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75화 (32/2,000)

# 275

275화. 릉옥령

릉옥령이라 칭한 녀석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가득했으나 한립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저는 한립입니다. 사소한 일이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상대가 강압적으로 나오지만 않았어도 이리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릉옥령이 빙그레 웃으며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렇다 해도 감사해 마땅한 일이지요.”

그 모습에 한립은 오히려 오한이 들었다.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예쁘다고 무작정 좋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릉옥령이 웃음을 거두고 바로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리 급하게 가시는 것을 보니 혹시 천성성으로 가시는지요?  이미 그곳의 경계가 삼엄해 진입하기 어려우니 괜찮으시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생명을 구해주신 은혜를 보답하고자 합니다.”

그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하지만 역성맹 선사 둘을 죽인 것은 이런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야 역성맹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상대가 먼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제안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립이 부드러운 어조로 회답했다.

“거처가 천성성에 있어 서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만일 다른 방법이 없다면 아무래도 릉 선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듯 합니다.”

“선사께서 주저 없이 역성맹 인물들을 죽였으니 성 내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을 증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성궁에서는 성사를 환영할 것입니다. 다만 저를 쫓는 이들이 더 있으니 아무래도 어서 이곳을 뜨시지요.”

한립도 반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푸른 색과 하얀 색 빛줄기로 변해 천성성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립은 날아가면서도 호기심에 상대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넉넉한 하얀 의복이 온 몸을 가리고 있어 사내나 여인으로 특정 지을 수는 없었으나 찬찬히 보니 목젖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상대의 성별을 알 수는 없었다. 듣기로 괴이한 일부 공법은 음양의 조화를 뒤집어 사내나 여인의 신체의 특성을 왜곡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상대방이 그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한립은 순간 어색하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릉옥령이 날아가며 슬쩍 한립의 고보에 대해 언급했다.

“고보를 두 개나 지니시다니 하늘의 총애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그 고리 고보는 어떤 내력을 지녔기에 그리 신통한 능력을 지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인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릉옥령이 한립이 별로 대답하고 싶어하지 않자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하하, 어쨌든 동급의 선사 두 명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대단하십니다. 한 선사께서는 성궁에 들어올 마음은 없으신지요?  제가 추천해 드릴 수 있습니다.”

빛 속에서 그 소리를 들은 한립은 미미하게 얼굴을 굳혔다.

릉옥령이란 자가 만만치가 않았다. 아직 성에는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벌써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성궁에 들어오라니 전쟁에서 화살받이가 되라는 소리가 아닌가! 한립은 스스로를 진흙탕에 빠트릴 계획이 전혀 없었다.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할 말을 정리한 그가 답했다.

“성궁의 위명이야 들어온 지 오래지만 묘음문에 큰 은혜를 입어 객원 장로를 지내고 있으니 한동안은 힘들겠습니다. 정말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도리를 지키시는 분이라니 더욱 탄복하였습니다. 성궁은 언제든 선사 같은 분을 환영한다는 것만 기억해 주세요.”

하얀 빛 속의 릉옥령은 완곡히 제안을 거절하는 한립에게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리어 담담히 웃으며 난성해에 떠도는 이야기들과 성궁과 역성맹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들을 이야기 했다.

릉옥령의 눈치 빠른 행동에 한립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 * *

하루가 지나고 두 사람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천성성의 모습에 기뻐했다.

그때 그들이 섬에 접근하기도 전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4명의 남자 수사와 1명의 여자 수사가 등장했다.

무리를 이끄는 누런 얼굴의 중년인은 결단 초기였고 나머지는 축기기 선사들이었다. 축기기 남녀가 릉옥령을 알아보았는지 바로 공손히 예를 올렸다.

“릉 호법님을 뵙습니다.”

이어서 누런 얼굴의 선사가 놀라 물었다.

“릉 사제 괜찮은 것이냐! 남명도가 기습 받았다는 소식에 안 그래도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분께서는 누구시지?”

