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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69화 (26/2,000)
  • # 269

    269화. 절세 가인과 영기의 샘물

    이제 돌계단을 지나 달아날 때이다.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에 마음이 불안했다.

    한립이 입을 벌리자 청죽봉운검이 결계의 입구를 갈라 일장 길이의 통로를 만들었다. 그는 빛처럼 빠른 속도로 그 틈을 빠져 나갔다.

    일단 조심스레 1층이나 2층의 밀실을 찾아 그곳의 금제를 제거하고 허천전 밖으로 전송될 생각이었다. 그 이상의 층은 그가 감당할 수 없었다.

    그가 가는 길은 이미 지나왔던 길이었기에 이미 모든 금제가 깨진 상태였다. 노괴들만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위험할 것이 없었다.

    그는 의식을 방출해 주변을 살피며 아까 허천전 벽에서 꺼낸 낡은 그림 족자를 꺼내 살피기 시작했다.

    “이건!”

    내용을 살피려던 그가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족자에 그려진 그림에는 전혀 법력이 느껴지지 않았고 어떤 윤곽 같은 것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내전 5층을 안내하는 지도였다.

    다른 표시는 그렇다 치고 높은 제단과 다리가 셋 달린 솥은 분명 허천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주변에 얼기설기 얽혀 있는 선들은 통로와 밀실들을 표현한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끈 것은 검은 먹으로 그려 넣은 부분이 아니라 유일하게 붉은 색으로 표시한 통로였다.

    길의 끝에는 내전 외곽의 높은 담이 있었고 그 뒤로 전송진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확인한 그가 앞으로 더 나아갈 리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 1층이나 2층의 밀실까지 가려면 노괴들에게 들킬 위험이 너무 높았다. 그런데 그림 속의 전송진을 이용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물론 꼭 허천전 밖으로 나가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5층에서 멍하니 있다가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그가 있는 위치에서 모퉁이만 꺾으면 붉게 표시된 길과 아주 가까웠다.

    이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 금제나 기관 요수와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미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가보자! 정말 위험한 일이 생기면 원래 계획대로 달아나면 그만이지!’

    원래의 계획대로 5층부터 1, 2층까지 내려가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한 선택이었다.

    결심이 선 그가 지체 없이 양 손을 휘두르자 몇 마리의 원숭이 꼭두각시들이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한립의 분부에 따라 바로 앞장을 섰고 신중한 얼굴의 한립이 그 뒤를 쫓았다.

    ……

    가는 길은 너무나도 안전했다.

    붉은 선으로 표시된 길에 들어서는 동안 단 한 번도 금제나 꼭두각시를 마주하지 않고 높은 벽 앞에 서게 된 것이다.

    한립은 석벽으로 보이는 곳에 서서 다시 한 번 족자를 펼쳤다.

    “맞아. 바로 여기야!”

    그의 손에서 날아오른 다섯 개의 푸른 검이 석벽의 이곳저곳을 찔러 들어갔다. 검이 푹푹 들어갈 만큼 아무 금제도 걸려 있지 않다는 것은 당연히 속에 감춰진 공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한립의 손짓에 따라 검들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일 장 크기의 원을 그렸다.

    손으로 가볍게 밀어내자 벽 뒤로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푸른 검을 거둔 그가 하얀 빛 덩이를 만들어내니 어두컴컴한 동굴이 밝아졌다.

    한립은 지체 없이 몸을 움직여 재빨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그리 크지 않은 밀실이 있었다. 높이는 두 장을 넘지 않았고 너비는 오륙 장 정도였는데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 덮인 채였다.

    그리고 그 중간에 정말 낡은 전송진이 하나 있었다.

    전송진은 삐뚤삐뚤 한데다 안의 도식과 문양도 엉성한 것이 진법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이가 대충 그려놓은 것처럼 생겼지만 말이다.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설마 사용할 수 없는 전송진이라거나 이미 폐기가 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한발 더 다가선 한립이 진법 지식을 이용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한참 뒤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엉성하긴 했으나 그럭저럭 이용할 수 있을 듯 했다. 다만 장거리용은 아니라 그의 바람대로 천리만리 밖으로 보내주는 고대 전송진은 아닌 것 같았다.

    한립은 영석을 몇 개 꺼내 전송진 곳곳에 배치했다. 그러자 전송진에서 은은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립은 미소를 보였지만 당장 전송진에 오르진 않았다. 뒤쪽의 통로로 돌아가 밀어버린 벽을 다시 세우고 여러 가지 소형 법술을 펼쳐둔 것이다.

    일을 마친 후에야 손을 턴 한립이 전송진의 하얀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무언가 몽롱한 기운이 가득한 공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한 향기가 그의 코를 찔렀다. 한립은 낡은 전송진 위에서 입을 벌리고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일 장 거리에 우유빛 연못에서 하얀 안개와 좋은 향이 넘실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멍하게 만든 것은 그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굴곡과 새하얀 피부가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를 이루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

    숨막히는 절경에 숨을 들이키던 한립은 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달라졌다. 쓴웃음이 배어 나왔던 것이다.

    한립이 거침없이 여인의 상반신을 훑어보고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원 소저, 공교롭게도 또 다시 뵙소만 적절한 시기는 아닌 듯 하오.”

    연못에 전라로 있던 절세가인은 내전에 들어오며 사라져 버린 원요였다. 너무 갑작스런 한립의 등장에 굳어 있던 그녀가 그의 말에 온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화가 나 소리쳤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그 전송진은 분명 더 이상 못 쓸 텐데…… 다, 당신 어서 고개나 돌려요!”

