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279화. 흑석성
금의 장한이 석실 구석의 성궁 선사를 보더니 제안했다.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는 그러니 밖으로 나가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럽시다.”
금의 장한이 기뻐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한립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곡 형, 함께 들으시지요. 모두 함께 움직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를 자기 무리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한립이 거절하지 않고 먼저 석실을 걸어 나갔다.
“그러시지요. 저도 듣고 싶던 참이었습니다.”
흉터 사내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저 분은 일행이 아닙니까?”
까만 얼굴의 중년인이 한립에게 약간의 적의를 보이며 돌연 입을 열었다.
“같이 전송진을 이용했을 뿐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의 말에 금의 장한이 미간을 좁혔으나 나무라지는 않았다. 허운 역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선사들이 석실을 빠져 나왔다. 벌써 밖에 나온 한립은 놀랍다는 얼굴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이전에 갔었던 응취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작은 규모의 성 안에 도착해 있었다. 겨우 방원 이십 리 너비에 허름하긴 했으나 검은 돌로 성벽이 쌓여있었다.
전송진이 들어있는 낡은 석실은 도시의 중심에 위치해 제단 양식의 높은 단위에 지어진 건물로 사면에 돌계단이 있었다.
비교적 높은 곳에 서 있는 셈이었기에 사방을 둘러보기 좋았다.
삼, 사 장 높이의 석벽 너머에 두꺼운 하얀 빛이 응결한 보호막이 성 전체를 품고 있었다. 석벽 안에는 크기가 각기 다른 석실들이 있었다.
다만 이상한 것은 누각 같은 고층 건물은 없고 모두 단층의 건물이라는 점이었다.
대충 보면 빼곡히 들어찬 석실들로 보였지만 실질적으로 독립되어 거처로 쓰이는 곳은 많지 않았다. 몇몇 석실이 연결되어 하나의 건축물을 이루었고 어떤 방들은 엄청나게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를 더욱 의아하게 한 것은 섬에는 범인들이 선사들과 섞여 살며 검은 돌로 깔아놓은 도로를 오가며 바쁘게 석실을 드나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대부분이 용모가 고운 여인들로 나비처럼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다른 범인들은 체구가 건장해 힘 좀 쓸 듯한 사내들이나 수려한 외모의 소년 소녀들이 전부였다.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금의 장한 등이 흉터 사내의 안내를 받아 걸어 나왔다. 그들도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은 외성해로 올 준비를 하며 요수도에 대해 연구를 했었는데 이곳과 부합하는 정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금의 장한이 이채를 띠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류 선사 이전에 구해놓은 기연도 자료를 꺼내 보시지요. 아무래도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할 듯합니다.”
“예, 잠시만요.”
류 씨 성을 가진 중년 부인이 서둘러 저물대를 뒤적였다. 그런데 허운이 손을 휘저으며 부인의 행동을 제지했다.
“무슨 자료 같은 것은 찾아볼 것 없습니다. 이전에 기연도에 관해 알려진 소식들은 대부분이 거짓이니까요.”
“거짓이라니 무슨 의미십니까?”
“기연도는 다른 요수도들과는 달라서, 보통 이곳을 떠나 돌아가는 선사들은 동일한 내용을 외워가서 거짓 정보만을 알리도록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하게 되니 역 선사 등이 이곳에 온 것이 복인 될 것인지 화가 될 것인지 모르겠군요.”
류 부인이 불안감을 드러냈다.
“동일한 내용을 외워가게 한다고요? 누가 그런 짓을 하게 한답니까? 설마, 성궁이…….”
“성궁은 아니지만 이곳은 강력한 세력의 통치를 받는 곳이라 성궁이라 하여도 쉽게 건들지 못합니다.”
그의 말에 한쪽에 서 있던 한립의 눈썹이 끌어올려 졌다. 다른 이들도 서로 시선을 마주할 뿐 할말을 잃었다.
