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274화. 고보의 위력
녹색 장포의 노인과 멀어진 그는 순식간에 항구 상공에 도착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역성맹 선사들을 둘러본 그가 속도를 높여 이곳을 떠나려 했다. 그 순간 강력한 의식이 거리낌 없이 그를 훑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한립은 차분한 얼굴로 공중에 떠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결단기 선사를 이리 쉽게 보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마 무리를 이끄는 원영기 선사가 모습이 변하는 환술이나 기타 공법을 써서 섬을 몰래 빠져 나가려는 성궁 선사를 거르는 중일 것이다.
한립은 태연한 얼굴로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거짓 신분으로 그들을 속일 생각이 없었다.
모습을 바꾸는 수작은 전설 속의 강력한 비술 두, 세 가지와 진귀한 보물을 이용하지 않는 한 강력한 의식을 보유한 선사를 속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극음 등에게 추적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묘음문 장로의 신분을 노출했던 것이다. 어차피 노괴들이 쫓아왔을 때는 외성해로 달아나 있을 예정이었다.
그때 들킨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생각으로 원영기 노괴의 검문을 받고 있자니 잠시 후 소리 소문 없이 의식이 거두어 들여졌다. 한립은 마음 놓고 다시 항구 밖으로 날아올랐다.
항구를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전속력을 내었다.
핏빛 피풍의 고보를 사용할 수는 없어도 일부러 천천히 갈 생각은 없었다.
반나절 후, 서둘러 날아가며 어떻게 천성성에 잠입할까 고민하고 있던 그가 미간을 좁히며 멈춰 섰다. 의심스런 눈빛으로 근처의 해수면을 둘러보기 시작한 것이다.
돌연 안색이 어두워진 한립이 먼 곳을 바라보며 푸른빛 속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저 멀리서 붉은 빛과 남색 빛이 쏜살 같이 날아왔다. 빛이 사라지자 두 명의 중년 수사가 드러났다.
‘은색 의복에 금색 띠.’
역성맹의 정도 선사들로 결단 초기의 수행을 지닌 이들이었다.
한 명은 하얀 얼굴에 수염이 없어 서생 같은 모습이었고 다른 한 명은 짙은 피부색에 체구가 좋은 거한이었다. 두 선사는 모습을 드러내고 서늘한 시선으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언제라도 손을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립은 잠시 표정을 정리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신지요? 갈 길이 바쁘니 하실 말씀이 없다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거한이 무표정하게 명령조의 말을 내뱉었다.
“안 될 말이오. 우리를 따라 가주어야겠소.”
“제가 두 분께 죄를 범한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역성맹 선사들은 아무나 잡아들인단 말입니까?”
이번에는 서생 얼굴의 중년인이 나섰다.
“화를 거두시지요. 저희는 명을 받아 성궁의 잔당을 쫓고 있는 중인데 부상을 입은 자 하나가 괴이한 비행술을 펼치며 이쪽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선사께서 우연이 이곳에 계시고 성궁에는 얼굴을 바꾸는 비술이 전해지니 확인하고자 함입니다.”
예의에 어긋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를 잡아가겠다는 의지는 분명했다.
서생 얼굴을 한 역성맹 선사의 말에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고민을 하는 듯한 모습에 두 중년인이 시선을 교환하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때 한립이 돌연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답했다.
“그럽시다. 어차피 그리 바쁜 일도 아니었으니 두 분을 따라 한번 다녀오지요.”
서생과 거한이 동시에 긴장을 풀며 득의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서생 얼굴의 중년인이 막 입을 떼려는 찰나 한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펼쳐지며 여섯 개의 푸른빛이 소리 없이 거한을 향해 분출되었고 왼손바닥에서 각각 다섯 가지 색깔을 지닌 고리가 떠올라 진동하기 시작했다.
“감히!”
노인의 반응은 극히 민첩해서 한립이 움직이자마자 입에서 수 촌 길이의 네모난 법보를 분출했다. 평평한 법보는 칠흑같이 새까만 벼루 모양의 기이한 물건이었다.
거한 역시 빠른 움직임으로 손에서 백옥으로 만든 거대한 인장을 뿜어내니 보물이 몸집을 키우며 여섯 개의 푸른빛을 맞이했다.
그러던 차에 한립의 수중에 청동 고리를 본 서생 중년인이 놀라 소리쳤다.
“조심하시죠! 저 고리는 고보입니다.”
날아오던 여섯 개의 빛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모호해 지더니 열두 개의 검으로 변했다. 그 중 여섯 개는 순식간에 합쳐져 거대한 푸른 검이 되어 하얀 인장을 베어 들어갔고 다른 여섯 개는 방향을 틀어 질주했다.
거한이 대경실색해 생각할 틈도 없이 법결을 외웠고 남색 빛이 퍼지며 몇 장의 부적이 날아올라 몸을 키웠다. 남색이 찬란한 부적은 하나로 합쳐져 보호막을 이루었고 거한의 주변을 철저히 감싸주었다.
그는 보호막을 이용해 한립의 청죽봉운검을 막을 생각이었다. 옆에 있던 서생 또한 수수방관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손짓에 따라 머리 위에 떠있던 벼루 법보가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가 벼루 위로 수 장 정도 분출되었고 먹 냄새가 진동을 했다.
서생이 주저 없이 법결을 맺자 검은 안개가 응결해 눈 깜짝할 사이 수십 마리의 검은 새들로 변하였다.
키오악.
새들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한립은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평이한 얼굴이었고 손바닥 위의 고리만이 번뜩이며 종적을 감추었다.
다시 손바닥을 뒤집자 이번엔 오래된 바구니가 나타났다.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안중에도 두지 않자 서생은 열이 받으면서도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그의 미환연(迷幻硯) 법보는 고대의 제련 수단을 이용해 엄청난 노력 끝에 완성한 물건이었다.
