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
284화. 화형뢰겁
한립은 새로운 거처에 제련실을 따로 마련하고 진법을 설치한 후 연정과 만년영액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제련실의 문은 꼬박 1년 동안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제련실 밖에서 해야 할 일들은 밀실 밖에 남겨 둔 거대 원숭이 꼭두각시를 조종하며 처리했다.
그의 동굴은 여전히 질서정연했고 어떤 혼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의외의 사건이 발생했다.
쿠콰콰쾅.
어떤 낌새도 없이 밀실 벽에 갑자기 엄청난 진동과 소음이 전해진 것이다. 동시에 거대한 파도 소리와 천둥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더니 점차 소리가 커지며 작은 섬이 폭풍우에라도 휘말린 것 같았다.
쿵.
드디어 제련실의 석문이 열렸다.
순식간에 튀어나온 한립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는데 동굴 밖에서 또 다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그의 손이 맹렬히 허리춤을 스치더니 노란 빛이 솟아올랐다.
여러 기호와 문양들이 수놓아진 담황색 진법 깃발이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그가 입을 벌리자 푸른 기운이 깃발에 분출되었다.
노란 빛이 쏘아지는 동시에 한립이 손을 털어냈고 깃발은 땅으로 파고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한립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로 주술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처의 모든 벽이 주술과 함께 금빛으로 빛나더니 금색 갑옷을 두른 것처럼 떨림과 소음이 사라진 것이다.
원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한숨을 내쉰 한립이 의문을 품고는 거처의 대문 밖으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섬의 상공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안개를 퍼트리는 결계가 작동하고 있었지만 결계의 주인인 한립의 시야는 가릴 수 없었다.
한립의 안색이 달라졌다. 방금 보강한 금제 덕분에 자신이 기거하는 산맥은 멀쩡했으나 그 밖의 공간은 난리가 난 것이다.
몇몇 산은 이미 산사태가 나 흙과 바위 더미가 쏟아져 내렸고 땅은 엄청난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져 수풀이고 초목이고 남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한립이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놀란 것은 섬 주변의 해수면에서 파도가 용솟음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백 장에 이르는 거친 파도가 연달아 섬을 때렸고 홍수처럼 쏟아진 물줄기가 섬의 절반을 습지로 만들어 버렸다.
거대한 파도의 시작점은 망망대해의 어느 해무 속이었는데 천둥 번개가 내려치며 괴이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맹수가 요동치는 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우레 소리와 파도 역시 더욱 거칠어졌다.
‘고계 요수가 근처 해역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 ’
이 정도 파급력이라면 엄청난 덩치의 요수임이 틀림없었다.
잠시 상황을 헤아려 보던 그가 빛으로 변해 섬을 벗어났다. 만일을 대비해 기운과 기척을 갈무리 하니 몸에서 뿜어내던 빛도 한층 옅어졌다.
일단 섬의 해무를 빠져 나오자 그의 예상대로 멀지 않은 곳에서 요수가 이 모든 풍파를 일으키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요수의 크기가 너무나도 컸다.
그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거북류의 요수로 길이가 천장은 되었으며 거대한 산이 해수면 위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새까만 등딱지와 교룡을 닮은 푸른 머리를 가진 거북이는 기둥보다 두꺼운 네 다리와 은색 꼬리를 휘저으며 울부짓고 있었다. 그리고 좌우로 몸을 비틀 때마다 엄청난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져 곳곳에 있는 해역을 요동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한립의 시선을 끈 것은 수만 리 위에 형성된 먹구름에서 떨어져 내리는 굵은 벼락들이었다. 벼락은 엄청난 기세로 쉼없이 거북의 등딱지에 내려꽂혔다.
거북은 거대한 파도와 요사스러운 바람을 이용해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받아내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었지만 행동이 점점 흉포해지고 원래 비취색이었던 눈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화형뢰겁(化形雷劫)’
한립의 눈빛 역시 요동쳤다.
화형뢰겁이라는 것은 칠급 요수가 팔급으로 진화하며 겪게 되는 하늘이 내리는 재난으로 벼락 형태의 겁(劫)이었다.
이 재난을 통과해야 원래의 형태에서 탈피해 몸의 일부가 인간형으로 변하게 된다. 수행의 정도에 따라 변화 정도도 달라진다.
