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73화 (30/2,000)
  • # 273

    273화. 검문

    역성맹 고위층은 남명도의 모든 성궁 선사들을 일망타진할 심산인 듯 했다.

    이때 하늘에 떠있던 역성맹 선사들이 천천히 하강했다.

    복색으로 보아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은색 의복에 금색 허리띠를 한 무리와 전신을 녹색 장포로 가린 괴이한 선사들이 섞여 있었다.

    정도와 마도가 함께 나타난 것이다.

    한립은 이번 일전이 속전속결 된 것에 대해 놀라면서도 그 안에 숨겨진 뜻을 고민하고 있었다.

    어쨌든 상대의 세력이 강하니 성궁 선사들이 목숨을 부지하려 달아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 지금 이 기회를 틈타 섬을 떠나야 할 지 고민 중이었다.

    그러던 중 녹색 장포를 걸친 무리에서 결단기 초기로 보이는 노인 한 명이 나섰다. 그는 한립 등이 숨어 있는 상공에 멈추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곳곳을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모두 잘 들어주십시오! 저 역성맹 호법 창운룡이 왕 장로님의 명을 받아 한 가지 당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본 맹이 방금 성궁 인물들을 격파했으나 그들의 잔당과 오해할 여지가 있으니 서둘러 섬을 떠나려는 행동을 삼가 주십시오.

    두 시진 정도면 잔당 섬멸이 완료될 테니 그때 자유롭게 이동해 주시면 됩니다. 본 맹은 오직 성궁과 그에 협조하는 세력만을 적으로 삼으니 모두 안심하고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노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또렷이 모두의 귓가를 울렸다. 인근에 숨어 있던 선사들이 노인의 말에 서로 눈치만 살폈다.

    저쪽에서 먼저 예의 바르게 협조를 구하는데 괜히 반박해 사단을 일으킬 이는 없었던 것이다. 일순 도처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한립 역시 한숨을 돌렸다.

    아무래도 역성맹이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 주의 깊게 행동하니 자신들을 상대로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 듯 했다.

    조금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당장 천성성에 당도한다 해도 혼전 중에 어찌 안으로 진입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을 마친 녹색 장포 노인은 말없이 항구로 돌아갔다. 한립은 멀어져 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역성맹 선사들의 거동을 주시했다. 다른 선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은색 의복에 금띠를 두른 선사들이 일사분란 하게 섬의 진법을 철거하고 자신들의 진법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녹색 장포 무리 역시 질서정연 하게 둘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항구 밖으로 나가 사방을 경계하고 다른 무리는 한립 등의 머리 위를 지나 섬 내부를 살피러 몰려간 것이다. 모두 묵묵히 맡은 바를 신속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한립은 조금 가슴이 서늘해졌다.

    정도와 마도가 역시 훨씬 이전부터 난성해 패권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제자들을 1, 2년 만에 양성할 수는 없었다. 남명도를 차지한 것도 천성성을 공격할 전초 기지로 삼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성궁이 정마 세력의 연합에 고분고분 당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그렇게 세력이 약해진 것일까?  아니면 천성쌍성의 폐관수련이 아직 끝나지 않아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풀리지 않는 의문에 추측이 꼬리를 무는 와중 한립이 실소했다.

    성궁과 정마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어떤 패를 숨기고 있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런 일에 자신이 골머리 썩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들의 다툼에 휘말려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었다. 생각을 정리하며 한립은 평정을 유지했다.

    고요히 두 시진을 기다리고 있자 아까 본 노인이 자신과 동급의 결단기 선사 세 명을 데리고 돌아와 입을 열었다.

    “떠나고자 하는 선사들께서는 신분을 증명할 증표나 공법을 보여주시면 됩니다. 만일 계속 이 섬에 남고자 하신다면 역성맹에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한 기존의 원칙을 고수하겠습니다.”

    그 말에 조금 소란스러워 졌지만 곧 안정을 되찾았다.

    비록 예를 차려 말하긴 했으나 누가 먼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싶어 하겠는가?

