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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76화 (3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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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6화. 난관 속의 희망

    “릉 선사와 천성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미 역성맹의 동급 선사를 죽였는데 이것으로 대체가 가능합니까?”

    담담한 한립의 물음에 노인이 흥미가 동한 듯 했다.

    “벌써 한 명을 죽였다는 겐가?”

    “그렇습니다.”

    “안타깝지만 신청을 한 후 대전에서 적을 처리했을 때만 해당이 되네. 이전에 얼마나 많은 선사를 죽여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지.”

    “선사의 생각에는 그 대전이 언제 시작될 것이라 보십니까?”

    “아마 곧 시작되겠지. 예상대로라면 며칠 내로 대전이 발발할 것이네. 이미 역성맹이 내성해의 섬들을 함락하기 시작했으니 천성성을 공격할 날이 머지않았을 게야. 그들도 속전속결을 원할 테니 말이네.”

    그 말에 한립은 더는 고민하지 않고 냉랭히 말했다.

    “그럼 신청하겠습니다. 동급 선사를 죽이고 전송진을 이용해 난성해로 가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럼 이 반지를 잘 지니고 다니게 성궁의 임시 인원임을 증명하는 것이니 대전이 시작되면 반지를 보이고 참전하면 될 게야.”

    노인이 품에서 노란 빛이 도는 반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한립이 반지를 받고는 주저 없이 손가락에 끼웠다. 노인이 그것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그럼 성으로 들게. 매일 낮 반나절 동안만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고 대전이 시작되면 반지를 통해 알릴 테니 거처에서 연락을 기다리면 될 게야.”

    말을 마친 노인이 다시 천천히 눈을 감더니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립이 몸을 돌려 성으로 향했다.

    성문을 들어가자 천성성 내부의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가끔씩 날아다니는 선사들이 보이긴 했으나 범인들은 모두 거처에 숨어있었다.

    그 적막한 모습에 한립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분명 성내의 시장도 십중팔구 벌써 문을 닫거나 규모가 축소되었을 것이니 미리 남명도에 들려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낮게 웃음지은 그가 바로 허공을 갈라 자신의 거처로 날아갔다. 성산 아래의 시장에는 점포 대부분이 문을 닫았고 그곳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고개를 저은 그가 바로 성산의 39층으로 날아갔다.

    성산 구역에 진입하자 예민한 감각이 삼엄한 경비가 있음을 경고했다. 성 밖에서 보다 훨씬 많은 의식들이 그를 살폈으나 노란 반지를 확인하고는 관심을 거두었다.

    한립은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며 자신의 동굴 앞에 도착했다. 동굴 밖의 금제는 그가 떠나기 전과 똑같이 유지되어 있었다.

    허공에 떠서 금제를 내려다보던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출타를 하였다가 수많은 위기에서 구사일생해서 돌아왔는데 오랜 세월 정이든 거처를 버리고 달아나야 했던 것이다.

    영패로 금제를 해제한 후 그는 묵묵히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역시 이전과 그대로였다.

    한립은 가장 중요한 서금충이 있는 밀실로 갔다. 딱정벌레들이 멀쩡히 지내고 있는 것을 보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는 바로 새로운 영수대에 모든 서금충들을 들여보내고 약초밭으로 가 모든 영초를 회수했다.

    계획한 일을 마치자 침실로 돌아간 한립이 침상에 누워 이후의 일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역성맹의 동급 선사 한 명을 죽여야 외성해로 통하는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다는 조건은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대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성궁 선사들이 그가 허천정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노괴들의 복귀를 막을 수야 없지 않은가.

    만일 이 소식이 알려지면 성궁에게든 역성맹에게든 당할 일만 남은 것이다.

    또 우려되는 것은 그가 약속한 조건을 이행했음에도 핑계를 대며 전송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성궁과 같은 거대한 세력이 말을 바꾼다 해도 그가 어쩔 것인가?

    비록 성문 밖에서 고분고분 성궁의 조건을 수락하기는 했으나 가만히 앉아 부름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일단 전송진 주변의 경계 상황을 파악하고 틈이 있다면 기회를 보아 달아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어차피 성궁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이미 수많은 원영기 노괴들과 척을 진 그에게 그리 두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한립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거처로 돌아오니 피곤이 몰려왔던 것이다.