의심 어린 시선이 한립을 훑자 릉옥령이 담담히 답했다.

“오는 길에 역성맹 선사 둘의 추격을 받았는데 한 선사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거처가 천성성 내에 있다 하셔서 함께 돌아온 것인데 들어가는데 문제가 없겠지요?”

서둘러 날아오느라 부상을 당한 몸으로 무리한 탓에 이미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그는 누가 보아도 마음이 쓰일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릉 사제의 은인인데 당연하지. 릉 사제, 부상을 당한 게야?”

누런 얼굴의 선사가 걱정스런 말투로 릉 옥령을 대하자 한립의 눈이 빛났다.

“괜찮습니다. 법보에 공격당하기는 했지만 천향색(天香索)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어요.”

릉옥령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미한 붉은 빛이 어른거렸지만 표정은 냉담했다. 누런 얼굴의 선사가 그 말에 더욱 근심이 깊어져 잠시 주저하다 병을 하나 꺼내었다.

“천령단이 한 알 있으니 릉 사제가 가져가 복용하도록 해. 원기가 상하는 것을 막아 줄게야.”

“그럼 사형께서 주신 것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는 먼저 내궁으로 가 남명도 일을 보고해야 하니 한 선사님은 사형에게 맡기겠습니다. 제 은인이시니 잘 좀 모셔주세요.”

릉옥령은 고은 손으로 병을 받아 들며 미소를 지었는데 고혹적인 분위기가 풍겨 완전한 여인처럼 느껴졌다. 누런 얼굴의 선사가 릉옥령의 말과 표정에 홀려 가슴을 두드리며 다짐했다.

“걱정 말거라! 오늘은 왕 장로님께서 당직하시니 사제를 곤란하게 하시지 않을 게야. 한 선사의 일은 사형만 믿으면 된다.”

한립은 조금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설마 릉옥령은 여인인 것인가?  누런 얼굴의 선사는 분명 릉옥령에게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누런 얼굴로 릉옥령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던 사내가 결국에는 정신을 차리고 한립을 돌아보았다.

“비록 릉 사제의 은인이시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황이 이런 만큼 이해해 주시지요.”

침착한 얼굴의 한립이 주저 없이 답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일단 신분을 밝혀 주시지요.”

그는 차분한 동작으로 저물대를 뒤져 두 개의 영패를 꺼내 상대에게 넘겨주었다.

“저는 묘음문 장로로 이것이 그것을 증명하는 요패입니다. 이것은 천성성 내 동굴 거처의 금제를 푸는 영패이니 선사께서 알아보실 것이라 믿습니다.”

거침없이 두 영패를 받아 든 상대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을 내렸다.

“묘음문이라?  묘음문에 이런 분이 장로로 있는지 알아 보거라.”

뒤에 서있던 준수한 외모의 여선사가 바로 알겠다고 답했다. 그녀가 저물대를 한참 뒤적거리더니 결국에는 서책 하나를 꺼내 의식을 불어 넣었다. 잠시 뒤 한립의 용모를 살핀 그녀가 공손히 답했다.

“조 호법님, 묘음문에 한 장로라는 분이 계시고 초상화로 보아 동일 인물임이 확실합니다.”

“그럼 두 영패가 모두 진짜란 이야기로구나.”

조 호법이 영패를 한립에게 돌려주고는 분부를 내렸다.

“내 선사를 모시고 성에 들어가 수속을 해야 하니 너희는 계속 부근을 순찰하거라.”

“예!”

누런 얼굴의 선사가 별말 없이 한립을 향해 손짓을 하고는 먼저 성을 향해 날아갔다.

한립 역시 푸른빛으로 변해 그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은 천성성의 높은 벽 인근에 도착한 이들은 성문 중 하나로 다가갔다.

비록 모습을 드러내고 주변을 순찰을 하는 이는 없었지만 적어도 네다섯 명이 은신한 채 경비를 서고 있었다. 축기기 선사가 대부분이기는 했으나 결단기 선사의 존재도 분명히 느껴졌다.

