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282화. 안개 속의 섬
노인이 한립을 대문까지 배웅하고는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담담한 음성이 돌연 울려 퍼졌다.
“어떤가? 쓸 만해 보이던가?”
방안에 걸려 있던 산수화 속에서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하얀 의복을 흩날리며 푸른빛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래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얼굴도 낯설지만 홀로 돌아다니는 산수란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네. 혼자 사냥을 나갔다가 몇 번 고생을 하고 나면 자연스레 다시 찾아 올 걸세.”
백의인이 그의 확신에 찬물을 끼얹었다.
“흥! 내 생각은 다르네.”
“무슨 뜻인가? 겨우 결단 초기 선사가 기연도에서 단독으로 사냥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리심은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백의인이 돌연 진지하게 답했다.
“상대는 아마 일반적인 결단기 선사는 아닐 거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 자는 한 번도 시선을 주지는 않았지만 나는 줄곧 감시당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네. 내 존재를 눈치 채고도 일부러 모른 척 한 것 같네.”
“착각이겠지. 네 은닉술은 한 단계 수행이 높은 선사도 눈치 채지 못했는데 그럼 곡 선사가 결단 후기의 성취라도 된다는 말인가?”
“알 수 없네. 상대가 익힌 공법이 특수하거나 아니면 특별한 보물을 몸에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
공연히 방을 몇 바퀴나 돌던 리심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됐네. 어차피 상대가 어떻든 간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성의를 표했지 않은가? 그럼 되었지.”
백의인도 노인의 말에 찬동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립은 이미 촌금각 인근의 잡물상에서 섬 주변 해역도와 요수 출몰에 관한 자료를 구매해 나오는 길이었다.
구석진 곳을 찾은 그가 자세히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
대충 훑기만 했는데도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기연도 주변에 위험 지역이라고 표시된 부분이 많아도 너무 많았던 것이다.
‘설마 이곳에서 전부 고계 요수가 출몰한다는 말인가? ’
명성이 자자한 해연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한립이 전속력으로 날아 남쪽 방향으로 반 개월만 가면 되는 거리였다. 다만 그 면적이 비정상적으로 광활했다.
종횡으로 수만리는 될 것 같았고 깊이야 헤아릴 수조차 없어 아직까지 그 바닥을 보았다는 이가 없었다.
자료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본 한립이 서책에서 의식을 회수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평상시와 다를 다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더 이상 흑석성 내에 머물지 않고 주저 없이 성을 빠져 나왔다. 성곽을 벗어나자마자 허공으로 치솟은 그가 파란 빛 줄기로 하늘을 꿰뚫은 것이다.
기연도 자체는 그리 면적이 넓지 않아서 중형 섬에 속했다.
또한 허운이 말한 대로 흑석성을 제외하면 다른 도시가 없어서 다른 곳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기연도의 다른 지역은 범인들이나 선사들이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기연도를 벗어난 그는 고개를 들어 방향을 가늠하고는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일단은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않는 해역을 골라 새로운 거처를 꾸려야 했다.
기연도 인근은 당연히 여러 선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한립은 일부러 해연의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한립의 예상대로 북쪽 해역에는 선사들이 드물었다.
십여 일 만에 눈에 띄게 마주치는 선사들이 줄어들었고 그를 본 저계 선사들은 숨기에 바빴고 고계 선사들은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곳도 다른 이들을 죽여 저물대를 강탈하는 일이 잦은 모양이었다.
다시 이틀을 더 가자 인적이 완전히 끊겼다. 그는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지도에 따르면 이쯤에서 서쪽으로 가면 소형 영맥이 흐르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있었는데 영맥이 보잘것없거나 기연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주하는 선사가 거의 없었다.
이런 악조건에 영향을 덜 받는 한립은 일단 그곳으로 가 자신의 거처로 삼기에 괜찮은지 살펴볼 계획이었다.
* * *
반 개월 후 한립은 작은 섬 위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지금까지 그가 발견한 영맥이 흐르지만 거주자가 없는 네 번째 섬이었다. 크기는 작아도 지형이 복잡해 황무지도 있었고 잡목들이 무성한 숲이나 푸른 초원도 있었다. 그리고 산봉우리들이 연결된 낮은 산맥도 존재했다.
그가 의식을 퍼트려 살펴본 결과 어떤 선사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선사들이 없는 것은 영맥이 없어서가 아니라 섬의 주변 환경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립이 이 섬을 선택한 것도 그 주변 환경의 영향이 컸다.
놀랍게도 이 섬은 대량의 해무에 휩싸여 있었고 그 하얀 안개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요동치는 격류의 소용돌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특이한 것은 안개가 오직 섬 주위에만 퍼져 있고 섬 안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을 처음 본 한립은 꽤나 놀랐다. 해수면을 조사하고 섬의 아래쪽으로 들어가 살피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섬의 아래에는 뜻밖에도 무수히 많은 구멍이 뚫려있어 수천수만 마리의 가느다란 은어 떼가 드나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어들은 대충 보면 평범한 물고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손에 영력을 담아 눈앞의 물고기를 잡으려 들면 은어들이 비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예리한 은색 뼈다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맨 손으로 움켜쥐려 했다가는 피를 보고 말 것이다.
‘탄해어(呑海魚)!’
물고기의 정체가 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작은 물고기들은 군집을 하여 살아가는 일급 하계 요수였다.
이들은 철처럼 단단한 몸과 해수면을 돌아다니며 삼킨 바닷물을 안개로 뿜어내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이 없는 종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흔히 볼 수 있는 탄해어 무리라도 섬 하나를 통째로 가려줄 만한 안개를 뿜어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립만 하더라도 도중에 만난 사급 요수 은익조(銀翼鳥)를 쫓다가 안개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 안에 감춰진 섬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아무 생각 없이 운무를 피해갔을 것이다.