듣기로는 십급 요수의 경우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요수가 변하면서 겪게 되는 일에 대해 서책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운이 좋다고 본다면, 기연도에 팔급 이상의 요수가 실존하니 이후 천엽로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점에서는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운이 좋지 않다고 본다면, 거대 거북이가 이곳에서 진화를 한다는 것은 인근 해역에서 머문다는 뜻이었으니 팔급 요수와 자신이 이웃지간 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이제 막 팔급으로 진화를 하려는 참이니 지금 달아나기에도 늦지 않았다.
이전에 칠급 요수였을 때는 자신의 거처를 발견하지 못했다 해도 일단 팔급 이 되면 상황은 어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거처에서 수련을 하다가 거북 요수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고계 요수는 자신의 구역에 대한 개념이 분명했다.
‘이제 막 거처를 마련했는데 버리고 달아나야 하다니…….’
한립이 번민하니 체내에 있던 비검들이 요동을 쳤다.
그가 밀실을 빠져 나오기 직전에 일흔 두 개의 청죽봉운검을 완비했던 것이다. 연정의 제련 난이도가 그의 예상을 초월해서 반년이 아니라 장장 1년여 만에 겨우 성공했다.
그리고 이미 폐관을 한 김에 제련을 마친 비검들을 배양하는 중이었다. 방금의 소란이 없었다면 아마 몇 개월 뒤에나 출관을 했을 것이다.
‘요수의 원기가 크게 상한 틈을 타 기습을 하면 처리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성공하면 좋은 일이고 실패하면 그때 가서 다른 거처를 찾으면 될 일.’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한립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약해졌다 해도 팔급 요수를 그 혼자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팔급 요수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나 동급이라는 원영기 선사의 무서움은 익히 체감했던 것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거처를 내주는 편이 나았다.
만일 서금충이 알을 낳기 전 서로를 잡아먹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데리고 나와 한번 도전해 보았을 지도 모른다.
한립은 아직도 거북에게 쏟아져 내리는 벼락들을 보며 탄식했다. 괜히 어물쩍거리다가 화를 입기 전에 거처로 돌아갈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가 막 몸을 돌리려는데 저 멀리에서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리며 은은한 금 빛이 감지되었다. 이어 다른 방향에서도 새의 지저귐 같은 것이 울리며 붉은 빛이 날아들었다.
한립이 놀라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다시 경악할 만한 일이 생겼다.
거북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면에 광풍이 일더니 수십 개의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엄청난 크기의 무언가가 바다 속에서 튀어나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무 놀란 한립이 재빨리 은닉술을 펼치며 물러섰다.
크하하항!
남색 빛이 반짝이더니 온몸이 선홍색인 거대 요수가 파도를 뚫고 물위로 몸을 드러낸 것이다. 요수는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한립은 당황해 허공에서 추락할 뻔했지만 법력을 끌어올려 심기를 가라앉혔다. 대연결이 신속히 체내를 돌아다니며 그를 안정시켰으나 놀란 얼굴은 가실 줄을 몰랐다.
‘독교(毒蛟)!’
한립의 얼굴에 희미하게 두려운 빛이 어렸다.
이전에 보았던 검은 교룡과 똑같이 생겼지만 백여 장 길이에 달하는 선홍색의 교룡은 악명이 자자한 독 속성 교룡이었다.
교룡의 붉은 비닐에 흐르는 영력의 광채로 미루어 보아 명실상부한 팔급 요수였다. 요수가 내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압감은 원영기 노괴에게서나 느껴지던 것이었다.
교룡은 상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소수의 천지영수 중 하나로 수행 속도가 일반 요수를 초월했고 일정 경지 이상에 이르면 법력 역시 동류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순종 교룡에게는 더 상급의 요수를 죽이는 일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란 의미였다.
경전에서 보았던 정보가 사실이라면 저 독교는 비록 팔급이나 구급 요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으나 냉정한 이성이 그를 만류했다. 지금 두 빛 줄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좋은 의도로 날아오고 있을 리 만무하니 상황을 보아 움직이는 것이 대책 없이 달아나는 것보다는 나은 계획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한립은 조용히 붉은 피풍의를 꺼내 몸에 두르고 양손에 오행환과 바구니 고보를 쥐었다.
