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287화. 악명을 떨치다
노인을 포함한 세 선사는 다시 한 번 의식을 이용해 청년의 수행을 염탐했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 봐도 상대는 고작 결단 초기 선사에 불과 했다.
육급의 유리수는 그들 셋이 힘을 합치면 죽이는 것이 어렵지는 않으나 그렇다 해도 이렇게 단숨에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행을 숨기는 특수한 공법이라도 익힌 건가? ’
그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나운 인상의 장한 역시 바짝 긴장했다.
“추 형, 한 명뿐인 것은 맞는 듯 한데 움직일까요?”
“…….”
노인은 의심스런 얼굴로 상황을 주시할 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색옷의 청년이 검은 사발을 꺼내 유리수의 혼백을 취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민 선사 역시 얼굴이 굳어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니 그만 두십시다. 괜히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어요.”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물러서려는 것이다. 노인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만 두자라…… 지금은 우리가 어찌 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을 수 있을 지가 관건일세.”
그 말에 민 선사와 선 선사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노인의 성정을 잘 아는 이들은 상대가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노인이 씁쓸한 얼굴로 입을 달싹거렸다.
“저 자의 인상착의가 최근 악명을 떨치는 마두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가?”
“마두라면…… 설마!”
“예? 그럼 저 자가…….”
두 선사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모두 크게 놀란 것이다. 침착한 얼굴의 노인이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아마 맞을 걸세. 저 어린 나이에 수많은 비검을 사용하는데 검광이 푸른색이 아닌가? 모든 것이 소문과 부합하지.”
하얗게 질린 흉악한 인상의 장한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하지만 그 마두는 날벌레들을 다룬다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어떤 곤충도 부리지 않았으니 우연이 아닐까요?”
민 선사가 전음을 보내면서도 한층 조심스럽게 노인을 두둔했다.
“추 형의 말씀이 맞는 듯 합니다. 마두 역시 결단 초기의 수행을 가장해 요수의 혼백을 수집해 간다지 않습니까! 다만 곤충 요수를 풀어놓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조차 없어서겠지요.”
“저 자가 소문 속의 충마(蟲魔)란 말입니까? 그럼 당장 달아나지 않고 뭐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런 마두에게 걸렸다가는 죽은 목숨입니다.”
노인이 안정된 목소리로 선 선사를 진정시켰다.
“일단 당황하지 말게. 정말 그 마두가 맞다면 우리가 이곳으로 올 때는 유리수를 신경 쓰느라 몰랐다 해도 달아날 때는 들킬 수밖에 없겠지. 경거망동해 우리의 존재를 노출 시켜선 안 되네.”
그 말에 다른 두 선사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선 선사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물었다.
“4년 전 칠급 요수를 두고 마두와 다른 이들이 충돌했는데 일고여덟 명의 결단기 선사가 모두 죽고 결단 후기의 선사 한 명만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사실일까요?”
민 선사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 거짓은 아닐 겁니다. 그 살아남은 선사가 벽운문(碧云門)의 고수였는데 몰살당한 이들이 모두 동문이라 더군요. 그 일전으로 기연도의 오대 세력으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 전력을 크게 상했다는 이야기가 돌았고요.
벽운문 태상장로인 묘학 진인 역시 그 일로 광분해 몇 번이나 충마를 찾으러 해역으로 나갔으나 소득이 없었다 합니다. 묘학 진인이 정말 마두를 잡았다 해도 어떤 결과가 생겼을 지는 알 수 없지요. 들리는 능력과 거동으로 보아 새로 등장한 원영기 고수라는 소문도 있으니 말입니다. 기연도의 여러 세력들도 충마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고요.”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민 선사의 말에 반박했다.