    * * *

    다음날 아침 맑은 정신으로 한립이 깨어났다.

    날이 밝자 천천히 동굴 거처를 나선 그가 상공으로 날아올라 주위를 살폈다. 비록 평소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어제 성 내로 진입할 때 보다는 수사들이 훨씬 많았다.

    보아하니 지금이 바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때인 것 같았다.

    주저 없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그는 아무도 그를 주시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고 50층으로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송진이 있는 성공전 상공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머물지 않고 지나가는 척 의식을 이용해 주변을 훑어보았다.

    건물 바깥까지는 순조롭게 탐색이 가능했지만 일단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려 하니 의식을 차단하는 노란 색과 푸른 색이 섞인 금제가 감지되었다.

    다행이 그가 기민하게 반응해 직접 금제를 건드리지 않고 의식을 거두어 들였지만 말이다.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강력한 의식으로 뚫을 수 없는 금제는 아니었으나 그렇게 되면 전각 내의 선사들이 눈치를 챌 것이었다.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금제 때문에 전각을 지키는 선사들의 수량이나 수행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원영기 선사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을 가능성은 적었고 기껏해야 결단 중기 혹은 후기 선사가 책임을 맡고 있었다.

    어쨌든 더욱 중요한 곳이 많았기에 성궁의 고위층이 달아나는 자들을 막기 위해 원영기 선사를 성공전에 보냈을 리 없었다.

    충분히 멀리까지 날아간 한립이 방향을 틀어 처음 지나온 방향과 미미하게 다른 경로로 돌아왔다.

    이번에 성공전을 지나쳐 가면서 다시 한 번 탐색을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그가 생각을 이행하기도 전에 굵은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장 선사 어떤가?  전송진을 지킨다는 이가 일인당 삼천에는 정말 안 된다던가?  그 이상은 감당할 수가 없단 말이네.”

    그 소리를 들은 한립은 일순 흥미가 일었다. 그의 시선이 멀리서 저공비행을 하고 있는 두 명의 선사에게 닿았다.

    한 선사는 까만 얼굴에 회색 의복을 걸친 중년인이었고 다른 선사는 몹시 수척해 보이는 사내였는데 모두 축기 중기의 수준이었다.

    두 선사는 아주 조심스럽게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한립의 강대한 의식 범위에 걸려들었다.

    “조심 좀 합시다.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마른 사내가 긴장된 눈빛으로 도처를 훑어보니 한립이 신속히 은닉술을 펼쳐 모습과 기운을 감추었다. 당연히 축기 중기의 선사에게 발각될 리가 없었다.

    동시에 한립은 멀리 퍼져있던 의식을 모두 응집해 두 사람에게 집중했다. 그들의 전음을 엿듣기 위해서였다.

    한립이 두 선사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행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급의 선사들의 전음을 엿 들으려면 특수한 최상급 비술을 익혀야 했다. 수척한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상대가 저와 먼 친척 관계라도 마음대로 외성해로 선사들을 빼돌리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합니다. 일인당 영석 오천 개를 지불하지 않고는 절대 안 된다 하더군요. 그나마 모두 쓸데없는 축기기 선사이니 보내주는 것이지 결단기 선사만 되었어도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요.”

    “그래도 오천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우리 같은 축기기 선사들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영석을 모은단 말인가?”

    까만 중년인의 하소연에 마른 사내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계속 내성해에 남아 있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우리 같은 산수들이 이런 일에 휘말렸다가는 목숨을 잃기 십상이지요. 게다가 성궁과 역성맹의 세력이 엇비슷해 수 년 혹은 수십 년간 전쟁이 지속된다면 수련은 언제 하겠습니까?  영석이야 모두 아껴둔 진귀한 재료나 법기 같은 것이 있을 테니 그것들을 팔아 모아보면 되지요. 목숨을 부지해야 영석도 소용이 있는 겁니다.”

    “아무래도 조금 그렇네. 외성해로 한번 나가자고 모두가 가산을 탕진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됐습니다. 그럼 일단 다른 이들의 결정을 들어보지요.”

    수척한 사내도 조금 골치가 아픈 듯 했다.

