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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81화 (38/2,000)

# 281

281화. 촌금각

결국 이번에 올라온 두 여인은 낙찰 받지 못한 채 실망한 얼굴로 무대를 내려갔다. 여인들 다음에도 내성해의 희귀한 상품들이 연달아 무대에 올랐으나 한립은 흥미를 잃었다.

그가 어떤 구실을 대고 먼저 자리를 뜰까 생각하려는 찰나 허운이 먼저 그의 표정을 보고는 제안했다.

“이번 경매에는 그다지 괜찮은 물품이 없습니다. 1년에 한번 열리는 연합 경매에나 다시 와보시지요. 그럼 이제 흑석성의 다른 곳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모두의 동의 속에 허운이 경보청을 나와 다른 통로로 명주헌을 빠져 나왔다.

“저기 보이는 여러 가옥들은 범인 남녀들의 임시 거처로 흑석성에서 살고자 한다면 저곳에서 등록을 마쳐야 합니다.

하지만 일정시간 동안 그들을 고용하고자 하는 이가 나타나지 않으면 즉시 흑석성을 떠나야 하지요. 방금 명주헌에서 보았던 범인 여인들도 모두 저곳을 거쳐서 고용된 것입니다.

저 집은 성내의 가장 큰 원료상인 촌금각(寸金閣)으로 전문적으로 희귀 재료를 매매합니다. 일단 원료명을 이야기하기만 하면 내놓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 하는데 조금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제법 명성이 높은 곳입니다. 이어서 세 개의 건물이 연결된 저곳은…….”

허운은 길을 거닐며 아주 익숙하게 곳곳을 소개해 주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한립이 어느 부분에서 마음이 동했는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허운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곡 선사 왜 그러십니까?”

“저는 따로 처리할 일이 있어 이쯤에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뵙도록 하시지요.”

허운이나 역 선사 등이 모두 일순 당황했다.

“저…….”

한립과 같은 강자가 무리에서 빠지겠다 나오니 허운과 금의 선사가 말리다가 그의 서늘한 시선을 눈치 채고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중얼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한립은 어느새 촌금각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모습이 멀어지자 허운과 역 선사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온 몸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다른 선사들은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저 선사는…….”

“곡 선사가 따로 움직이겠다고 하니 나름의 계획이 있는 것이겠지요. 제가 그럼 계속 다른 곳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금의 장한이 마른 웃음을 지으며 무어라 하려는데 허운이 말을 자르며 다른 방향으로 길을 틀어버렸다. 동시에 금의 장한의 귀에 허운의 전음이 울렸다.

“역 선사! 상대의 내력을 알 수 없으니 더는 휘말리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곡 선사의 수행이 분명 저희들의 수행을 훨씬 초월하니 뒤에서라도 이야기를 삼가시지요.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간 큰일 나는 수가 있어요.”

금의 장한이 안색이 변해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때 한립은 벌써 수려한 외모의 소년을 따라 깔끔한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촌금각은 밖에서 볼 때는 거대한 석조 건물이었으나 안으로 들어오니 수많은 방으로 나뉘어 각자 전문 분야의 원료를 거래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거침없이 관사를 보겠다 요청했다. 다른 선사라면 말이 많았겠지만 한립이 결단기 수행을 드러내자 하인은 바로 예의를 갖춰 귀빈실로 안내했다.

아무리 흑석성이라도 결단기 선사는 소홀하게 대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가 귀빈실에 들고 얼마 되지 않아 한 노인이 얼굴에 웃음을 띠고 들어왔다.

한립을 향해 포권을 취한 노인은 뜻밖에도 결단 초기의 선사였다.

“저희 촌금각을 처음 찾아주신 듯 합니다. 저는 이곳의 관사인 리심이라 합니다.”

“몇 가지 여쭐 것이 있어 귀각을 찾았습니다.”

리 관사도 꽤나 대범한지 질문을 듣지도 않고 말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런 시원시원한 대답이 한립의 마음에 들었다. 리 관사는 한립의 변화술을 꿰뚫어 보지 못했기에 그의 얼굴을 보며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단약을 제련하는데 필요한 영약을 찾고 있는데 상고 시대의 이름밖에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귀 각에서 원료를 찾을 수 있을지 알고 싶군요.”

“허허, 그런 일이셨다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가 문 밖을 향해 냉랭히 명했다.

“여봐라, 어서 가서 고옥을 오라 이르거라.”

“예!”

문 밖에서 앳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리심이 고개를 돌려 한립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고옥이 비록 연기기 선사에 불과하나 전문적으로 상고 시대의 약방과 영약 등을 연구하니 도움이 되어드릴 것입니다.”

기쁜 마음에 한립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밖에서 붉은 빛이 들어와 천장을 몇 바퀴 회전하더니 정확히 노인의 수중에 떨어져 내렸다. 소식을 전하는 부적이었다.

의아한 기색이 한립의 얼굴을 스쳐 지나갈 때엔 이미 부적은 노인의 손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리 관사는 뜻밖이라는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곡 형께서 오늘 막 흑석성에 당도신줄 알았다면 본 각을 더 소개해 드릴 걸 그랬습니다.”

노인의 태도가 더욱 친밀해졌다.

짧은 시간 안에 벌써 자신이 방금 기연도에 온 것을 알아낸 것이다. 한립은 조금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고생 끝에 기연도에 도착해 다른 이들의 주의를 끌고 싶지 않거든요.”

한립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였으니 노인도 한립의 의도를 눈치 챘을 것이다. 노인은 바로 말을 돌려 기연도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때 서생 차림의 사내가 밖에서 걸어 들어와 둘을 향해 예를 취했다.