    그녀에 말에 바로 답하지 않은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전송진을 빠져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거대한 석실로 왼쪽과 오른쪽에 평범해 보이는 석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서있는 연못가의 반대편에는 검은 치마와 저물대들이 쌓여 있었다. 뒤 쪽으로 몇 장 떨어진 석벽에는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었고 아래의 움푹 파인 곳에 녹색의 목이 긴 옥병이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원요가 한립의 시선을 눈치 채더니 수치심도 잊고 안색이 달라졌다. 하지만 한립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는 연못으로 다가와 하얀 액체를 살폈다.

    겨우 안심한 그녀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했다. 이때 한립이 무슨 생각인지 연못물을 가볍게 떠내었다.

    바로 이 연못에서 향기로운 향과 맑은 영기가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다만 일정 시간이 지나자 향기와 영기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지고 보통의 맑은 물만이 남았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손에 고인 물을 털어낸 그가 차분히 원요에게 이야기 했다.

    “허천전에 이렇게 큰 영안의 샘이 있을 줄은 몰랐소. 원 소저가 위험을 감수하고 내전에 잠입한 것이 설마 이것 때문이었나?”

    “흥! 지금이 여인과 대화할 적기라고 보나요?  그 정도면 충분히 본 것 같은데요!”

    이미 평정을 되찾은 원요가 한립의 시선이 물 위로 드러난 자신의 어깨를 스치는 것을 보고는 거침없이 소리쳤지만 더욱 깊이 몸을 담그는 것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로 아무리 화를 내봐도 더욱 시선을 끌 뿐이었다. 거기다 맨 몸을 드러내고 검은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으니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정말 얼굴만으로 남자의 혼을 빼먹을 여인이었다. 한립도 그녀의 이런 모습에 조금 더워졌다.

    그가 항상 마음을 평정히 하고 세속의 욕망을 좇지 않더라도 몸은 정상적인 사내의 것이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에 눈요기라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한립은 연못가에 아예 엉덩이를 붙이고 앉더니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갔다.

    “원 소저가 옷을 입고자 하면 일어나 입으면 그만입니다. 다만 절세미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데 감상을 하는 것이야 내 자유이지 않겠소?  나는 무슨 성인군자가 아니라서 말이오.”

    웃음기 어린 얼굴로 턱을 괸 그는 흐뭇한 얼굴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당신 정말…….”

    원요가 온 몸의 피가 얼굴로 다 쏠린 듯 얼굴이 달아올라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이후 그녀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돌연 멀쩡한 얼굴로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하, 나무토막인줄 알았더니 그것은 아니었나봅니다. 제가 입은 큰 은혜를 생각하면 소녀의 몸을 보여드린다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또한 수도자로서 육신에 연연해할 마음이 없으니 그럼 일어나 의복을 좀 걸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먼저 검은 머리카락을 치우며 새하얀 어깨를 드러냈다. 그녀의 애교 어린 웃음에 안 그래도 아름답던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니 한 떨기 꽃이 따로 없었다.

    한립은 조금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순간 원요의 두 손이 하얀 연못의 물을 치며 엄청나게 치솟은 물의 장막이 그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 틈에 날아오른 원요가 근처의 옷가지와 저물대를 손에 넣었고 동시에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온 몸을 가려주었다.

    잠시 후 검은 기운이 흩어지며 다시 그녀가 나타났는데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고는 선녀처럼 땅에 서있었다. 아까 보았던 용머리 조각 밑의 녹색 병 역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후였다.

    ……

    물줄기는 이미 가라앉았고 한립의 눈빛 또한 냉정을 되찾았다.

    “아쉽게 되었소.”

    한립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볼이 다시 붉어진 원요가 미소를 띠고 물어왔다.

    “한 형은 원영기 선사들을 따라 5층으로 간 것 아니었나요?  어찌 이곳에 온 거죠?”

    말을 하며 그녀가 물기가 맺힌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하얀 빛이 지나가니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말라 비단결 같은 자태로 회복했다.

    눈길이 가는 모습이었다. 사실 얼굴로만 보아 그가 평생 보았던 여인 중 단연 1, 2위를 다투는 미인이었다.

    한립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온화하게 답했다.

    “어떤 금제를 잘못 건드려 이곳으로 전송되게 되었소. 원 소저는 이곳이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알겠지요?”

    “금제 때문이라고요?”

    그녀는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립은 말을 아끼며 웃는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원요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의 끈질긴 시선에 조금 골치가 아파왔다. 때려눕히자니 한립의 곤충 요수의 위력을 알고 있었고 특기인 미혼술을 쓰자니 전혀 무용지물인 상대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간이 좁히며 어쩔 수 없이 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은 내전 2층의 밀실이에요. 당신은 그 낡은 전송진을 통해 이곳으로 왔을 테고요. 진작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완전히 부숴놓았을 것을 괜히 좋은 구경만 시켜주게 되었네요.”

    말을 마치며 원요는 한립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몸으로 옮겨 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태연한 얼굴로 연못에서 발을 빼고는 신발을 갖춰 신었다. 잠깐이었지만 법력의 일부가 회복되었다. 계속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어서 출구를 찾아 허천전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시급했다.

    한립은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남쪽 석문을 향해 걸어갔다.

    곧 어지러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석문 밖은 더욱더 큰 석실로 이어져 있었고 거대한 꼭두각시가 완전히 부서져 지천에 깔려 있었다. 땅과 벽이 엉망진창인 것이 원요가 악전고투 끝에 꼭두각시를 해치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너머로 또 다른 석문이 있었고 아주 익숙한 빛을 뿜어냈다. 1층에서부터 보아온 보물이 숨겨진 밀실 석문이었다.

    잠시 주저하던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허천전 지도를 꺼내 영력을 주입하고는 가져다 대었다. 그 결과 하얀 빛이 번뜩이긴 했으나 석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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