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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64화 (2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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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4화. 원영

    만호자의 말로 마도의 연합은 깨졌고 이제 각자의 능력껏 보천단을 취득할 일만 남았다. 하지만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허천정은 꺼내지 못했지만 보천단 한 알이라도 굴러 나왔으니 누구인들 그것을 탐하지 않겠는가! 마도 선사는 물론이고 정도인들도 욕심이 날 터였다.

    극음은 만호자와 입씨름 하는 것이 백해무익함을 깨닫고는 천도요시를 방출해 보천단을 가져오려고 했다.

    하지만 농부 차림 선사의 공법이 괴이해 일단 요시를 방출하기만 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녹색 줄기가 휘감아 그 길을 방해했다. 극음으로서는 이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사실 극음 뿐 아니라 여섯 명의 원영기 선사가 모두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누군가는 보물을 향해 손을 뻗었고 누군가는 전력을 다해 그것을 막았다. 모두가 교활하기 이를 데 없으니 아무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허공의 원영기 선사들이 혼전(混戰)을 치르느라 결계 바로 앞에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립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는 방금 원영기 선사의 법보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방금 성궁 장로의 회심의 일격에 죽지 않은 것은 그 자신도 의외였다.

    한립이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슴을 자세히 살피고서야 만호자가 잠시 빌려주었던 황린갑을 발견했다.

    겉에 있는 옷은 이미 잘려나갔지만 그 안에 있던 비닐 갑옷은 공격을 당한 부위가 움푹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갑옷을 검사해 보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자 줄곧 옷 안에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황천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금 당한 공격에 살아남은 것은 바로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은 옥패덕분이기도 했다.

    옥패를 이용해 공격을 막으려 했을 때 그 안에서 은색 늑대의 머리가 나타난 것을 희미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 늑대가 자신을 도와 공격의 위력을 대신 막아 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린갑의 방어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렇게 멀쩡할 수는 없었다. 몸이 완전히 갈라지진 않았더라도 중상을 입고 쓰러졌을 것이다.

    옥패의 기능을 자세히 연구해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옥패를 저물대에 잘 넣어두었다.

    그러자 손에서 전해지는 고통이 실감이 났다. 그가 이를 악물자 하얀 빛이 발하며 찢어진 살들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재생되었다.

    조심스런 눈빛으로 허공에서 벌어지는 전투와 제단 위에 참혹하게 죽어있는 혈옥지주의 시체를 번갈아 살폈다.

    한립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쳤으나 곧 굳세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결계의 벽을 따라 멀리 보이는 돌계단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지금까지 온 길을 외워두었으니 1층까지 순조롭게 달아날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멍청하게 서서 원영기 노괴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미 혈옥지주가 참혹하게 죽었으니 자신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이제 그저 그들의 온정에 기댈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쥐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허천정 획득에 실패했는데 보천단 마저 얻지 못한다면 화가 머리끝까지 날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생각을 할수록 그의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졌고 아무 기척도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막 십여 장을 날아가는데 어떤 목소리가 자신을 불러 세웠다.

    “한립, 어딜 가는 게지?”

    현골의 차분한 목소리는 크다고 할 수 없었지만 허공에 떠있던 극음 등의 귀에 들어가기에는 충분했다.

    동시에 극음과 만호자 등의 시선이 한립을 훑었다.

    한립은 온 몸이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골이야 그렇다 치고 원영기 선사들이 나서면 죽은 목숨이었다.

    어차피 입구의 결계를 여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정도면 극음이 자신을 몇 번을 죽이고도 남았다.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돌계단을 슬픈 눈빛으로 보고는 착실히 되돌아갔다. 줄곧 의식을 이용해 한립을 감시하던 현골의 입가에 냉소가 퍼졌다.

    제자리로 돌아온 한립이 그를 향해 험악한 눈길을 보이고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오축을 상대하며 여유가 있었음에도 그를 날려버리고 보천단을 차지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만천명이 보천단이 아래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번번이 만호자의 금색 손에 막히자 화를 참지 못하고 위협을 해왔다.

    “만호자, 본 문주가 천라진뢰를 사용하기 전에 그만 길을 트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호자가 처음엔 움찔하다가 곧 그를 비웃었다.

    “천라진뢰라. 극음이나 청역은 그것을 두려워한다지만 나는 그것의 위력이 궁금하던 차였다. 다만 네가 아까워 그것을 사용할 수나 있겠느냐.”

    분명 상대가 그 보물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만천명의 얼굴이 굳으며 탐욕 어린 눈빛으로 보천단을 내려다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좋다.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란 것을 명심하거라!”

    그가 주저 없이 자신의 머리를 치자 맑은 울림과 함께 보랏빛이 정수리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놀랍게도 발가벗은 갓난아기였다.

    아기의 하얗고 보드라운 몸은 보라색 빛에 휩싸여 있었고 놀랍게도 만천명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손에 보라색 구슬 두 개를 쥐고 있었다.

    만호자가 그것을 보자마자 안색이 크게 변해 음산히 외쳤다.

    “원영을 몸에서 빼내다니 정녕 혼백이 흩어져 사라지고 싶은 게냐!”

    “어차피 보천단을 얻지 못 하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나는 끝이다. 조금 일찍 죽으나 영원히 제자리걸음을 하며 버티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겨우 이 말을 하고선 아기의 호흡이 거칠어 진 것으로 보아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만천명의 본래 몸은 갓난아이가 나타남과 동시에 두 눈을 감았으며 이지(理智)를 상실한 모습이었다.

    만호자가 서늘하게 만천명의 원영을 노려보았다.

    “정말 차이가 없을 것 같으냐?  내가 네 원영을 제련해 윤회도 못할 것은 겁나지 않는가 보군.”

