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
272화. 남명도
역시 이전에 여섯 전각의 장로들이 오축에게 보여주었던 귀신 머리가 새겨진 패와 같았다. 조금의 변형이 있기는 했으나 분명 같은 문양이 틀림없었다.
정도와 마도는 아미 암암리에 결탁하고 있었고 오랜 세월 이때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놀라긴 했으나 아무런 내색 없이 서책을 노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천성성으로 달려가 성궁과 역성맹의 대전을 살펴본 후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정하려는 것이군.”
“그러합니다, 저희는 종주님의 명에 따라 상황을 살피러 가는 길입니다. 어쨌든 저희 삼선종이 거대 문파는 아니니 상황을 보아가며 대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역성맹이 벌써 천성성의 외성해에 공격을 가했고 우위를 점하고 있다더군요. 몇몇 섬들은 스스로 역성맹을 쫓겠다 자청해 성궁을 배반하였고요. 이제 내성해도 시끄러워질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이런 혼란을 틈타 악한 무리가 풍파를 일으키니 이미 수많은 산수와 작은 문파들은 화를 입어 시체가 산을 이루거나 멸문을 당했다 합니다.”
그간 지나쳐온 선사들이 모두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다른 이들을 배척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만족스런 대답에 한립이 손을 휘저었다.
“그래 잘 알았다. 그럼 이제 갈 길을 가 보거라.”
노인이 크게 기뻐하며 예를 취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비록 한립이 악인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과 같은 시기에 낯선 결단기 선사를 반길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서둘러 가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립은 제자리에 떠서 꼼짝 않고 생각에 잠겼다. 성궁과 정마가 결국에는 전쟁에 돌입한 것은 좋은 소식이기도 했고 나쁜 소식이기도 했다.
좋은 점은 큰 전란이 발생했으니 허천전에서 본 노괴들의 주의가 그쪽으로 집중된 다는 것이었다.
그들 모두 정도 혹은 마도에 소속된 처지이니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허천정에 대한 추적에 자연히 소홀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쁜 점은 이런 상황에 천성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굉장히 성가셔 졌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처럼 결단기 선사라면 더우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천성성에 당도하기 전에 전쟁이 시작되면 아예 진입이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성궁도 이런 시점에 아무 선사나 안에 들이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한숨이 나왔다. 이후 며칠 동안 간간히 저계 선사들을 가로막고 물었지만 노인에게 들은 바와 다르지 않았다.
이제 한립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한립은 수면 위에 떠서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며 주저하고 있었다.
그가 쪽빛 하늘을 올려다보다 돌연 손바닥을 뒤집어 푸른 병을 꺼내었다. 바로 만년영유가 든 병이었다.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빨리 귀한 보물을 사용해 버리자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으나 그렇지 않으면 역성맹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천성성에 당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성성 동굴 거처에 들리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전송진을 이용해 외성해로 달아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병의 마개를 젖히고 투명한 액체 몇 방울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는 곧바로 피풍의를 휘날리며 종적을 감추었다.
그 뒤로 반 개월간 법력이 떨어지면 만년여유 몇 방울을 복용하는 식으로 멈추지 않고 날아갔다. 그는 일정을 크게 앞당겨서 원용기 선사의 비행 속도에도 맞먹을 정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결과 가끔 마주치는 결단기 선사들 역시 붉은 기운 안의 한립을 원영기 선사로 보고 냉큼 길을 열어주었다. 당연히 원영기 선사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해보겠다는 간 큰 선사는 마주치지 않았다.
* * *
놀라운 속도로 끊임없이 날아온 끝에 한립은 드디어 천성성 부근 해역에 도착했다. 그는 며칠 내로 목적지에 다다를 정도로 가까워지자 핏빛 피풍의를 거두고 보통의 결단기 선사처럼 비행하기 시작했다.
지금 주변해역은 매우 혼란스러워서 원영기 선사가 인근에 나타난다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수행이 높은 선사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면 자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아직 역성맹 인물들이 출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으니 자연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전방에는 천성성에 이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거치게 되는 남명도(南明島)가 있었는데 면적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대량의 성궁 선사들이 주둔해 있었다. 천성성의 외부 초소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이전에는 크고 작은 상선들과 범인 그리고 선사들이 드나들던 항구가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범인이나 보통의 선사들은 전란이 일어날 거란 소식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은 각 세력에서 정보를 얻고자 파견한 선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립은 오랜 비행으로 피로가 쌓였기에 잠시 이곳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온 김에 남명도 시장에 들려 외성해에 나가서 쓸 물자도 보충해야 햇다. 어쨌든 현재 천성성 내부 상황을 모르니 미리 준비해 가는 것이 좋을 듯 했던 것이다.
그가 항구의 진법 안에 들어서자 남명도의 경계 수준이 매우 삼엄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최소 3명의 결단기 선사들이 그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성궁 역시 역성맹 선사들의 기습을 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립은 차분한 걸음으로 시장으로 향했다.
남명도 시장은 이곳을 지나다니는 선사들이나 상인들의 편의를 위해 항구에서 멀지 않은 성에 위치해 있었다.
시장의 규모는 대도의 것과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온갖 물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고 천성성 내의 시장보다 물건이 저렴한 편이었다.
