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
283화. 환염아
다른 석실들은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혈옥지주와 아기 원숭이 제혼, 그리고 허천전에서 수거해온 누에 금사잠들이 각자의 석실에 자리 잡았다.
혈옥지주는 그렇다 치고 제혼은 비록 명혼주를 보유하고 있지만 무언가 꺼려지는 것이 아직도 제련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금사잠들은 딱히 엄청난 의도를 가지고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곤충 요수 서열에 이름이 오른 기이한 곤충이기에 챙겨 왔을 뿐이다.
일단 누에 상태일 때는 서열도 낮았고 혈옥지주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다른 선사들은 거의 모르는 진화 단계가 존재했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금사잠들은 환염아(幻焰蛾)라는 나방으로 진화하는데 그 위력은 누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곤충 요수 서열 17위에 이름을 올린 기이한 곤충으로 태생적으로 환술을 부릴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서책에서도 애매모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상고 시대에도 드문 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서열이 높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여러 노괴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금사잠들을 데려온 것이다.
물론 만천명이 주저 없이 버린 누에들은 원기가 크게 상해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태세였다. 한립이 사령환(飼靈丸) 등 희귀한 환약들을 끊임없이 내주어 겨우 숨이 붙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상태가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립은 금사잠이 있는 석실로 향했다. 석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청록색 거대 누에들이 바닥에 누워 움직임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미미하게나마 영기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이미 죽은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석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참을 둘러보던 한립은 체격이 가장 크고 활력이 남아있는 암수 한 쌍을 선발했다. 그리고 품에서 옥갑을 꺼내 오색 구슬 두 개를 한 개씩 물려주고는 다시 석실을 나섰다.
어차피 살 가능성이 희박한 녀석들이니 구슬의 약효라고 시험해보려는 생각에서였다. 보천단의 명성이 엄청나니 약성 역시 대단하지 않겠는가?
이 구슬들이 그가 생각한대로 보천단의 약성을 응결해 놓은 것이라면 누에들을 구하지 못한다 해도 해치지는 않아야 했다.
이후 며칠 동안은 구곡영삼과 같은 특수한 수확물을 처리했다.
원영을 응결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니 아무래도 신중하게 보관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약초 재배지의 중심부에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다.
몇 벌의 진법 법기를 이용해 그곳을 단단히 봉쇄했고 주변의 땅은 전부 금으로 된 물질로 대체했다. 그리고 구곡영삼의 본체인 산삼을 다시 심어 놓았다.
줄곧 옥갑 안에 가두어 두었던 분신인 하얀 토끼 역시 오래 그리 둘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길어지면 본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온갖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옥갑을 구곡영삼의 본체 옆에 두고는 모든 부적을 뜯어내었다. 그러자 한립이 옥갑을 열기도 전에 하얀 빛이 빠져 나와 산삼 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아무래도 한 번 포획이 되더니 하얀 토끼가 담이 더욱 작아진 것이다.
그의 시선이 구곡영삼에 닿자 신비한 병의 녹색 액체를 이용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의문이 샘솟았다.
이런 의문은 처음 본체를 취득했을 때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단 녹색 액체가 꼭 필요한 곳이 많으니 이것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게다가 녹색 액체를 사용했다가 구곡영삼의 영험한 힘이 증가해 진법을 뚫고 달아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얼마나 후회막심이겠는가!
일반적인 풀떼기가 아니라 몸 밖의 몸이라는 화신(化身)을 지닌 선가의 영약이니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구곡영삼을 잘 안배한 그가 신경을 거두었다.
이제 생산되는 녹색 액체는 모두 삼대신목(三大神木) 중의 하나라는 양혼목에게 쏟아부을 작정이었다.
지금은 밑동뿐이었지만 몇 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만 년 산 양혼목을 다시 볼 날도 멀지 않았다.
그는 이제 허천정을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었으나 저물대에서 무의식중에 갈빗대 조각을 발견하고는 흥미가 일었다.
어마어마한 위력의 수라성화 속에서도 이 늑골 조각만이 멀쩡했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기이했다. 침상에 드러누운 그는 새하얀 뼈를 들여다보며 호기심에 불타올랐다.
일단 이 늑골이 정말 현골의 뼈는 아닐 것이다. 상황으로 보아 노괴가 다른 이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그리 위장을 하였을 뿐.
특수한 재질과 은은히 발산되는 영기로 보아 법보 종류는 아니더라도 누군가 제련해 만들어낸 물건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의식을 주입해 보거나 영력을 불어 넣어도 반응이 없었다.
“흠…….”
심사숙고 끝에 늙은 마두가 요귀에 관련된 술법을 익혀왔다는 것이 떠올랐다. 늑골 뼈 역시 음혼한 기운을 이용해야지만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몰랐다.
한립은 어두운 기운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문득 취혼발이 생각났다. 사발 속 혼귀들은 꼭두각시들을 제련하며 깨끗이 소모해 버렸지만 자체에 스며든 음한 기운은 여전했다.
손이 저물대를 스치자 칠흑같은 검정 사발이 나타났다. 취혼발을 본 한립의 손가락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음기가 손바닥을 통해 체내로 흡수되며 천천히 늑골 뼈를 쥐고 있는 다른 손으로 옮겨 갔다.
서늘한 음기가 검은 빛을 내더니 신속히 뼈를 감싸 안았다. 한립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늑골 뼈가 드디어 반응을 보이며 새하얀 표면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음기가 얼마 주입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절반은 검은색으로 변해버렸다.
한립은 놀라지 않고 오히려 눈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잠시 고민을 하다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후 취혼발을 쥔 손에서 푸른 기운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키에에엑”
동시에 다른 손에서 귀곡성 같은 것이 울리며 더욱 거대한 검은 기운이 뭉쳐졌다. 그리고 늑골 뼈가 거침없이 음기를 삼켜댔다.