법보 제련을 위해 반평생 모은 재물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미환연 법보를 지닌 이후 동급 선사 중에서는 적수를 찾아 볼 수 없었고 심지어 결단 중기 선사와도 대등하게 겨룰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수행이 너무 높은 수도자가 아니고서는 일단 검은 운무에 빠져 들면 환상 속에 갇혀 자력으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괴이한 새들이 화살처럼 한립을 향해 쏘아져 가는 것을 본 그가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폭발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때, 귓가에 미미한 울림이 들리더니 목과 팔 다리에 다섯 개의 청동 고리가 나타났다. 순간 그는 온 몸의 조여졌고 법력이 흩어져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서생은 허둥지둥 거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사라진 고리 고보를 그렇게 경계했건만 결국 그것에 잡히고 말았다.
서생은 거의 혼비백산해서 어떻게 이 난관을 빠져 나갈지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다른 한 쪽에서 거대한 울림이 들려왔다. 푸른빛과 하얀 기운이 얽혀있었고 푸른 거검과 거대 인장이 서로 충돌한 것이다.
찬란한 빛을 내는 하얀 기운은 가볍게 푸른빛을 제압했고 거검은 아주 단시간을 버티고는 쪼개져 버렸다.
이때 나머지 여섯 개 빛이 괴이한 부적 보호막에 당도했다.
펑. 펑.
연달아 들리는 충돌음에도 부적 보호막은 푸른빛을 막아내며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외의 상황이었다.
보아하니 벽사신뢰를 일으키지 않은 청죽봉운검은 제련한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별 위력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상황을 더 파악하기 전에 검은 새들이 코앞까지 날아들었다.
비록 서생이 법력을 주입해주지 못하고 있으나 그의 의식에 감응한 벼루 법보가 여전히 새를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한립의 바구니가 크기를 키우더니 하얀 빛을 뿜어 새들을 잡아먹었다. 그 모습에 서생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말도 안 돼. 또 다른 고보라니!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이냐!”
일반적으로 결단기 선사가 고보를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 보통 고보가 모습을 드러내면 대부분 원영기 선사들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동 고리에 이어 바구니 고보까지 등장하자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립이 그 질문에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바구니 고보가 쏘아져 나가며 하얀 빛을 방출했고 거대한 인장을 휘감았다. 인장은 요동을 치며 빨려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으나 빛의 위력에서 아예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후 한립의 열손가락이 튕겨지며 십여 개의 푸른 검이 흉흉한 기세로 고리에 묶인 서생을 향해 튕겨나갔다.
“아, 안……!”
서생은 고함과 함께 몸에 열댓 개의 구멍이 뚫렸고 꿈틀거리다 절명했다. 안타깝게도 공법을 다 펼쳐보기도 전에 오행환에 진원을 구속당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한립의 손짓에 따라 오행환이 빛으로 변해 돌아왔다. 서늘한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향했다.
거한이 구슬땀을 흘리며 주술을 외워 자신의 인장 법보를 회수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보호막을 둘러싼 푸른 검들은 아직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서생 선사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으니 간이 콩알 만해 질 수 밖에 없었다. 한립의 시선이 그에게 닿자 온 몸이 서늘해졌다.
이를 악문 그가 남색 빛으로 변해 달아나기 시작하니 원신과 감응하는 본명 법보도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였다.
과감한 행보였다. 하지만 한립의 눈이 가늘어지고 고리 법보가 다시 한 번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색의 고리가 달아나는 거한의 머리 위에 나타났고 마치 부적 보호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의 사지를 결박했다.
“으악……!”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의 거한은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땅에서 솟구친 푸른빛이 그를 몇 번이고 스치자 토막이 나고 말았다.
한립은 한가로운 몸짓으로 두 선사의 저물대를 거둬들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구니 속의 거대 인장이나 주인을 잃고 떠있는 벼루 법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립이 고개를 숙이고 무심히 입을 열었다.
“숨어서 그만큼 지켜보았으면 이제 나설 때가 된 것 같소만.”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해수면에 분명히 전달되었다. 바다 바람만이 해수면을 스치며 파도를 만들어냈고 사방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한립이 가볍게 탄식했다.
“아직도 바다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은 끌어내야 나오겠다는 것이오?”
그의 말투에 조금 불쾌함이 묻어났다. 한립이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서인지 드디어 다른 선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선사,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가겠습니다.”
목소리를 들은 한립의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이어 아래쪽의 해수면에서 파문이 일더니 하얀 빛이 발산되며 선사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성궁의 하얀 복장을 한 선사가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이마에는 비취색 옥이 박힌 띠를 두른 채 침착하게 한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의 얼굴을 살핀 한립은 조금 멍해졌다.
백옥 같은 얼굴에 또렷한 검은 눈썹과 눈동자가 여리지만 선명한 입술이 절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뜻밖에도 외모만으로 사내인지 여인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여인이라고 보기에는 여유가 넘치는 미소나 행동거지가 소탈한 공자의 것 같았고 사내라 보기에는 어여쁜 얼굴과 사내를 유혹하는 교태가 걸렸다.
“선사의 존성대명은 모르오나, 성궁의 대외 활동을 관할하는 집법 릉옥령을 도와주신 데에 감사를 올립니다.”
듣기는 좋았으나 중성적인 목소리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천남 지방에서 마주했던 합관종의 전부결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다시 헤아려 보니 둘은 완전히 달랐다.
전부결은 비록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으나 거동이나 목소리는 완연한 사내의 것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릉옥령이라 칭한 녀석은 동작은 호방했으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여인의 느낌을 풍겼고 낮은 목소리 임에도 사내의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