    말을 마친 이들이 속도를 높여 날아갔다.

    한립은 조급히 따라붙지 않고 의식 한 줄기를 수척한 사내의 몸에 감아놓았다. 이후 시선으로 두 선사의 종적을 쫓다가 멀리서 서서히 뒤를 쫓은 것이다.

    그들의 속도는 한립에게 너무 느렸다. 장장 몇 시진을 날아간 끝에야 둘은 성산의 4층에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집으로 들어갔다.

    ……

    잠시 후, 한립이 그들의 있는 지붕 위 허공에 나타났다.

    이곳은 그럭저럭 한적해서 멀리 비슷한 양식의 건물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비취색 대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꽤나 풍경이 괜찮았다.

    주변을 살피던 한립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건물에는 소형 진법인 류수진(流水陣)이 설치되어 있어 누군가의 침입을 막아주지는 못해도 침입을 감지하고 경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잠입했다.

    * * *

    소리 없이 사라진 한립의 모습이 정원에서 나타났다.

    전신의 법력 파동을 숨겼으니 축기기 선사는 물론이고 결단기 선사가 와도 그를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이것도 혹시 결단기 선사가 무리 중에 있을까 한립이 신중을 기한 것이었다. 한립은 가만히 서서 건물 전체를 의식의 범위에 두었다.

    그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지며 왼쪽의 별채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방에는 아무도 없었고 별로 크지 않은 별채에 일곱 명의 선사들이 모여 있었다. 방금 본 까만 얼굴 중년인과 수척한 사내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곱 명 중 두 선사는 여인으로, 한 명은 꽤나 고운 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평범한 외모의 젊은 처자였다. 그 중 수행이 가장 높은 이가 부리부리한 눈에 매부리코를 가진 비단옷의 장한이었다.

    그는 코를 빼고는 용모가 단정한 편인데다 체구도 건장했고 이미 축기 후기에 이르러 거의 최정상에 올라있었다. 곧 결단을 시도해도 될 법한 수준이었다.

    다른 이들은 대부분 외성해로 나가 사냥을 하려면 최소한 필요한 수준이 축기 초기나 중기 수준이었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두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립은 차분하게 그들을 기다렸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얻은 후에 이후의 행보를 결정할 예정이었다. 일다경이 지나자 중년 부인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역 형, 황 선사가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상대가 영석 오천 개가 아니면 외성해로 보내주지 않는다 한다고요. 성궁의 조건을 이행하고 정정당당하게 전송진을 이용할 것인지 영석을 지불하고 몰래 달아날 것인지 이제 결정을 내려야지요. 일단 대전이 발발하면 고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됩니다.”

    젊은 여인 옆에 있던 하얀 얼굴의 선사가 곱지 않은 말투로 따졌다.

    “류 부인의 의견은 영석을 지불하자는 의견인 듯 합니다. 선사야 재물이 풍족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만 우리 부부는 전 재산을 털어도 부족합니다. 설마 류 부인 홀로 전송진을 이용하겠다는 것입니까?”

    중년 여인도 불쾌한지 불만스레 반박했다.

    “제가 언제 혼자 가겠다 했어요?  우리 중에 경험도 풍부하고 수행도 가장 높은 역 형의 말씀을 들어보자 했지요.”

    비단옷의 장한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두 선사 모두 그만하시지요. 외성해가 어떤 곳인데 축기기인 류 선사가 홀로 가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함께 움직여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또 운이 좋으면 영수를 잡아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영약을 제련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외성해로 가기는 해야 하겠죠.

    하지만 성궁의 요구대로 역성맹의 동급 선사를 죽이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성궁이 약속을 지킬지도 알 수 없고요.”

    튼실한 청년이 나섰다.

    “설마요. 성궁이 약속을 어긴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의심이 지나친 것 아닐까요?”

    청년은 분명 나이가 어렸는데 애늙은이 같은 말투를 사용했다. 그의 물음에 비단옷 장한이 낮게 코웃음 쳤다.

    “비록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다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성궁도 위기에 닥치면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어요. 권력을 잡은 이들이 약속을 뒤집고 모른 척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요.”

    이제 방안이 다시 고요해지며 모두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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