이제야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교룡은 포효를 멈추고 머리를 돌려 아직도 벼락을 맞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거북을 발견했다.
이후 그의 몸에서 섬뜩한 남색 빛이 분출되더니 교룡의 거대한 몸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 자리에는 보통 사람의 체격을 한 인간형 교룡이 등장했다. 머리는 흉포한 교룡의 것 그대로였으나 사람의 팔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온 몸이 선홍색 비닐로 덮인 인간형 교룡은 굵직한 꼬리를 쉼 없이 흔들어 댔다.
처음 교룡이 변하는 모습을 본 한립은 말문이 막혔다.
인간형 교룡은 맨 몸으로 파도 위에 서서 평지를 걷듯 흔들림이 없었다.
“……!”
독교의 짙푸른 두 눈이 슬그머니 한립이 숨어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시선 속의 음산한 기운을 느낀 한립은 온몸이 서늘해졌고 고보를 쥔 두 손에 식은땀이 맺혀왔다.
다행히 늦지 않게 금빛과 붉은빛이 연달아 당도했다. 교룡의 서늘한 시선은 한립은 제쳐두고 허공에 나타난 세 선사에게 돌아갔다.
신선 모습의 노인 도사가 등에는 보검을 매고 손에는 불진을 든 채 금빛이 반짝이는 팔괘 도포 차림으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노인은 교룡의 등장에 조금 놀란 눈치이긴 했으나 곧 탐욕스런 눈빛을 보냈다.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외모가 비슷한 중년인 둘이 서 있었는데 시체처럼 시퍼런 낯이나 요란한 붉은색 장포 차림까지 꼭 닮았으나 지닌 물건이 달랐다. 하나는 거대한 호리병처럼 생긴 박을 등에 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기다란 해골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아래쪽의 거대 거북과 독교를 보았지만 도사를 보고는 무표정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노인은 원영 초기의 수행이었지만 다른 두 중년인들은 결단 후기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붉은 장포의 중년인들은 교룡이나 노인을 보고도 전혀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노인이 눈알을 굴리며 잠시 생각하다가 먼저 중년인들에게 웃음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헤헤! 뜻밖에도 관 선사들을 만나게 될지 몰랐군요. 빈도가 실례를 범하였소.”
호리병박을 맨 중년인이 얼굴을 꿈틀하더니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저희 역시 이곳에서 금하 선배님을 만나 뵐 줄 몰랐습니다. 만일 두 요수를 사냥하실 마음이라면 저희 형제가 양보하지요.”
그 말에 노인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둘 중 한 마리는 거의 구급에 달하는 독교인데 아무리 오만 방자한 자라도 어찌 홀로 사냥을 하겠는가? 사실 법보의 위력을 믿지 못했다면 아예 도전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노인이 헛기침을 몇 번하더니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했다.
“빈도가 어찌 홀로 독교를 이기겠나. 두 선사 역시 파천신사(破天神砂)를 지니고 있더라도 저 요수를 가둬 죽이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연합을 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듯싶은데 흥미가 있으신가? 팔급 요수는 이미 여러 해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만일 요행히 성공한다면 요단은 포기할 테니 교룡의 혼만 빈도에게 넘기시게.”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두 중년인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서로 어떤 방식으로 상의를 하였는지 곧 해골 지팡이를 든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회답했다.
“선배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그러시지요! 저희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기회이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한 중년인이 손을 뒤집어 등 뒤에 있던 붉은 호리병박을 불러들였다.
노인도 상대의 수락에 기뻐하며 소매에서 푸른 옥반지를 꺼내었다.
아래에서 세 선사를 주시하고 있던 독교 역시 그들의 말을 알아들은 듯 입을 벌려 핏빛 광선을 노인을 향해 쏘고서는 허공에서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중년인 뒤에 나타난 독교가 남색 빛이 도는 열 손가락을 뻗었다.
텅!
커다란 울림과 함께 거대한 푸른 손이 그것의 공격을 막아냈다. 중년인이 든 해골 지팡이가 스스로 악귀로 변해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곽 씨 형제도 등골이 오싹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붉은 호리병박도 발동해 청아한 울림을 내며 무수히 많은 수정 결정을 내뿜었다. 하늘을 뒤엎을 듯한 붉은 결정체들이 방원 백 여 장을 붉게 물들였고 독교 역시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