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
268화. 건람주
현골의 이마에 엄청난 땀방울이 생긴 사이, 불길이 순식간에 백여 가지 색으로 변화하다가 갑자기 그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수많은 회백색 불똥이 곳곳으로 튀어나갔고 현골의 얼굴엔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돌린 현골은 엄청난 귀기를 북돋았다.
그의 몸이 번뜩이며 화살처럼 허공을 갈랐는데 폭발 범위를 벗어나야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 정말 죽기 살기로 움직인 것이다.
암녹색 귀기의 기세는 엄청 났지만 떨어져 내리는 회백색 불똥에는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내렸다.
회백색 불똥이 떨어지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 폭발 범위만 벗어나면 살 길이 있을 듯했다.
그때 현골 앞에 십여 개의 푸른 검이 달려들었다.
한립이 상황이 달라진 것을 눈치 채고 즉시 열 손가락을 튕겨 현골의 퇴로를 막은 것이다. 현골은 놀라고 화가 치밀었다.
이제는 몸의 기운을 북돋아 한립의 공격을 돌파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현골의 몸을 둘러싼 암녹색 기운이 더욱 농밀해졌다.
첫 번째 검이 도착했을 때 그의 입에서 녹색 법보가 분출되었다. 바로 금뢰죽으로 만든 화살이었다. 현골의 법보가 네다섯 개의 검을 깨부수고는 튕겨나갔다.
그러자 남은 검들이 거침없이 현골에게 날아갔다
펑펑펑펑.
연달아 폭음이 울려 퍼지고 현골의 암녹색 기운이 네 번째 청죽봉운검을 막아내고는 길을 열어주었다. 현골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러섰다.
그는 지금 거의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공포에 질려 무엇을 찾았는데 그 순간 회백색 불똥이 소리 없이 그의 어깨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더니 회백색 불길이 크게 치솟았다. 이에 현골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불길 속에서 재로 변해갔다.
수라성화의 엄청난 위력을 본 한립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현골이 화염 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진 이후에도 회백색 불똥들은 표표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이유를 알 수 없는 변화가 현골의 죽음으로 인해 벌어졌다. 떨어져 내리던 회백색 불똥들이 동시에 암녹색 기운을 분출하더니 검은 전류가 빠져나가며 순식간에 남색만 남게 되었다.
한립은 긴장해 주위를 살폈다. 어딜 둘러보아도 남색의 한기가 번지니 결계 안 전체가 얼음 기둥으로 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서둘러 백서패에 법력을 주입하니 열기가 하얀 빛을 타고 그의 주변의 차가운 기운을 몰아냈다.
현골의 통제를 벗어난 건람빙염은 그제야 원래의 위력을 방출하듯 그의 주변을 제외한 한려대 전체를 얼려버렸다.
한립은 지금 법력이 급속도로 줄어들어 울상을 짓고 있었다. 이제야 현골이 건람빙염을 완전히 융합시키지 못한 것이 법력 때문이 아니라 직접 제련을 안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까의 위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일 처음부터 이렇게 강력한 건람빙염의 위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수라성화를 억지로 만들어내 스스로 자멸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겨우 현골을 처리한 지금 그는 이렇게 억울하게 건람빙화에 죽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문 한립이 허리춤에서 영수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서금충이 든 영수대였다.
이제 딱정벌레들의 능력에 기대볼 방법밖에는 없었다. 달아나는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직 완전히 진화를 마치지 못한 서금충이 이렇게 끔찍한 극한의 냉기를 이겨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금만 계획이 틀어져도 딱정벌레와 함께 전부 몰살당할 것이다.
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한립이 손을 스치니 영수대가 당장이라도 개방될 참이었다. 이때 또 다시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주위를 떠돌던 건람빙염이 번뜩이더니 무슨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합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남색 기운이 주먹만 한 남색 얼음 구슬로 뭉쳐지더니 한립을 괴롭히던 추위와 얼음기둥 역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
영수대 입구를 절반쯤 풀었던 한립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숨길 수 없는 기쁨을 표출했다.
어떤 이유로 건람빙염이 이렇게 변한건지는 모르나 어쨌든 위기를 넘긴 것이 틀림없었다.