    만일 상대가 손 안대고 코를 풀려 연극을 하는 거라면 자진해서 목을 내놓는 일이 아닌가! 비록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 보였지만 모두 다른 사람이 먼저 나서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 역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세 명 모두 결단기 선사이니 그가 먼저 몸을 드러내지 않으면 들킬 위험이 없었다. 그는 먼저 나서서 위험을 무릅쓰는 유형은 절대 아니었다.

    고요가 한참 지속되자 녹색 장포 노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때서야 겨우 하얀 빛 줄기 하나가 땅에서 솟아올랐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어려 보이는 청의 선사였다. 젊은이가 노인 앞에 서더니 공손히 예를 취했다.

    “개천문(開天門) 제자 신명이 여러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이것은 완배의 신분을 증명해 줄 백수검(白水劍)입니다.”

    청년이 하얀 빛을 발하는 단검을 건네었다.

    “오, 개천문! 귀 문의 문주인 류 진인과는 일면식이 있는 사이다. 이 검 역시 개천문 제자들이 지급받는 법기가 맞으니 가보도록 하거라.”

    노인이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검을 젊은이에게 돌려주었다.

    그가 기뻐하며 다시 예를 취했고 항구를 떠나는 하얀 빛을 역성맹의 어느 선사도 막아서지 않았다.

    누군가 나서 먼저 안전함을 입증해 주었으니 다른 이들도 점차 몸을 일으켜 노인에게 날아갔다.

    노인은 견문이 넓은 듯 그들이 어떤 증표나 공법을 내놓아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아래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 역시 그가 대단하다 여겼다.

    다른 결단기 선사 역시 아무 문제없이 섬을 떠나자 한립 역시 나설 때가 되었다. 그가 돌연 모습을 드러내 푸른빛이 되어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노인은 그가 결단기 선사임을 알고는 말투가 달라졌다.

    “선사께서는?”

    “저는 묘음문의 객원 장로입니다. 요패를 확인해 보시지요.”

    자령 선자가 건네 준 장로를 상징하는 요패를 아무 생각 없이 지니고 다녔는데 쓸모가 생긴 것이다.

    노인이 요패를 자세히 살피더니 한립을 응시하며 물었다.

    “묘음문이라면 귀 문에 한 장로와 곡 장로 두 분이 계시고 줄곧 폐관수련을 하느라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두 분 중 선사께서는 누구신지요?”

    줄줄 흘러나오는 자세한 정보에 한립은 속으로 움찔했으나 미소를 띠며 답했다.

    “저는 한 가입니다. 선사께서 저 같은 무명의 산수까지 파악하고 계시다니 놀라울 따름이군요.”

    “허허, 과찬이십니다. 귀 문은 난성해에서 잘 알려져 있고 특히 자령 선자께서는 저희 소주께서도 많은 찬사를 들어 경모해 온 지 오래십니다. 혹시 자령 선자를 뵙게 된다면 말씀을 전해 주시지요.”

    한립이 조금 뜻밖이라 의문을 담아 물었다.

    “소주라면 어떤…….”

    노인이 답을 하기도 전에 그 옆에 서있던 장한이 서늘하게 답하였다.

    “저희 소주께서는 성조의 유일한 후계자로 이름이 알려지시진 않았으나 앞으로 난성해를 떨칠 분이시오.”

    조금 이상하기는 했으나 시원시원하게 노인의 말에 답을 하였다.

    “그러지요. 문주를 만나면 꼭 안부를 전하겠습니다.”

    녹색 장포의 노인은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요패를 다시 돌려주었다.

    “좋습니다. 그럼 요패가 확인되었으니 가보셔도 됩니다.”

    포권을 한 한립이 차분히 날아올랐다. 그가 푸른빛으로 변해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는 모습에 노인의 얼굴에 이상하다는 기색에 어렸다.

    옆에 서있던 장한이 노인의 표정을 보고는 재빨리 물었다.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가?  거짓 신분이라던가.”

    녹색 장포의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옥으로 된 서책을 장한 앞에 흔들었다.

    “거짓 신분은 아닐 걸세. 묘음문에 심어 놓은 제자를 통해 구한 장로들의 초상화를 보면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아무리 법술을 써서 얼굴을 바꾸었다 해도 항구에 있는 왕 장로의 눈은 속이지 못했겠지.”