멀리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규모의 해무로 여겨졌기에 신기할 것도 없었다. 한립은 여러 번 섬을 둘러본 끝에 이곳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섬에 흐르는 영맥은 길이는 십여 리, 높이는 삼, 사 장에 이르는 소형 산맥에 위치해 있었고 산맥에는 몇 개의 산봉우리가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아담한 규모의 섬에서는 동굴을 뚫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는 아예 협소한 산골짜기를 골라 그 아래에 동굴을 파나가기 시작했다. 이전 거처와 동일한 구조의 동굴을 만드는 일쯤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반나절도 안 되어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한립은 먼저 그가 제작한 진법 법기를 발동시켜 동굴과 산맥 전체를 보호했다. 금제를 펼치면 환영이 나타나 산맥이 아니라 그저 푸르른 숲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래도 한립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만일 수행이 높은 선사가 우연히 해무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의 눈은 속이기 어려울 것이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한립은 즉시 새로운 거처 안으로 들어와 지니고 있던 재료들을 정리한 다음, 밀실로 들어가 무언가를 제련하기 시작했다.
이레가 지나고 그가 다시 거처에서 날아올랐을 때는 수중에 열댓 벌의 동일한 진법 법기들이 들려 있었다. 그것들은 겉보기에도 분명 대단한 진법을 펼치는 용도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가 작은 섬 곳곳에 진법을 펼칠 때마다 대량의 안개가 솟구쳐 섬 전역을 뒤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법으로 생성된 안개와 섬 바깥의 해무가 합쳐져 섬의 모습이 완전히 감춰졌다.
이제 누군가 이곳을 지나친다 해도 저공비행을 하지 않는 이상 아래에 섬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한립은 허공에 떠올라 사방을 살피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비록 이렇게 많은 진법을 펼치려면 적지 않은 영석을 소모해야 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적은 재물에 연연하다가 화를 자초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립이 다시 푸른 빛 줄기로 변해 땅으로 내려갔다. 이제 남은 것은 곤충 요수 배양실과 영초 재배지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 * *
이틀 후, 한립은 어느 석실 안에서 촌금각 고옥에게 받은 옅은 황색의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돌연 표정이 달라지더니 의식을 거둬들이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에 그가 저물대에서 하얀 옥갑을 꺼내 들었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던 한립이 옥갑 안에서 꺼내든 것은 오색 빛깔의 작은 구슬들이었다.
한립은 그것들 중 하나를 집어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구슬을 넣고는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서책에서 보았던 어떤 그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림 속에는 오색의 빛을 사방으로 분출하는 주먹만 한 구슬과 그 주변을 떠도는 십여 개의 작은 구슬이 그려져 있었다.
작은 구슬은 한립이 들고 있는 것들과 똑같이 생겼다. 바로 허천정 안에서 튀어 나왔던 보천단이었다.
이런 괴이한 그림이 서책 중 설명 없이 아무렇게나 모인 그림들 중 하나라니 기묘한 일이었다.
촌금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서책을 훑다가 이 그림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이것이 바로 부보까지 얹어주며 고옥 손에서 서책을 얻어낸 이유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약이나 몇 개 쥐어주고 말았을 것이다.
서책 안에는 이것 외에도 그림 몇 장이 있었는데 모두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들은 법기나 법보 모양의 물건이며 요수나 괴물 같은 존재들이었는데 한립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보천단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다른 그림들도 평범한 물건들은 아닌 듯 했다. 앞으로 이것들을 마주할 가능성도 있으므로 한립은 최선을 다해 그 그림들을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한립은 손에 든 구슬들을 보며 난처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보천단과 연관된 물건이었다.
구슬들은 현골 노괴의 제자였던 극현의 해골에서 추출한 것이고, 극현은 혈옥지주를 소유하고 있었다. 종합해 볼 때 역도 극현 역시 이전에 허천전에 들어가 보천단을 구한 후 그것을 복용하였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죽고 난 후 해골이 오색의 빛을 내었던 것이고 해골을 태우자 이런 구슬들이 나온 것 아니겠는가!
무수히 많은 단약을 복용해본 경험 상, 십중팔구 보천단의 약성이 미처 녹아 들지 않았거나 약성이 너무 독해 몸 안에서 재응결을 거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닌 작은 구슬들이 진정한 의미의 보천단이라 볼 수도 있었다. 그림으로까지 남겨져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비록 수도자의 몸을 화로 삼아 단약을 제련해 내는 일은 수도계에서 조차 극히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한립은 이미 성공한 사례를 목격했었다.
흑살교 교주가 다른 이들의 몸에 심어 제련해 낸 혈응오행단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한립의 추측일 뿐이라 당장 위험을 감수하고 복용할 수는 없다.
그는 생각 끝에 결국엔 밀실을 나와 배양실로 향했다.
배양실은 크기가 다른 다섯 개의 석실을 뚫어 놓은 상태였는데 그 중 두 개는 종류가 다른 두 무리의 서금충들을 각각 배양하고 있었다.
한 무리는 허천전 내에서 신묘한 위력을 발휘하며 많은 철화의를 잡아먹은 수만 마리 딱정벌레 떼였고, 다른 한 무리는 천성성 거처에 남겨 두었던 서금충들이었다.
수만 마리의 서금충들이 다음 단계로 진화하려는 낌새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일부는 서로 잡아먹기 시작했으니 한립에게는 경사였다. 아마 허천천 무리가 다량의 개미 요수들을 잡아먹은 것이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