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278화. 다시 외성해로
“이건!”
놀란 얼굴로 내용물을 확인한 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희색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대머리 선사의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이 보물들을 주겠다는 말인가?”
청삼 중년인이 미소를 머금고 바로 답했다.
“선배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아무리 진귀한 보물이라도 당장 수행이 모자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외성해로 나가 수련에 정진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고 노인이 흥분을 해서는 다른 선사와 상의도 없이 승낙을 해버렸다.
“하하하! 기왕 이리 성의를 보이는데 우리도 그리 야박한 이들이 아니다. 다른 여섯 명과 함께 전송진을 이용하도록 허락하마.”
건 선사 역시 마땅치는 않으나 보물이 탐이 나기는 마찬가지여서 묵인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다른 이들은 옥함 안의 물건이 궁금해졌다.
감히 결단기 선사에게 바치는 물건을 마음대로 탐색하는 우를 범하지는 못 한 것이다. 다만 금의 장한만이 옥함만 보고 무언가를 눈치 챈 얼굴이었다.
비록 확인할 수는 없으나 노인들과 중년인의 대화로 유추해 보건대 법보라는 글자가 그의 뇌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법보를 바쳤단 말인가? ’
보물을 받은 결단기 선사들은 곧바로 각자 품에서 하얀 옥패를 꺼내 전송진의 정해진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 둘이 주술을 외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청삼 중년인은 몰래 숨을 내쉬며 안도하고 있었다.
‘역시 전송진에 무슨 짓을 해놓았구나! 아무 것도 모르고 침입 했다가는 큰 일 날 뻔했어. 필요는 없지만 남주기는 아까운 법보 몇 개로 일이 쉬워졌다.’
이런 생각을 하고는 있는 이는 법력을 숨긴 채 다른 이의 모습으로 변장한 한립이었다.
옥함에는 각각 붉은 빛이 찬란한 비도 법보가 들어있었다. 지하 동굴에서 현골에게 죽은 호월의 법보를 써먹은 것이다.
별다른 기능이 없는 평범한 법보는 한립에게는 별 다른 쓸모가 없었지만 보통 결단기 선사들에게는 진귀한 보물이었다.
성궁의 세력은 강대하니 수집하는 법보도 많겠지만 그 만큼 결단기 선사도 넘쳐나 큰 공을 세우지 않고는 차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두 선사가 비도 법보에 기뻐했던 것이다.
그것을 제련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실전 전투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다만 방금 수척한 사내가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 것은 한립이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본 사내의 표정 변화가 마음에 걸려 밤에 몰래 거처에 침입한 한립이 그에게 미혼술을 걸어 알아낸 정보였다.
비록 상대를 완전히 통제할 만한 강력한 술법은 아니었으나 수척한 사내가 잠에 빠져 있었고 강대한 한립의 의식의 도움으로 그 자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운이 따라줬는지 그가 숨기고 있던 비밀은 성궁 선사들과 짜고 일부러 가격을 높여 다른 무리들을 쥐어짜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절한 위협에 요단의 유혹까지 겹쳐지자 수척한 사내가 거절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주술이 끝나가자 전송진은 하얀 빛을 발산하며 웅웅거리다 빛과 소리가 사려져 버렸다.
대머리 노인이 전송진에 걸어두었던 금제가 해제된 것을 확인하고는 거침없이 말했다.
“평소 한 명이 더 이곳을 지키는데 이틀간 외부 업무를 처리하러 간 것을 천운으로 알거라.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많은 영석을 지불한다 해도 불가능했을 터이니. 이제 모두 영석을 내놓아 보거라.”
모두가 자신의 저물대 하나씩을 노인에게 넘겼다. 한립은 그 외에도 두 개의 요단을 꺼내 대머리 노인의 시선을 끌었다.
하나씩 저물대를 확인한 대머리 노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니 건 선사가 나서서 한립 무리에게 전송부 한 장씩을 나눠주었다.
“전송보를 몸에 지니고 가면 된다.”
그가 전송진을 가리키니 다른 이들은 아직 조금 주저했으나 한립이 먼저 앞장을 섰다.