남명도가 기습당하고 경비가 강화된 것이다. 만일 누군가 안내해주지 않았다면 천성성 내부로 진입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도착한 성문 앞에 십여 명의 백의 선사들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성벽과 성문이 하얀 빛으로 번뜩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금제가 걸려 있는 것이다.

누런 얼굴의 사내가 땅에 내려서더니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누런 사내가 노인을 향해 포권을 하며 공손히 말했다.

“우 호법님, 이분은 묘음문의 한 장로님으로 이미 신분을 증명할 증표와 영패를 확인 하였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성내로 진입하는 수속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돌아가 순찰을 계속해야 해서요.”

한립도 노인을 보고는 경계심을 높였다. 결단 중기의 선사였던 것이다.

“묘음문?”

노인이 천천히 두 눈을 뜨는 것이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 같았다.

“예.”

잠시 주저하던 누런 사내가 마지못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는 길에 릉 사제를 도와주었다 합니다.”

“그것 참 드문 일이구만. 알았으니 그만 가서 일보게.”

노인이 잠시 눈을 빛냈으나 곧 무기력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누런 얼굴의 선사가 노인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날아가 버렸다. 한립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노인이 한립을 보며 느긋하게 말을 걸었다.

“묘음문 자령이라면 몇 번 본 일이 있네. 확실히 영민한 아이지. 이야기 속에 언뜻 언뜻 선사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어. 그런데 이렇게 젊은 모습을 보니 릉 선사처럼 외모를 유지하는 공법을 익혔나 보고만! 그런 공법들은 보통 음기가 강해 사내가 수련하면 좋지 못하다 들었는데 말이야.”

한립이 차분히 답했다.

“그리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릉 선사는 사내였군요. 저는 용모를 유지하는 비술을 익힌 것이 아니라 일찍이 정안단을 복용했을 뿐입니다.”

노인이 웃으며 유유히 말했다.

“릉 선사가 사내인지 여인인지는 성궁에서도 확실히 아는 이가 거의 없으니 이 노부도 알고 있을 턱이 없지. 다만 그가 관련된 공법을 익혔다는 것은 확실하네. 허허, 한 선사는 운도 좋네 그려. 그 귀한 정안단을 손에 넣을 기회도 있었고 말이야.”

한립이 별다른 말이 없자 노인이 말을 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되었고 이미 신분을 확인했다니 노부가 고생할 이유가 없겠지. 다만 평상시와 천성성의 규정이 달라졌으니 잘 듣게.”

한립은 노인의 말에 집중했다.

“지금 선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어. 첫 번째는 임시로 성궁에 합류해 적에 대항하는 것으로 그럼 천성성 내의 활동에 제약이 없지. 임무를 마칠 때마다 성궁에서 합당한 보수를 지급할 것이고 말이야.

두 번째는 대전에 끼지 않으면서 얌전히 성 안에서 대기하는 것도 가능하네. 우리 성궁은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야. 다만 정해진 일정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처를 벗어날 수 없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성 내의 성궁 집법들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목숨을 거둘 것이네. 이제 한 선사가 원하는 바를 내게 알려주면 되네?”

한립은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노인도 그를 재촉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 기다렸다.

“성에 들어간 이후 전송진을 이용해 외성해로 갈 수는 있습니까?”

갑작스런 물음이었음에도 미리 예상이나 한 듯 바로 답이 돌아왔다.

“평상시에는 일정 영석을 지불하면 가능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외성해로 나가고자 하는 선사는 성궁을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줘야 하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간단하네! 곧 시작될 대전에서 성궁을 위해 역성맹의 동급 선사 한 명을 죽이기만 하면 되네.”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이었으나 은은히 조소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조건을 들은 한립도 쓴웃음이 날 뿐이었다.

외성해로 달아나고 싶은 선사들은 역성맹의 피를 보지 않고는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