    장한이 콧방귀를 뀌며 불만스레 물었다.

    “그럼 왜 그런 표정은 짓고 있나?”

    “묘음문의 한 장로란 자의 정체가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네. 아마 자네도 저 자의 적수가 안 될지 몰라.”

    노인의 말에 장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 무슨 말인가?  어차피 같은 결단 초기 선사인데. 게다가 상대는 산수이니 성조의 가르침을 받은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터.”

    노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류 호법도 알다시피 내 수련한 칠살결(七煞決)은 최상급 공법이라 볼 수는 없어도 다른 이의 살기(煞氣)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은가. 그런데 저렇게 살기가 짙은 이는 결단기 선사 중에서 처음 보네. 한 장로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선사의 수가 적지 않다는 뜻이겠지.”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저계 선사들을 도륙하는 것이야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렇지 않네. 저계 선사들을 살육하면 옅은 살기가 쌓이기는 하겠으나 곧 허무하게 흩어지고 말지. 그런데 저 자의 살기는 농염할 뿐 아니라 강렬하고 어둡기 그지없으니 동급 선사를 수 없이 죽이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야. 그런 살기는 몇몇 비술로 사라지게 하기 전까지 영원히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지.

    게다가 저 자는 기운을 숨기는 술법에 능하네. 아마 드러난 살기는 십 분의 일 밖에 안 될 테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아마 보통의 선사들이 환술이나 미혼술 등을 이용해 저 자를 상대 하려다가는 오히려 곤욕을 치를 것이네.

    그리고 일순 방심해 살기에 의지가 흔들리면 원래 능력의 칠 성이나 팔 성 밖에는 발휘하지 못하게 되겠지. 만일 저런 자가 칠살결을 수련한다면 엄청난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야.”

    노인의 목소리가 어쩐지 음산했다.

    그는 한립이 결단기 선사를 죽인 적은 거의 없으며 결단 초기에 상당하는 오 급 요수를 수백 마리 죽여 살기가 짙어졌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장한이 조금 놀랐으나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풀었다.

    “창 호법, 어차피 저 자의 살기가 얼마나 짙든지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설마 제자로라도 들이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동급 선사를 제자로 들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만 저렇게 강한 살기를 축적한 방법에 흥미가 생긴 것이라네. 그 비결을 알고 싶을 뿐이야.”

    여기까지 들은 장한은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체내에 축적된 살기를 통해 수련을 정진하는 공법은 난성해에서도 거의 없었고 그는 그런 공법을 익히지도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전혀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호기심이 생겼는지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아까 말한 우리 소주께서 묘음문 자령 선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는 또 무엇인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창 호법에게만 사적으로 분부를 내리신 겐가?”

    “헤헤, 그런 일로 분부를 내리실 분이던가?  소주께서 어떤 공법을 수련하시는지 알고 있겠지?  난성해에 명성이 자자한 미인인 자령 선자를 바치면 큰 도움이 될 게야. 벌써 결단 후기의 경지에 이르셨으니 성조의 가르침과 비호아래 백여 년 내로 원영기에 오르실 것이 분명하네.”

    장한이 그제야 알았다는 듯 흥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그럼 언제 움직이면 되겠나. 소주께서 곧 다시 폐관에 들어가실 듯 한데.”

    “급할 것 없네. 이번 대전이 끝나고 손을 쓰는 것이 좋겠지. 아마 묘음문도 그때는 역성맹의 세력이 두려워 거절하지 못 할 것이야. 만일 따르지 않겠다면 천성성으로 총단을 옮긴 일을 구실 삼아 성궁과 내통한 죄를 뒤집어씌우면 고분고분해 지지 않겠나?”

    “그거 좋은 생각이군. 겨우 결단 초기 장로 둘을 데리고 있는 묘음문이 우리에게 대항한다면 사마귀로 수레바퀴를 막는 격이 아닌가! 역시 창 장로의 머리는 비상해!”

    장한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노인은 몰래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묘음문 한 장로의 비밀도 알아낼 수 있겠지. 일거양득이 아닌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