재간이 있으면 대담해 진다는 말대로 그의 담이 커서가 아니라 이미 의식을 이용해 전송진을 탐색해본 결과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전송진 앞 비석에 기연(寄淵)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언가 인상 깊은 이름인 것으로 보아 전송진에 연결된 섬에는 특수한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금의 장한도 한립이 먼저 가는 것을 보더니 그 뒤를 따랐다. 모두가 전송진에 오르자 건 선사가 수결을 맺으며 웅얼거렸다.
그가 손에 어린 하얀 빛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사사로이 너희를 외성해로 전송해 준 것을 떠들고 다니지는 않겠지?”
금의 장한이 영민하게 답했다.
“당연히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정을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어찌 그리 하겠습니까? 게다가 저희가 발설한다 해도 선배님들에게 큰 해를 미치지도 못할 것입니다.”
건 선사가 그런 금의 장한을 응시하며 서늘하게 말했다.
“아니 다행이로구나. 우리도 성궁에서 지위가 있으니 걸리면 상부의 질책을 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너희가 입을 함부로 놀리다 우리에게 걸리면 어찌 될지는 알고 있을 터. 게다가 듣기로 우리가 돌변해 기습할까 봐 모두 감응주(感應珠)를 지니고 있다는데 우리 같은 선사들이 겨우 영석 몇 개를 얻고자 스스로의 명성을 해치겠느냐?”
그의 시선이 무리의 한 명 한 명을 모두 훑어보며 위협했으나 뜻밖에도 한립은 포함되지 않았다. 금의 장한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지만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선배님께서 역시 이치에 밝으십니다. 저희가 항상 조심하는 마음으로 악의 없이 한 행동인 것을 아실 것 입니다.”
“허! 쓸데없는 소리를 길게 들어줄 시간 없다. 자중하는 것이나 잊지 말거라.”
건 선사가 손가락을 튕겨 하얀 빛을 전송진으로 쏘아 보냈다. 동시에 전송진의 곳곳에 놓인 영석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일곱 선사들이 그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종적을 감추자마자 대머리 선사가 돌변해 고상한 선사에게 따져 물었다.
“가짜 전송부를 주자고 이야기를 끝내 놓고 어찌 진짜를 나눠준 게요? 이것은 처음 이야기한 것과 너무 다르지 않소!”
건 선사가 냉소하더니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어찌 안 그랬겠소! 우리에게 법보를 넘긴 녀석이 사실은 원영기 노괴였는데 가짜를 들이밀었다 같이 죽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이오?”
대머리 선사가 어리둥절해서는 재빨리 물었다.
“원영기 선사라니요. 건 형 지금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그 자는 분명 축기 후기의 수행을 보였습니다.”
“고 형도 제가 염노(厭瑙)라는 영수를 기른다는 것을 알 것이오. 이 녀석이 다른 능력은 없어도 선사들의 의식에는 기민하게 반응하지요.”
건 선사가 어린 고양이와 무척 닮은 영수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두 귀를 토끼처럼 쫑긋 세우고는 청록색 눈동자로 사방을 살피는 염노의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처음에는 상대가 무척 비밀스럽게 법력을 숨겨 이상한 점을 눈치 채지 못하다가 전송진의 금제가 풀린 후 상대가 의식을 퍼트려 전송진을 확인한 순간 알게 된 사실입니다.
염노가 결단 중기 선사의 의식까지는 그 수준을 정확히 파악해 내고 결단 후기까지도 대략 어느 정도인지 알아차리지요. 그런데 이 녀석이 소매 속에서 덜덜 떨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반응은 성궁의 장로들을 찾아 뵐 때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건 선사가 말을 하며 염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도 아찔하다는 표정이었다. 대머리 선사 역시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정말 원영기 선사였군요.”
“아니라 해도 결단 후기의 수행은 되겠지요. 우리 두 사람을 어찌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대머리 노인도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몸을 떨었다.
“건 형의 영리함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가짜 부적을 들이 밀었다가는 사단이 났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법보를 두 개나 내놓고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정말 원영기 노괴 중 하나라면 이 일로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요?”
