상대의 속을 뻔히 들여다보며 비웃었다.

    “그런 증상이야 별 것도 아니지만 내가 너희를 도와야 할 이유가 무엇이지?  설마 아무 연고도 없는 너희를 도와줄 것이라 여긴 것이더냐?”

    중년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얘졌다 하더니 입술만 달싹거릴 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황의 소녀는 오히려 희망을 찾은 듯했다.

    그녀가 이를 악물더니 보호막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 여리고 나긋나긋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결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공손행이 맹세합니다. 선배님께서 아버지를 치료해 주신다면 소녀 평생 노비가 되어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만일 믿지 못하시겠다면 당장 제게 금제를 걸으셔도 좋습니다.”

    말을 마친 소녀가 바로 몸을 굽혀 머리를 땅에 세 번이나 찧었다. 어린 나이에 강단 있는 성품을 지닌 소녀였다. 중년인이 놀라 소리쳤다.

    “어찌 이리 어리석은 것이야. 선배님 같은 분이 너 같은 계집아이를 필요로 하시겠느냐?”

    그제야 다른 이들도 앞다퉈 그녀를 말렸다. 그러나 황의 소녀는 여전히 꿇어 앉아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들 말리지 마십시오. 저는 태생이 불길한 사람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또 아버지 깨서는 제게 세수벌모를 시켜주시기 위해 청령현공 육성 수련을 강행 하시다가 이리 되셨어요. 지금이 제가 효를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만 구해주신다면 선배님 곁에서 평생을 모시며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내가 차갑게 웃더니 돌연 서늘하게 물었다.

    “꼬마 계집이 나를 협박하려 드는 것이더냐?  내가 돕지 않겠다면 영원히 꿇어 있기라도 하겠다?”

    “제가 감히 선배님을 협박하다니요. 이미 저희를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수많은 선배님들을 찾아뵈었지만 누구도 구할 방도를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선배님께서 아버지의 증상을 치료하는 일이 손쉽다 하시니 자식 된 도리로 어찌 사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제발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말을 마칠 때쯤에는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보호막 뒤편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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