“원영기 선사는 아닐 거야.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충마 본연의 수행은 별 것이 아니나 전부 부리는 괴충 때문에 위세를 떨치는 것이라더군. 당시 일전만 해도 법보는 꺼내지도 않고 무수히 많은 곤충 떼를 풀어 결단기 선사 여럿을 산채로 잡아먹었다 했네. 그러니 곤충 요수를 부리는 마두라는 뜻으로 충마라 불리는 것이 아닌가.”
민 선사는 그래도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그러나 추 형도 보셨다시피 날벌레 떼 없이도 유리수를 한 번에 때려잡았습니다. 이는 결단 후기의 선사라 해도 어려운 일입니다. 분명 원영기 노괴가 정체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노인이 다시 무어라 하려는 데 선 선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충마가 원영기 노괴든 아니든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우리 모두를 죽일 힘이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걱정되는 것은 상대의 악명입니다. 일단 충마와 마주친 이들은 모두 곤충의 먹이가 되고 만다니 그 수가 벌써 백 명이 넘는다 합니다. 최근 2년 간 충마라는 이름만 나와도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진 가운데 민 선사가 청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충마가 잔악무도한 살인마란 것은 사실일 겁니다. 몇 년간 보물을 노린 살인의 주범으로 대다수가 충마를 지목했으니 어찌 안 그러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마두를 찾아 온 꼴이니 어찌 한단 말입니까.”
충마의 악명은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후 그들은 소리 없이 청년을 주시하며 그가 조용히 떠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때 유리수의 혼백을 뽑아낸 청년은 요수의 몸을 뒤져 하얀 내단까지 저물대로 넣은 후였다.
청년은 별안간 고개를 들더니 사방을 훑어보았다. 세 선사는 최대한 기척을 감추며 은닉술을 썼으나 소용없었다. 청년의 시선이 정확히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멈추었던 것이다.
“그리 오래 구경하셨으면 이제 신분을 밝힐 때가 된 듯 합니다.”
그 말에 세 선사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달아납시다.”
누군가의 고함이 들리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각기 다른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청년은 미미하게 미간을 좁히고는 중얼거렸다.
“아직 말도 다 듣지 않고 이리 급히 떠나다니. 내가 너희를 잡아먹기라도 한단 말이냐?”
이후 그의 안색이 굳으며 세 개의 저물대가 공중에 떠올랐다. 삼색의 딱정벌레 떼가 하늘을 뒤덮으며 쏟아져 나왔다.
웽웽웽웽웽웽…….
남색옷의 청년은 막 깊은 해역에서 사냥을 마치며 돌아오고 있던 한립이었다. 힐끗 뒤를 돌아본 노인 등이 날벌레를 보고는 질색을 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남색옷의 청년이 무언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은 삼색 딱정벌레가 그 소리를 듣고는 모여들어 세 자루의 거대한 창의 형태로 모여들었다. 날카로운 파공성을 남기며 쏘아져 나간 창의 비행 속도는 기함할 만했다.
창이 노인 등을 쫓아 사라지자 한립은 제자리에 서서 유리수에 붙어있는 투명한 가죽을 벗겨내는데 집중했다.
방어구를 제작하는데 적격인 재료였다. 그는 남은 잔해를 태우고 진법 법기와 예상초를 모두 회수했다. 모든 일을 마치자마자 허공에서 세 줄기 빛이 날아들었다.
잠시 후 놀랍게도 목에 삼색 목걸이 같은 것을 찬 세 선사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한립은 선사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온화하게 물었다.
“세 분은 어찌 저를 보고 그리 당황하여 달아나셨습니까? 저를 아시는지요?”
한립의 물음이 세 선사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충마가 지금 무어라는 것인가? 죽이기 전에 자신들을 가지고 놀려는 수작인 것인가? 흉악한 장한이 마음을 굳혔다는 듯 호되게 소리쳤다.
“죽일 거면 죽이면 그만이지 무슨 장난을 치려는 게요!”
한립의 얼굴이 굳더니 돌연 서늘해졌다.
