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
266화. 다시 나타난 허천정
한립은 현골이 던진 서책을 직접 받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그 결과 파란 빛이 번뜩이며 서책이 푸르스름한 빛의 장막에 감싸인 채 수중에 떨어졌다. 한립은 의식을 이용해 서책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대강 살펴서 진짜인지 확인할 시간은 없었으나 가짜는 아닌 것 같았다. 일단 구곡영삼이 언급이 되어있을 뿐 아니라 그가 들어본 보조약재들도 언뜻언뜻 보였던 것이다.
의식을 회수한 그가 사양할 것 없이 서책을 저물대로 챙겼다.
“그러죠. 거래에 응하겠으니 서두르시죠.”
일단 결심을 내린 바에야 속전속결하는 것이 옳았다. 한립은 당장 영수대를 풀어 흉흉한 기세의 혈옥지주를 불러냈다.
“아주 잘 생각했다.”
얼굴에 흥분한 기색을 드러낸 현골의 거미 강시 거미줄을 뿜어냈다.
한립 역시 냉랭한 얼굴로 명을 내려 혈옥지주로 하여금 거미줄로 구덩이 아래의 허천정을 감싸게 했다.
현골이 혈옥지주의 몸에 색깔이 제각각인 여러 법술을 걸더니 한립에게 설명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서둘러야 한다. 비록 공법에 한계가 있어 광폭술은 사용할 수 없지만 다른 보조 법술 몇 개는 가능하지.”
동시에 한 마리 남은 거미가 사나워지며 몸이 붉어진 것 외에 검은색과 녹색의 기운이 맴도니 기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한립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아지긴 했으나 별 말을 하진 않았다. 어쨌든 이런 법술의 보조 없이는 혈옥지주가 허천정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혈옥지주 두 마리가 힘을 쓰기 시작하니 점차 거미줄에 딸려 올라왔다. 동시에 극렬한 진동과 남색 빛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보호해줄 청역 거사가 없었으니 스스로 알아서 대처해야 했다. 그는 서둘러 불 속성 보호막을 펼치고 허리에 찬 백서패의 위력을 북돋았다. 그리고 가장 안쪽은 청원검결의 칼날 방패인 청원검순을 펼쳐 놓았다.
푸른 빛의 보호막이 한립을 감쌌으며 눈을 찌를 듯한 푸른 빛 속에서 은은히 금빛이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시 녹색 기운이 크게 번지더니 농밀한 귀기가 그를 보호했다.
여전히 뼈를 스미는 한기가 느껴지긴 했으나 청원검결을 전력으로 운용하자 몸을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한립은 의식의 대부분을 구덩이에 집중하면서도 현골을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늙은 마두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을 해도 일단 의심을 해봐야 했다. 혈옥지주가 미친 듯 힘을 끌어 쓰는 동안 허천정은 다시 천천히 부상하고 있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던 아까와는 달리 허천정이 올라오는 속도가 너무 느리게만 느껴졌다. 만일 노괴들 중 하나라도 돌아온다면 망하는 것이었다.
녹색 기운 속의 현골은 고요했지만 구덩이의 남색 빛이 강해질수록 점차 얼굴에 열기를 띠었다. 두 선사의 주시 하에 허천정은 순조롭게 올라오고 있었다.
안절부절 하는 와중에도 다행인 것은 만호자가 다른 노괴들을 어디까지 유인했는지 아무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구덩이만을 쳐다보던 한립과 현골이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어 남색 화염이 구덩이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또다시 남색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천지를 얼음 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남색 화염 속의 모호한 검은 그림자가 한립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처음 허천정이라 불리는 의식용 솥이 나타났을 때는 날뛰는 노괴들에게 주의를 빼앗겨 자세히 볼 겨를도 없다가 이제야 진면목을 보게 된 것이다.
겨우 반절 남짓 올라 왔지만 어떤 모습인지 알 것 같았다.
타원형의 솥은 두 손잡이와 세 개의 다리를 가졌고 높이는 대략 네 자쯤 되어 엄청 크다 볼 수는 없었다.
솥은 원형의 볼록한 덮개로 덮여 있었는데 온갖 곤충과 물고기 짐승 등이 산과 바다를 노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조각을 보며 한립은 만황 시대의 고대 선사들의 풍취를 느끼는 중이었다.
허천정은 모습을 드러낸 이후 웅웅거리기 시작하더니 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그 주위를 둘러싼 푸른 화염 역시 몇 배로 커졌다.