시간이 없었기에 그는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현골 노괴에게 받은 구곡영삼의 약방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 *
널따란 대청에서 단정한 외모의 중년 선사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오랜 시간 원료점을 운영했지만 천엽로(千葉露)라는 원료는 처음 들어봅니다. 또한 마노각(瑪瑙角)은 무척 진귀한 요수 마노의 뿔로 일반적인 선사는 평생 한 번도 볼 기회가 없는 물건이지요. 아무래도 다른 점포나 경매소 등을 찾아가셔야 할 듯 합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이 나무 의자에 앉아 불만을 드러냈다.
“이곳이 가장 큰 원료 상인데 어디를 가란 말이지? 게다가 경매에 물건이 나오기를 기다릴 시간도 없는데 말이야.”
그 말에 중년인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한립이 요구한 물건들은 정말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 모습에 한립이 작게 탄식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아하니 구곡영삼을 제련할 최후의 재료 두 가지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듯 했다.
어차피 결단 후기의 최정상에 이르러 원영을 맺기 직전에야 쓸 것이니 급할 것도 없었다. 중년인이 한립을 배웅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것 같았다.
그가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엔 한립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천엽로라는 재료가 본 점에 없기는 하나 혹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이지?”
“스스로 자랑을 하는 것 같지만 완배가 이곳에서 원료상을 운영한지 100년 입니다. 수없이 많은 진귀하고 이상한 원료를 취급했었지요. 만일 제가 들어본 적도 없는 영초라면 십중팔구는 고대 선사들이 쓰던 이름으로 지금은 새로운 명칭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이름이 어려울 뿐 아주 평범한 영초였습니다.”
한립이 듣기에도 상대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구곡영삼 자체가 전설 속에나 나오는 신선의 영초이니 그 약방 역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일 터였다. 보아하니 상고 시대를 다룬 경전을 뒤져 봐야 천엽로의 진짜 정체를 알 수 있을 듯했다.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조용히 점포를 빠져 나왔다. 이제 결단기 선사에게 쓸 만한 약방을 모아 단약을 제련할 준비를 할 차례였다.
다만 다른 보조 재료들은 신비한 병을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충분히 모아두었다.
이번에 외성해로 나가면 단기간 내로 돌아오지 못할 텐데 사소한 보조 원료가 부족해 수련에 지장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여러 개의 고보를 지니고 있으니 진법의 보조를 받으면 육, 칠급 요수도 사냥할 수 있었다. 물론 팔급 이상의 요수가 등장하면 당장 달아나야 하지만 말이다.
듣기로 요수도 팔급이 넘어가면 몸의 일부가 인간의 형상을 띄기 시작하며 지능도 일반인과 대등해 질 정도라고 했다.
게다가 전투 능력이 타고나 동급의 원영기 선사들도 꺼리는 존재들이었다. 한립은 머리가 비상한 요수를 상대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겨우 반나절 만에 목적을 이룬 그가 다시 항구로 날아올랐다.
이미 어두워져서 밤이 깊었다.
콰콰쾅.
한립이 얼마 날아가지 못했을 때 밝은 빛이 번지며 항구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대경실색한 한립이 법력을 쏟아 부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는 항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멈춰 서서 어두운 얼굴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멀지 않은 상공에서 무수히 많은 각양각색의 빛들이 하늘을 뒤덮고 항구 밖 결계를 깨려 하는 것 같았다.
기세로 보아 적어도 천 명 이상의 선사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섬의 결계가 붉은 빛을 뿜어가며 공격의 대부분을 막아냈다.
그 밑에도 적지 않은 백의 선사들이 법기 등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기습한 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역성맹은 정말 빨리 움직여서 그가 서둘렀음에도 코앞에서 대전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제 전투가 벌어졌으니 천성성에도 이미 소식을 들어갔을 것이다.
지금 그가 천성성으로 간다 해도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였다.
무척 울분이 터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감정을 정리한 한립은 철저히 은닉술을 펼쳤다.
두 세력의 다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립이 고요히 의식을 퍼트렸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항구 주변은 곧 선사들로 붐비기 시작할 것이다.
역시 수많은 빛들이 섬 내부에서 날아왔고 모두 인근에 도착해 소리 없이 숨어 있었다. 고요히 전황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이 축기기 선사로 백여 명 정도였고 담이 큰 연기기 선사도 수십 명이 섞여 있었다.
다만 한립과 같은 결단기 선사는 대여섯 명 정도로 그 중 수행이 가장 높은 이도 결단 중기 선사였다. 그 자는 구릉 같은 곳에 숨어 있었는데 한립이 자신을 발견한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대연결을 수련한 한립은 극음 등 노괴들 보다는 아니어도 그에 못지않은 강력한 의식을 보유한 자였다. 원영 초기 선사가 인근에 숨어 있더라도 미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어야 했다.
인근에 이런 노괴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역성성에서 감히 남명도를 공격하려 했으면 원영기 선사를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일단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는 조용히 대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달아날 생각이었다.
* * *
항구에서의 대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결계의 붉은 빛과 항구 안팎의 다채로운 빛들이 뒤섞였는데 사악한 기운으로 가득 찬 회백색 빛이 공격에 합류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법기들과 법술들에 결계도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찢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그런 종류의 결계인지 아니면 성궁 선사들의 조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찢겨나가던 붉은 결계의 파편들이 하늘로 치솟아 역성맹 선사들의 무리들을 어지럽혔다.
이 기회를 틈타 미리 계획하기라도 한 듯 성궁의 선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눈부신 빛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항구를 벗어나는 인물들도 있었다. 성궁이 이 섬에 제법 고계 선사들을 남겨두었던 모양이었다.
동시에 공격을 하던 무리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빛줄기들이 그들을 추격하려 빠져나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