남색 얼음 구슬이 천천히 떨어져내려 한립의 눈앞까지 도착했다. 한립은 신중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돌연 그의 몸에 남아있던 옅은 뇌전이 손에서 방출되어 구슬을 감쌌고 더 이상의 낙하를 막아냈다. 얼음 구슬은 아무 저항도 없이 뇌전의 통제를 따랐다.
한립은 조금 주저했지만 푸른 광채로 손을 착실히 감싼 후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구슬은 조금 서늘할 뿐 차갑지는 않았다. 건람빙염의 엄청난 기운이 구슬로 뭉쳐진 후에는 전혀 새어 나오지 않는 듯 했다.
이제야 겨우 안심이 되었다.
손의 기운을 거둔 그는 구슬을 쥐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남색 구슬은 겉은 단단했지만 안에서 화염이 번뜩이는 것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듯 했다.
조금 망설여지긴 했으나 건람빙염은 속세에서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기운이며 허천정 이상의 보물일지 몰랐다.
비록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버리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청양마화나 천도시화 같은 마화의 위력을 알게 된 이후 줄곧 그런 마도의 화염을 탐내왔다.
그런데 건람빙염의 위력은 이전에 본 어떤 화염보다 대단했다. 이런 좋은 기회가 찾아 왔으니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해 볼만 한 일이다.
생각을 마친 그는 손에서 금색 전뢰를 뿜어 실로 감싸듯 한 층 또 한 층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원래부터 금색처럼 보이는 구슬이 나타났고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도 숨길 수 있었다.
안심이 되었다. 역시 벽사신뢰로 어느 정도 건람빙염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다시 한 번 구슬이 붕괴된다 해도 금빛의 그물이 그가 대책을 강구할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온 몸의 벽사신뢰를 모두 쓰고 말았다. 단 한 번의 뇌전도 더는 뽑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한립은 기분이 좋았다. 그는 곧바로 네모난 옥함을 꺼내 구슬을 잘 담아 챙겼다.
이후 제단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원기가 크게 상한 혈옥지주를 회수했다. 그리고 현골이 죽은 자리에 다가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땅에서 약한 빛을 발하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사람의 갈비뼈였는데 뼈가 수라성화의 불길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웠다.
한립은 이전에 지하 동굴에서 현골이 갈비뼈로부터 허천전 지도를 꺼내던 일을 떠올렸다.
‘이 안에도 무언가 들어있을까? ’
이런 의심이 들자 그는 주저 없이 갈비뼈를 저물대 속으로 집어넣었다. 지금은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하기 보다는 챙길 것을 챙겨서 멀리 달아나야 했다.
이번엔 그의 눈에 수 장 밖에 떨어져 있는 비취색 화살이 들어왔다. 눈썹을 끌어올린 그가 손을 들어 푸른 빛을 쏘아 보내자 그것 역시 손에 들어왔다.
쉬익.
화살을 집어넣으려는데 허리춤의 영수대에서 이상한 소리가 전해졌다.
그의 손이 소리가 난 영수대를 스치자 노란색 빛이 빠져 나와 몇 바퀴를 돌더니 어린 원숭이로 변했다. 바로 혼백을 잡아먹는다는 영수 제혼이었다.
그는 제혼을 통제할 명혼주인 잿빛 구슬을 꺼내 들었다. 당시 원효가 제혼을 넘겨주던 표정이 걸려서 아직까지 제련을 시작하지 않았는데 주인이 없는 구슬로 잠깐씩 제혼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명혼주를 들고 비취색 화살을 보던 그는 입을 벌려 푸른색 단전의 불을 뿜었다.
그러나 화살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마치 이미 영성을 잃은 것 같았다. 한립의 눈에 한기가 스치며 의식을 이용해 제혼에게 분부를 내렸다.
흥!
동시에 원숭이의 콧속에서 노란 기운이 빠져 나와 공중에 떠있는 화살을 잡아채려 했다.
그러자 죽은 듯 꼼짝 않던 화살이 맹렬히 녹색 빛을 내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치 공포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화살이 막 일장 정도 날아갔을 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한립이 푸른 검을 쏘아 공격을 가했다.