“문제가 될 게 무어겠습니까. 아마 원영기에 이른 산수로 성궁와 역성맹의 다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외성해로 향한 듯한데요. 다만 우리가 원영기 선사를 외성해로 보내주었다는 소식은 절대 상부에 전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대머리 노인에게 설명을 해주던 건 선사가 음산한 눈빛으로 옆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수척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수척한 사내는 몸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가 서둘러 물러서며 서둘러 입을 놀렸다.
“선배님들 저는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 하였습니다. 만일 함부로 발설하고 다닌다면 저는…….”
수척한 사내가 당황해 늘어놓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란 빛이 날아들어 그를 토막내버렸다.
노란 빛을 거두며 대머리 노인이 중얼거렸다.
“이런 일은 한 명이라도 알게 할 수 없지요.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자라 살려줄까 했더니 운도 없습니다.”
이어 그의 손에서 불길이 던져져 시체는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건 선사 역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전송진의 다른 쪽에서 한립과 다른 여섯 선사가 하얀 빛을 벗어나 오래된 석실에 도착했다.
한립이 주변을 살피니 석실 구석에 마르고 볼품없는 성궁 선사가 온 얼굴이 흉터로 뒤덮인 회색 장포의 선사를 상대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일곱 선사들이 전송진에서 나타나자 성궁 선사가 눈길을 주기는 했으나 곧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상부에서 내려온 명으로 전송진은 빠져 나올 수만 있고 들어갈 수는 없다고요. 이미 전송부도 사람을 보내 회수해 가서 나도 돌아가지 못 할 판인데 왜 이러시오?”
“아니, 며칠 전에도 누군가 이용하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 갑자기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흥! 그것 역시 설명을 할 만큼 했으니 믿든지 말든지 뜻대로 하시오.”
성궁 노인이 눈을 부릅뜨더니 그를 노려보았고 말을 마치자마자 두 눈을 감아버렸다.
“당신 정말……!”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흉터 많은 선사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에게 무슨 짓을 할 담력은 없었기 때문에 주위를 종종거리고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는 전송진에서 걸어 나오는 한립 등을 보고는 반가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 눈에 보아도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금의 장한을 향해 예의 바르게 물었다.
“방금 천성성에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금의 장한은 흉터 사내가 자신과 동급인 축기 후기 수준인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답을 주었다.
“그러합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흉터 사내가 한껏 기대를 담아 물어왔다.
“저는 허운이라 합니다. 외성해에서 몇 해를 보냈습니다. 지금 내성해에서 정말 역성도라는 세력이 준동해 성궁과 일전을 시작한 것이 사실입니까?”
상대의 표정만 보아도 어떤 답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그를 실망시킬 수 밖에 없었다. 금의 장한이 숨김없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도와 마도가 연합해 역성맹을 만들었고 곧 큰 전쟁이 벌어질 태세입니다. 저희도 그것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외성해에 온 것이니 허 선사께서도 당분간은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흉터 사내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상심한 기색을 드러냈다.
“정말입니까! 겨우 충분한 재료를 모아 단약을 만들어 복용하려 했는데 시기를 놓치고 말겠습니다.”
모두가 달리 해줄 말이 없어 침묵했다.
이들은 온갖 궁리를 다해 겨우 외성해에 도착했는데 허 선사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니 우스운 상황이었다.
잠시 후 슬쩍 눈치를 보던 금의 장한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꺼냈다.
“저는 역경이라 하고 다른 분들은 저의 지기들입니다. 방금 여러 해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셨다 하셨으니 실례가 안 된다면 기연도(寄淵島)에 대해 소개해 주실 수 있을지요. 선사가 헛고생을 하게 할 수는 없으니 약간의 영석으로 보답을 하겠습니다.”
흉터 사내는 아직 실망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호의적으로 답했다.
“보답은 되었고 방금 제 질문에 답을 해주셨으니 당연히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시지요.”
동시에 금의 장한을 포함한 무리가 희색을 드러냈다.
이렇게 낯선 곳에 떨어져 현지인에게 내부의 상황을 미리 듣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한립도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이들의 뒤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