“고옥이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청아한 얼굴에 검은 수염을 기른 그는 속세를 벗어난 학자의 풍모를 드러냈다. 리심이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곡 선배께서 상고 시대 영약에 관해 묻고자 하시니 성실히 답해드리거라.”

“존명! 최선을 다해 선배님을 돕겠습니다.”

“천엽로라는 이름을 고 선사가 들어보았는지 모르겠군.”

“천엽로라면…….”

고옥이 잠시 멍해지더니 바로 답을 올렸다.

“천엽로는 저도 인상 깊게 보았던 영초입니다. 만일 몇 년 전에 물어보셨다면 답해드릴 바가 없었겠으나 우연히 2년 전 어떤 상고 시대의 경전에서 천엽로가 언급된 부분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복제를 해두었는데 직접 보시겠습니까?”

말을 마친 그가 조심스럽게 한립의 기색을 살폈다.

“관련 서적이 있다니 더할 나위가 없구만! 만일 정말 내가 찾고자 하는 내용이라면 필히 보상을 하겠네.”

고옥도 그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결단기 선사가 보상을 하겠다는 말을 하다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그가 주저 없이 품을 뒤져 옅은 황색의 서책을 꺼내 한립에게 바쳤다.

“바로 이 서책입니다. 선배님께서 직접 자세히 살펴보시지요.”

서책을 받아 든 한립이 신속히 의식을 불어 넣어 내용을 훑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동안 한립의 얼굴에 흥분과 의혹이 교차했다.

리심이 옆에서 그를 살피다가 이런 표정 변화를 보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 했다. 고옥도 서책에 기재된 내용이 천엽로라는 영약에 관한 것이 아닐까 봐 불안해졌다.

결국 서책에서 의식을 거둔 한립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내가 찾던 내용이 맞구나.”

긍정적인 이야기였지만 두 눈에 감돌던 흥분은 많이 가신 채였다. 노인이 눈을 굴리며 떠보았다.

“어찌 천엽로를 찾는데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생각지도 못하게 팔급 요수와 연관되어 있는 영초이더군요.”

“팔급 요수 말입니까?”

“천엽로라는 것은 사실 반요초(伴妖草)의 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팔급 요수의 근처에서 자라나는 반요초만이 효과가 있다 하는군요.”

리심이 말을 잃었다. 반요초는 요수의 거처 인근에서 요기의 영향을 받아 자란 영초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반요초들은 요수가 자생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겠지만 팔급 요수 소굴에서 자라나는 것은 비범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외성해에는 구급, 십급 요수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그저 소문이나 기록일 뿐이었다.

칠급 요수만 되어도 흑석성에서 발견되는 요수들 중 가장 고급에 속했으니 팔급은 말할 것도 없었다.

리 관사가 한립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어떤 괴이한 단약을 제조하려는데 그런 재료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한립이 서책을 만지작거리다가 고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자세히 연구를 해보고 싶은데 고 선사가 서책을 넘겨줄 수 있겠는가?”

“선배님께서 필요하시다면 당연히 내어드려야지요.”

고옥이 잠시 당황했으나 주저 없이 답하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바닥에서 곧 작은 약병과 노란 검이 그려진 부적이 나타났다.

“선배된 도리로 함부로 완배의 물건을 취할 수야 없겠지. 수행을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될 단약과 부보이니 가져가 쓰시게.”

“이런 보물을 주시다니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옥이 단약과 부보를 받고는 희색이 만연해 연달아 허리를 굽혔다. 이런 물건은 일개 연기기 선사에게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리심은 한립의 거침없는 포상에 약간 놀라기는 했으나 조용한 목소리로 고옥을 내보냈다.

“그럼 고옥은 이만 나가 보거라.”

이제 방 안에 두 결단기 선사만 남았다.

“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지요.”

“리 선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촌금각에서 혹시 마노수의 뿔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정말 잘 찾아 오셨습니다. 마노수의 뿔이 희귀하기는 하나 지난달 본 각이 두 개를 매입해 놓은 참입니다. 만일 필요하시다면 당장 사람을 시켜 그 중 하나를 가져오게 하지요.”

노인이 박수까지 쳐가며 웃음을 터트리고는 바로 하인을 향해 분부를 내렸다. 그러자 한립의 얼굴에는 자연히 희색이 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이 은색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었다. 은쟁반 위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목함이 있었다.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목함을 들어 뚜껑을 열어보았다. 남색 빛이 반짝이는 반촌 길이의 뿔이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만족한 그는 함을 닫고 말했다.

“요긴하게 쓰이겠습니다. 얼마에 구입할 수 있겠습니까?”

“영석 5,000에 매입한 물건이지만 선사께서 꼭 필요하시다 하니 매입가에 그대로 넘기지요.”

한립은 감사를 표하고는 중계 영석을 지불했다. 노인이 품이 넉넉한 소매 안으로 영석을 집어넣더니 얼굴에 웃음을 띠고 물었다.

“그럼 곡 선사께서는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선사처럼 법력이 고강한 분들도 홀로 이곳의 고계 요수를 상대하다가는 중상을 입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선사와 비슷한 수행을 지닌 분들을 소개 시켜드릴까요?”

그 말에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시종일관 자신을 환대하던 그가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꺼낸 것이다.

“호의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는 일단 제련해야 할 단약이 있어 얼마간은 폐관 수련을 하며 지내려고 합니다.”

그는 절대 낯선 선사들과 함께 해역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노인의 눈에 언뜻 실망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래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겠습니다. 일단 수행을 높이고 이곳에 익숙해진 이후 사냥을 나가도 늦지 않지요. 다만 함께할 일행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드린 제안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한립은 당연히 그러겠노라 답하고 상대와 한담을 나누다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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