“헤헤, 사실 이곳은 그리 이상한 곳은 아닙니다. 어떤 선사들에게는 간절히 오고 싶어 할 만 한 좋은 섬이기도 하지요. 이곳은 흑석성(黑石城)으로 기연도의 제일가는 도시이자 유일한 성이지요.
실력이 되거나 충분한 영석과 요단이 있으면 선사들의 낙원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다른 요수섬에서는 향유하거나 구입할 수 없는 수련 반려나 기이한 위력의 법보, 높은 가치의 영수,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재료 등이 무궁무진합니다.”
흉터 사내는 유혹적인 내용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금의 장한 등도 그 말에 놀라고 의아해 했다. 하지만 한립 만이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평온한 얼굴로 곳곳을 살피고 있었다. 흉터 사내가 그를 몇 번 훑어보았다.
금의 장한이 깊게 숨을 내쉬며 물었다.
“허 형, 그러면 이곳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주실 수 있으실 지요?”
“당연하지요.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쓸 만 한 정보라 여기신다면 허 모를 잊지나 말아주십시오.”
그는 이미 상심한 기색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럼 허 형에게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이곳은 다른 곳과는 분위기가 다른 듯합니다.”
금의 장한이 어떤 사내를 응시하며 의문을 드러냈다.
그 사내는 대로에서 범인 여자를 품에 끼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근처의 범인이나 선사들 역시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허운이 미소를 지으며 별다른 말없이 모두를 근처의 석실로 데리고 갔다. 검은 돌로 만든 이 건물은 성 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가옥 중 하나였다.
멀리서 보니 입구에는 두 명의 아리따운 범인 여인이 서 있었고 빈번하게 드나드는 선사들을 향해 미소로 응대하고 있었다.
길을 가며 허운이 진지한 얼굴로 당부했다.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곳은 천성성은 아니나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법술을 이용한 다툼이 엄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뜻이지요.”
까만 얼굴의 중년인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그렇게 엄하단 말입니까? 천성성 보다 더 엄중한 문책입니다.”
“확실히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일단 성에 들어온 선사는 훨씬 안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요. 성 내에서 복수를 하겠다 설치던 녀석들 중 살아서 달아난 이는 한명도 없습니다. 성내에 원영기 선배께서 머무시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요.”
이번에는 금의 장한이 놀라 소리쳤다.
“원영기 선사가 있다는 말이오?”
모두 별단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립 역시 흠칫 놀라며 경계심을 키웠다.
“안으로 들어가 계속 이야기 나누시지요.”
여인들의 응대 속에 금의 장한 등이 흉터 사내를 따라 조심스레 석실로 들어갔다. 한립 역시 눈을 빛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일단 대문을 지나자마자 부채꼴 모양의 병풍이 앞을 막았다.
병풍은 분홍색으로 승천하는 선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의 여인은 단지 뒷모습만을 드러냈으나 살아 움직이는 듯 붉은 빛을 뿜는 것이 뜻밖에도 값비싼 법기인 것 같았다.
병풍의 양쪽으로 반원형 문이 있었다.
그 앞에 삼십 대의 궁장 차림 여인이 단아한 자태로 어떤 선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외모는 평범했으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성숙한 여인의 유혹이 느껴졌고 가벼운 웃음과 말소리에 사내를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선사와 그녀는 모두 축기 중기의 수행으로 쉼 없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이 허운 등이 들어온 것을 보고는 두 눈을 빛내며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병풍 뒤에서 어린 범인 여인이 걸어 나와 그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선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허 선사 아니십니까? 천성성으로 돌아가신다더니 아직도 전송진을 이용하지 못하셨군요.”
여인의 목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지만 한립은 오히려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만나온 다른 여 선사들처럼 미혼술을 익힌 자였다. 비록 자령이나 원요 등에는 못 미쳤으나 저계 선사들을 유혹하기에는 충분했다.