비교적 구덩이 가까이에 있던 한립과 현골이 안색이 급변해 서둘러 뒤로 빠졌다. 제단을 중심으로 십여 장 범위가 남색 화염의 기운에 철저히 얼어붙어 얼음 기둥을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거미 두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한립과 현골도 조금만 늦었다면 화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제단은 거대한 남색 수정안에 들어있는 형상이 되었다. 한립이 놀라 물었다.
“이러면 어찌 보물을 찾습니까?”
마치 주변의 영력마저 얼어붙은 듯한 모습에 딱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현골은 진지한 얼굴로 남색 화염을 살피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답했다.
“건람빙염을 없앨 방법은 없지만 내가 익힌 현혼귀화 역시 극한의 물질이니 잠시 동안은 통제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네가 허천정을 구덩이 밖으로 꺼내거라.”
한립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들떴다.
상대가 뜻밖에도 위험한 건람빙염을 맡는다 나섰고 그에게 허천정을 꺼내게 시킨 것이다. 한립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현골을 바라보았다.
‘설마 허천정을 꺼내는 것이 더 위험한 걸까? ’
그러나 지금은 몸을 사리기보다는 움직일 때였다. 허천정을 취하다가 낌새가 이상하면 보천단이고 뭐고 당장 달아나 목숨을 연명하면 된다.
마음을 굳힌 그가 고개를 끄덕여 현골에게 의사를 표했다. 현골 역시 만면에 웃음을 띠고 화답했다.
이후 묘한 표정으로 화염을 바라보던 늙은 마두가 허공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그의 몸을 감싼 귀기들도 함께하니 직경이 일 장에 달하는 청록색 돌풍이 불어 음산한 기운과 함께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현골을 벗어난 돌풍이 남색 얼음 기둥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엄청난 충돌음과 함께 돌풍에 불이라도 붙은 듯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 기둥으로 변하였다. 그 화염은 검은색과 녹색의 중간쯤으로 열기가 전혀 없고 얼음장 같은 기운을 풍겼다.
한립은 눈을 크게 뜨고 불기둥이 남색 얼음기둥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주시했다.
촤촤장!
남색과 검은색 그리고 녹색이 현란하게 부딪치며 금속끼리 마찰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울렸다.
일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긴장하던 한립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현골의 불기둥이 정말 통로를 만들어내며 제단 중심의 남색 화염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조마조마하게 그것을 지켜보며 재빨리 혈옥지주와 감응했다.
상대가 건람빙염과 허천정을 분리하는 순간 혈옥지주를 움직일 생각이었다. 결국 불기둥이 현골의 지시에 따라 구덩이를 덮쳤다.
눈부신 남색 화염을 마주한 불기둥은 지체 없이 폭발해 버렸고 순식간에 암녹색의 거대한 연꽃이 피어나며 건람빙염과 허천정을 품에 안았다.
그것을 본 한립이 흠칫 놀랐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현골이 거래를 깨고 모든 것을 독점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그 즉시 한립은 오색의 고리들을 꺼내 손에 쥐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거대 연꽃이 그저 남색 화염만을 낚아채 사라지고 허천정만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한립의 심장박동이 점차 빨라졌고 얼굴은 기쁨으로 달아올랐다. 그는 현골의 신묘한 솜씨에 대단함을 느끼며 즉시 혈옥지주에게 필사적으로 거미줄을 당길 것을 명했다.
원래도 팽팽하던 거미줄이 더욱 거세게 당겨지며 이변이 일어났다.
줄곧 천근만근이던 허천정이 뜻밖에도 혈옥지주의 힘에 단번에 튀어나와 한립 쪽으로 날아든 것이다. 기뻐할 일이긴 했으나 무언가 찜찜해졌다.
모험을 할 수 없었던 한립은 서둘러 푸른 검광을 쏘아 보냈고 도중에 두 개로 갈라진 검들이 솥의 손잡이를 한 개씩 받들고 섰다.
한립은 허천정에서 세, 네 장 떨어진 곳까지 날아갔다. 손쉽게 통제가 되자 더욱 의심스러웠다. 분명 건람빙염이 거둬들여졌기에 가볍게 튕겨 나온 것일 터였다.
하지만 모두 의심일 뿐이었다.