일다경이 지나자 계속된 음기의 흡입으로 뼈다귀가 새까맣게 변하더니 칠흑 같은 빛이 터져 나와 침실을 음산한 기운으로 가득 채웠다.
한립은 잠시 주저하다가 취혼발을 거두고는 다른 손에 있던 늑골 뼈를 놓아주었다. 검은 뼈가 그의 손을 떠나 떠오르더니 그것을 감싸던 음기 역시 검은 빛 속에서 흩어져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보는 한립의 두 눈이 빛났다.
그러나 공중에서 낮게 울부짖고 검은 빛을 토해낸 이후에 뼈다귀는 다시 그 이상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한립이 공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기운을 가르며 늑골 뼈가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잠시 뼈를 응시하던 한립이 천천히 의식을 불어넣어 보았다.
“……!”
이번에는 어떻게 해도 통과할 수 없던 장벽이 걷히기라도 한 듯 아주 순조롭게 의식을 불어넣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검은 빛이 반짝이고는 거대한 고대 문자와 도안들이 연달아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서책이었어!’
한립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진 서책일 수 있다는 그의 추측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한립이 한 글자 한 글자 탐독하기 시작했다.
‘현음대법(玄陰大法)’
그것은 아주 익숙한 글귀였다. 그가 비록 명성이 자자한 마도 공법인 현음대법을 직접 익혀 보지는 못했지만 당초 분신 곡혼이 수련하던 혈련신광 역시 이 법결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그는 앞쪽 법결을 살피고 수많은 비슷한 수련법을 읽어본 후에 판단을 내렸다. 이 늑골 뼈 모양의 서책은 바로 현음경(玄陰經)이었다.
조금 실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청원검결을 익히고 있었으니 현음대법이 아무리 패도적이고 막강한 위력을 지녔대도 다시 이것을 익히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그러나 현음경 뒷부분에 있는 마도의 비술들을 익히는 것은 가능했다. 그는 불가사의하게만 보이던 비술들을 하나 둘 살펴보더니 놀람과 기쁨 그리고 복잡한 심경과 흥분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비술들의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청원검결을 구성까지 수련하고 현음경 내의 비술들을 익힌다면 원영기 선사의 적수는 못 되더라도 목숨을 보전할 실력은 생길 것이다.
극음 사조의 천도시화 역시 당연히 그 중 하나였고 천도요시라 불리던 강시들은 이 비술을 익히면 부가적으로 얻게 되는 제련법이었다.
아쉽게도 현음대법을 기초로 한 원영기 선사 이상만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한립도 익혀보려 했을 것이다.
천도시화의 위력은 그가 직접 보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약점까지 말이다. 그것을 발견한 한립은 속으로 냉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아마 극음과 다시 한 번 붙을 날이 온다면 분명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현음경을 살피며 결단기 선사가 익힐 수 있는 것 중 마음에 드는 비술 두, 세 개를 외웠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레 현음경이 숨겨진 뼈다귀를 거둬들였다. 이번 수확에 만족스런 한립은 저물대 속의 허천정에 손을 뻗으며 불타오르는 열정을 느꼈다.
한립은 곧 다른 밀실로 걸음을 옮겼다.
허천정을 열 수만 있다면 보천단은 물론이고 여러 고보들을 얻어 순식간에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런 희망에 그는 하루 한번은 금사잠을 살피는 것 말고는 밤낮없이 작은 솥을 끌어안고 연구하며 쉼 없이 고대의 경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달이 다 되도록 별다른 성취가 없었다. 난성해 제1의 비밀이라는 허천정이 결단기 선사에게는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대단했다.
불에 타지도 물에 젖지도 않았으며 모든 법보와 고보를 사용해도 열리기는커녕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이제 막 벽사신뢰를 회복한 청죽봉운검들을 모아다 벼락을 쳐보아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 외에 다른 잡다한 방법을 다 써 봐도 헛수고였다. 결국 마음을 정리한 그는 솥을 저물대 속으로 다시 챙겨 넣었다.
허천정을 여는 것과 상당한 관계가 있으리라 예상한 건람주는 더욱 건드릴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영기 노괴 조차 두려워하는 건람빙염이었다.
최소한 결단 후기에 이르거나 원영기에 들기 전에는 건람빙염을 통제해 보겠다는 의지를 갖지 않기로 했다 이 정도 사리분별은 당연했다.
그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오색 구슬을 복용한 금사잠 두 마리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약성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다른 밀실에 있던 수만 마리 서금충들은 대규모 동족상잔(同族相殘)이 시작되었다. 더 진화된 서금충 알이 탄생할 날이 머지않았다.
이제 그가 목전에 둔 가장 중요한 일은 다시 한 번 일흔 두 개의 청죽봉운검을 제련하는 일이었다. 용암로에서 얻은 연정(煉晶)을 모든 비검 속에 녹여 넣을 작정이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 청죽봉운검을 훼손할 수 있는 무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장래에 고계 선사와의 싸움에서 우세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였다. 문제는 연정의 제련이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특수한 재질이다 보니 그의 예상대로라면 반년 이상은 진법의 도움을 받아 서서히 녹여야 할 것 같았다. 거기다 제련을 하던 도중에 법력이 고갈되어 손을 놓으면 재료를 망칠 가능성도 있었다.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겨우 결단 초기의 수행으로는 영약의 보조를 받아도 실패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도 일부를 소모하기는 했으나 만년영액이 남아 있기에 이런 걱정을 많이 덜어주었다.
해역으로 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수들을 상대할 것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법보의 위력을 상승시키는 것은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