푸른 검에 적중 당해 휘청거리는 사이 제혼이 뿜은 노란 기운이 화살을 감싸 버렸다. 그러자 법보가 끊임없이 번뜩이며 달아나려고 난동을 부렸다.
그러나 엄청난 흡입력을 가진 노란 기운에 아무리 난리를 쳐도 빠져 나갈 수 없었다. 제혼이 악령이나 혼백의 천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화살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노란 기운 속에서 백여 개의 실들이 뿜어져 나와 화살을 꽁꽁 감싸버렸다.
이어 노란 실들이 녹색의 광채를 화살에서 뽑아냈다.
녹색 광채는 노란 실들에 대항해 각종 곤충, 물고기, 산짐승 등으로 모습을 바꾸어댔다.
하지만 노란 실들이 녹색 광체의 몸통을 꿰뚫자 조금씩 제혼의 코를 향해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녹색 광채가 쇠로한 노인의 얼굴로 변해 공포에 질려 애걸하기 시작했다.
“한 선사! 노부를 살려주시게! 살려만 준다면 노예가 되어 영원히 주인으로 모시겠네. 알고 있는 수많은 비술과 공법도 전부 넘겨주겠어! 또 역도 극음 놈에게도 전수하지 않은 현음대법의 상승 공법 역시 알고 싶지 않은가? 현혼연요대법을 이용해 강시도 만들어 낼 수 있고 극음에게 들키지 않은 비밀 거처에는 아직도 수많은 보물들…….
노인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심지어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는 약조 또한 서슴지 않았는데 이미 귀혼의 코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만일 이대로 빨려 들어가면 아무리 단단히 제련해 놓은 요혼(妖魂)이라 해도 절대 다시 볕을 쬘 날이 없을 것이다. 녹색 혼백의 유혹에 아무리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자라도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립의 머뭇거리는 기색을 감지했는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이 모든 것이 불필요하다 해도 극음에게 평생 쫓기지 않으려면 그 놈의 약점은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 말에 탄식한 한립이 손에 든 명혼주를 살며시 흔들었다. 미친 듯 녹색 광채를 빨아들이던 노란 기운이 속도를 줄였다.
노인의 얼굴이 일순 편해졌다.
“현명한 선택일세! 절대 후회하지…….”
이때 제혼의 코에서 다시 한 번 엄청난 흡입력으로 원래의 속도보다 훨씬 빨리 그것을 빨아들였다. 긴장을 풀고 저항하지 않던 녹색광채는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제야 한립의 얼굴에 냉소가 걸렸다.
작은 원숭이가 꽤나 힘을 썼는지 트림을 하더니 유유히 배를 문질렀다. 얼굴에 떠오른 만족스런 표정을 보니 포식을 한 듯했다.
미소를 지은 한립의 손에서 명혼주가 빛을 발하니 원숭이가 다시 노란 빛으로 변해 영수대로 돌아왔다. 한립이 몇 걸음 나아가 녹색으로 변한 화살을 회수하며 중얼거렸다.
“네 놈을 노예로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호랑이 입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 낫겠다. 천 년도 넘게 산 노귀를 상대하려면 내 몸이 두 개여도 역부족이지. 기회가 왔을 때 없애는 것이 백 번 옳지.”
사실 방금 본 노인의 얼굴이 정말 현골의 혼백인지 아니면 미리 비술을 이용해 분리해 놓은 혼백의 조각인지 알 수 없었다.
귀신을 부리는 술법을 전문으로 하던 현골이었으니 무슨 짓을 해놓았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오행환 고리들까지 회수한 이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방금 노인이 한 말이 그의 몸에 남아있는 극음의 수작질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아마 이 표식을 제거하지 못하면 결계를 벗어나는 대로 극음에게 들킬 것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몸을 탐색했지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웽웽…….
한립은 영수대 하나를 풀어 수 천 마리의 딱정벌레들을 불러냈다.
서금충들이 바로 그의 몸에 달라붙더니 한 쪽 종아리에서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한립이 크게 기뻐하며 명을 내렸고 종아리 쪽 서금충들이 잠시 요동을 치더니 벌 떼처럼 날아올라 영수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