깊게 고려해볼 시간이 없었기에 일단 솥을 푸른 검기로 감싸 천천히 데려왔다. 그가 주술을 외는 소리와 함께 손에 허천정이 들어왔다.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웠고 어떤 이상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립은 손끝으로 솥을 만져보았다.
‘이게 난성해 제일의 보물 허천정이라고? ’
한립이 주먹만 한 소형 솥을 보며 중얼거렸다.
“가짜는 아니겠지…….”
그때 갑자기 미친 듯한 폭소가 들려와 그의 생각을 끊었다. 분명 현골의 목소리였는데 웃음 속에 광기가 어려 소름이 돋았다.
“크하핫! 건람빙염, 현혼음화, 벽사신뢰가 합쳐졌으니 이제 전설 속의 수라성화(修羅聖火)를 익힐 수 있어! 역시 난 틀리지 않았어. 흐핫하하……!”
한립은 한 손에 솥을 쥐고 무표정하게 현골을 바라보았다. 그 결과 놀라운 모습을 한 현골을 볼 수 있었다.
암녹색의 거대한 연꽃은 이미 종적을 감추었고 그저 거대한 빛 덩이를 두 손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빛 덩이를 처음 보았을 때는 검은색과 녹색이 섞여 보였으나 자세히 관찰하니 그 중심에 남색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암녹색 외피를 뚫고 나오려 요동치는 불길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빛 덩이 바깥에 쉼 없이 검은 뇌전이 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립의 안색이 달라졌다.
‘현골의 진짜 목적은…….’
그때 한립에게 현골이 다가왔다. 그는 십여 장 거리를 남기고 멈춰 서서 한립이 들고 있는 허천정을 바라보았다.
“잘했다. 네가 허천정까지 꺼내왔으니 모든 것이 완벽해졌어.”
한립은 그저 콧방귀를 뀌며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미소를 지은 늙은 마두가 유유히 말을 이었다.
“표정을 보니 눈치 챘겠구나. 시간도 없는데다 곧 죽을 녀석에게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을까 싶어 하지 않았다. 네 혼백은 잘 써주마.”
상대의 분명한 살의에 한립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상대에게 애걸하며 쓸데없이 말을 섞을 여유가 없었다.
선공을 해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한립이 양손을 움직여 수결을 맺으니 고리들이 신속히 줄어들어 현골의 목과 팔다리를 파고 들었다.
고리가 조이는 고통 속에서도 현골은 그를 비웃었다.
“헤헤, 오행환(五行環)이라. 고보 중에서도 비교적 명성이 있는 물건이지만 이영근을 보유한 자나 수행이 월등이 초월한 선사 그리고 나처럼 사공을 쓰는 선사에겐 무용지물일 텐데.”
역시 그는 아무 것도 없다는 듯 팔을 들어 올려 눈앞에 떠있던 빛 덩이를 쳤다.
빛 덩이의 표면이 일순 번뜩이더니 뜻밖에도 가운데가 갈라지며 커다란 입을 벌렸다. 갈라진 틈에선 남색 화염이 꿈틀거렸고 이어 기다란 꼬리를 남기며 날아갔다.
이 불꽃이 살아서 움직이듯 현골의 목과 팔 다리를 스치자 단단히 그를 붙잡아 놓았던 고리 위에 서리가 맺혔다.
현골의 몸이 알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며 비틀리니 꽁꽁 얼어붙은 고리들이 생명력을 잃은 듯 땅에 떨어져 맑은 울림을 냈다.
이에 한립은 즉시 입을 벌려 푸른 단검 아홉 자루를 분출했다. 아홉 자루의 단검들은 허공에서 하나로 합쳐져 거검으로 변한 후 현골의 목을 치러 날아갔다.
이런 공격에도 현골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가 빛 덩이를 높이 들어 올리자 또 다시 입이 벌어지며 남색 화염을 쏟아 낸 것이다.
남색 화염이 이번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빙룡으로 변해 거검을 붙들고는 주저 없이 남색 기운을 뿜어 공격했다.
거검은 아주 잠깐을 버티고는 빛이 크게 줄어들었고 표면에 서리가 껴서 이동속도가 줄어들었다.
펑.
천둥번개가 치며 은은한 금빛 전뢰가 거검의 표면에서 발생해 빙룡을 공격한 순간 거검이 속박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났다.
현골이 입술을 꿈틀하더니 흉악하게 외쳤다.
“어딜 도망가려느냐? 네가 지닌 금뢰죽 법보는 두고 가거라! 아마 벽사신뢰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얼마나 버티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