“방금 제 물음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민 선사가 한립의 반응에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는지 겨우 핏기를 회복한 얼굴로 애절하게 애원했다.
“충마 선배님께서 사냥 중이신 것을 알았다면 절대 귀찮게 해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희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는 길이었을 뿐 악의는 전혀 없었으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충마라면 저를 일컫는 것입니까?”
처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노인이 그 말에 멍해져서 의혹을 드러냈다.
“그럼 충마 선배가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한립이 잠시 주저하다가 손을 뻗어 세 사람의 목에 푸른빛을 날렸다.
동시에 몸을 두른 목걸이가 울리며 다시 무수히 많은 딱정벌레들로 변해 그의 저물대 안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에 죽다 살아난 선사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기는 했지만 정말 오해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충마가 이렇게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미 한립의 능력을 체감한 선사들은 여전히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노인이 웃음기를 한껏 끌어올려 화답했다.
“허허, 정말 무슨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알려진 충마의 성정에 따르면 어찌 저희를 살려두겠습니까. 선사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겠는지요?”
상대가 정말 마두이든 아니든 실력이 그에 못지않다는 것을 알았으니 목숨을 부지하려면 조금이라도 눈 밖에 나서는 안된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행이 있으신 듯 한데 이제 막 도착한 모양입니다.”
노인이 움찔해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난감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상대의 물음에 착실히 답하는 것 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저희 형제가 문파 제자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이 당도할 때가 된 듯 합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먼 하늘에서 축기기 무리들이 나타났다. 비행 속도가 한참 떨어지는 지라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이 세 사람에게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는 번잡한 것을 꺼리는 지라 섬의 다른 쪽에서 기다릴 터이니 제자들을 안배하시고 와주시지요. 가르침을 청할 일이 있으니 인사도 없이 떠나신다면 섭섭할 것입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푸른빛으로 변해 섬 뒤편으로 사라졌다. 노인 등은 그제야 몸에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상대가 충마이든 아니든 자신들에게 살의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노인이 신중한 얼굴로 입을 달싹이자 민 선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아올랐다.
이후 제자들 앞에 나타난 금빛 얼굴의 민 선사가 무어라 명을 내리자 축기기 선사들은 모두 근처 섬에 상륙해 대기했다.
일을 마친 민 선사가 복잡한 얼굴로 노인 곁에 돌아왔다. 흉악한 인상의 선 선사가 당장 전음으로 노인의 의견을 확인했다.
“정말 만나러 가실 참입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게. 방금 상대가 어떻게 우리를 잡아 왔는지 잊었단 말인가? 그저 묻는 말에 착실히 답해주고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다면 괜찮을 걸세. 원영기 노괴를 대하듯 최선을 다한다면 죽이기야 하겠는가.”
“추 형 말씀이 맞습니다. 포악한 성품은 아닌 것 같으니 먼저 책을 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세 선사는 고분고분 섬의 뒤편으로 향했다. 한립이 평평한 암석을 골라 앉아 유유히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최근 기연도 해역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여기는 인적이 무척 드문 곳인데 이 근방에서 연달아 선사들의 무리를 마주했습니다. 보통 심연에서 사냥을 하지 않았는지요? 그리고 충마에 관한 소식도 상세히 알려주시지요.”
그의 표정은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세 선사들은 속을 알 수 없는 자란 인상을 받았을 뿐이다. 그들은 더욱 몸을 사리며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연도에는 최근 2, 3년 동안 들른 적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심연 해역은 벌써 금역이 된 지 오래입니다. 사냥은커녕 심연에 대한 이야기만 나와도 다들 안색이 달라지고는 하지요.”
“그러합니까? 좀 더 말씀해 주시지요.”
“2년 전 갑자기 요수들이…….”
이야기에 흥미를 보인 한립을 보고 한결 마음이 편해진 노인이 당시 심연에서 일어났던 일과 원영기 선사들까지 어찌 해보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일을 풀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