한립이 모두의 시선을 훑자 금의 장한이나 허운의 안색은 평이했으나 다른 사내들은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를 본 허운이 못마땅하다는 듯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분들은 기연도에 새로 오신 분들이라 이곳을 소개해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성성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그간 떠돌던 풍문이 모두 사실이지 뭡니까.”
“그렇다면 이곳에 남아계시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정말 가버리셨다면 저는 단골손님을 한 분 잃을 뻔 했습니다.”
여인이 멈추지 않고 미혼술을 펼치자 허운이 여인을 불러 완곡하게 불만을 표했다.
“명 부인, 모두 내가 요청해 모시고온 분들이오. 인식표나 어서 주시오.”
“호호, 알겠습니다. 이 두 분은 허 형의 수행에 못지않은 것이 기연도에서 거주하기에 문제가 없으시겠어요.”
명 부인이 살포시 웃더니 한립과 금의 장한을 보고는 미혼술을 거두었다. 그러자 여인은 정말 평범한 모습으로 변하였다.
“허 선사를 경매당으로 모시거라! 아마 경매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이 곧바로 손뼉을 치자 병풍 뒤에서 또 다른 젊은 범인 여자가 걸어 나와 청록색 패를 허운에게 주었다. 허운이 인식표를 받아 여인을 따라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문지방을 넘자 미세한 영기의 파동이 감지되었다. 마치 어떤 금제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눈앞이 환해지더니 놀랍게도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넓은 통로를 따라 걷다 보니 두 개의 큰 대청이 있었는데 왼쪽의 대청은 검은 돌기둥 몇 개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었는데 안은 굉장히 북적거렸다.
서른 명 정도의 선사들이 줄을 서 있었고 남녀를 불문하고 어린 여인을 데리고 있었다. 사내들은 끈적끈적한 눈길로 범인 여자들을 훑어보았으나 손을 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무언가 꺼려지는 듯했다.
긴 줄 끝에는 작은 방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하얀 빛이 반짝이는 곳에 옥패를 대면 들어갈 수 있었다.
오른쪽 대청은 남색 빛의 장막으로 가려져 있어 안의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곳은 명주헌(明珠軒)으로 해역에서 거둔 수확을 거래하는 곳입니다. 영석으로 교환할 수 있으나 물건에 자신이 있으면 감정을 거쳐 경매에 올릴 수도 있지요. 성 내에 비슷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 배후에 원영기 선사가 한 분씩 있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무법천지인 외성해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 없거든요.”
류 부인이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 많은 원영기 선사들이 있다니 설마 사대상맹에 관련된 것입니까?”
“이곳은 사대상맹이 끼어들 수 없는 곳입니다. 다른 요수도들은 사대상맹이 독점하고 있으나 기연도만은 유일하게 여러 세력의 연합으로 관리되는 곳이지요. 독자적으로 활동해서는 사대상맹에 대항할 위력이 안 되었겠지만 여러 세력이 힘을 합치자 성궁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다만 연합은 기연도에서만 유지됩니다.”
금의 장한도 제법 머리가 영리한 자라서 상대가 말하는 바를 금방 짚어냈다.
“허 형의 말을 듣자니 기연도가 특수한 이유가 있겠군요. 뜻밖에도 이렇게 많은 세력들이 모여 사대상맹에 대항하다니요.”
“허허, 맞습니다. 인근 해역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가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고계 요수가 종종 출몰하곤 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깊어지는 바다를 해연이라 부르지요.
팔급 이상의 요수가 출현하곤 하니 원영기 선사들이 사대상맹이 독점하게끔 놔두지 않았던 겁니다.
처음 이곳을 발견하고 여러 세력들과 사대상맹 사이에 큰 분란이 일어났고 결국에는 성궁이 끼어들어 조정하였는데 어떤 조건을 걸었는지는 모르나 최종적으로 지금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기연도의 진짜 정보는 내성해로 새어나가는 것을 엄히 금하는데 이를 어기면 여러 세력에게 추살 당하게 되지요.”
그의 이야기에 한립과 다른 이들은 적잖이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