    “그럴 능력이 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 허나 본 문주의 천라진뢰나 받아 내고 이야기 하거라!”

    미약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아기가 손에 쥔 두개의 보라색 구슬 중 하나를 주저 없이 내던졌다.

    구슬이 아기의 손을 떠나자 바로 폭발해 수레바퀴만 한 보라색 빛 덩이로 변해 만호자를 노렸다.

    미간을 좁힌 만호자가 흉악한 얼굴로 두 손을 합장하니 그의 머리에서 맑은 소리가 울리며 금빛을 사방으로 분출하는 옅은 금색의 갓난아기가 나타났다.

    아이의 얼굴도 만호자와 똑같았으나 키가 두 촌 반이라 만천명의 원영보다 크기가 컸고 눈을 꼭 감은 채 양손에 푸른 방패를 굳세게 쥐고 있었다.

    원형 방패는 정교하고 아름다웠고 중간에 콩알만 한 수정이 박혀 있어 광채를 뿜어냈다.

    보라색 빛 덩이가 코앞까지 왔는데도 만호자의 원영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기가 방패를 들어 올리니 푸른 보호막이 퍼져 나와 만호자의 온 몸을 가려주었다.

    보라색 빛 덩이가 흉흉한 기세로 충돌해 왔다.

    옆에 있던 천오자나 극음 등은 두 사람이 연달아 원영을 몸 밖으로 분출한 것을 보고 정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꽈과과광!

    경천동지할 폭발음이 울려 퍼지고 만호자의 보호막은 완전히 보라 빛으로 뒤덮였다. 직경이 십여 장에 달하는 뇌운(雷雲)이 출현해 그를 빈틈없이 가둔 것이다.

    구름 속에서 보라색 번개가 미친 듯이 내리치며 귀청을 울리는 괴성과 바람 소리와 눈을 자극하는 빛이 끊이지 않았다. 마치 하늘이 벌을 내리는 듯 공포스러운 위력이었다.

    다른 이들도 그것을 보고는 크게 놀란 기색이었다.

    천라진뢰가 대단하다는 것은 진작 들어보았지만 직접 코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명성에 걸맞은 엄청난 위력이었다.

    만천명의 원영은 뇌운에 갇힌 만호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작은 손을 휘저어 보라색 소검을 소환했다.

    보랏빛이 반짝하는가 싶더니 소검과 아기가 동시에 사라진 것이다. 다시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보천단과 단지 다섯 장 거리에 불과했다.

    서로 격렬히 싸우던 나머지 네 선사의 얼굴이 달라졌다.

    “원영어검(元嬰御劍)!”

    지금 만천명의 원영이 선보인 것은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타나는 눈속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원영이 육체의 구속을 벗어나면 갖게 되는 특수 능력인 순간이동이었다.

    만천명이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이동을 해 사라져 버리자 모두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극음과 청 노인도 약속이라도 한 듯 상대를 버리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의 적수였던 천오자와 마른 노인도 대충 법술 몇 개를 써서 막는 척만 할 뿐 진심으로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만천명의 원영이 고개를 돌려 극음과 청 노인을 확인하더니 아기의 얼굴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냉소가 떠올랐다.

    이 정도 거리가 벌어졌는데 누가 그를 막으러 올 수 있단 말인가?

    역시 그들이 따라잡기 전에 만천명의 원영은 오색 빛 덩이에 도착했고 드디어 보천단을 거머쥐었다.

    화려한 빛이 사라지자 투명한 오색의 단약이 아기의 손에 남았다. 만천명은 기뻐 날뛰고 싶었으나 이후 뒤늦게 도착한 극음이나 청 노인이 그 꼴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극음이 불을 뿜을 듯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만천명! 보천단을 내놓거라!”

    극음의 거대한 현음마기는 물론이고 청역의 녹색 기운 역시 조밀하게 그를 덮쳐왔다.

    “너희가 날 가둘 수 있을 성 싶더냐!”

    아기가 웃음을 짓더니 보랏빛이 반짝이자 그들의 공격 범위 밖에서 나타났다.

    원영은 십여 장 밖에서 보라색 소검에 올라타 그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웃음기가 사라진 아기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만천명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허공에 떠있던 만천명의 육체가 체구가 건장한 누군가에 의해 목이 졸리고 있었던 것이다. 금색이 찬란한 몸뚱이는 누가 보아도 만호자였다.

    지금 만호자는 머리며 수염이 다 타 들어가 구불구불했고 의복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그리고 온 몸의 금색 비늘과 흉악한 얼굴은 더욱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어찌 이럴 수가.”

    만천명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뇌운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라색 뇌운은 이미 흩어진 지 오래여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만호자가 손에 들린 보라색 수정을 보여주었다.

    “히히! 참 운도 없군. 오래 전 우연히 발견한 고래 요수인 뇌경(雷鯨)에서 뇌전을 흡수하는 뇌석(雷石)을 얻었었지. 아무리 천라진뢰가 대단하다 해도 뇌석이 대부분의 위력을 흡수해 날 상하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셋을 세겠다. 만일 보천단을 가져오지 않으면 네 육신을 멸할 것이야. 그 결과가 어찌 될 지는 스스로 잘 알겠지!”

    만호자는 거침이 없었다.

    “하나!”

    “둘!”

    상대가 세치 혀를 놀릴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듯 만호자는 금빛이 번뜩이는 손을 만천명 육체의 머리로 가져갔다.

    만천명은 기가 찼다. 분명 원영의 형태로 빠져 나오기 전에 몇 개의 강력한 금제를 쳐놓았는데 이리 순식간에 만호자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상대가 우연히 뇌전을 흡수하는 돌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겨우 원영 중기에 이른 그의 수준으로 정말 육신이 사라지면 푸른 연기처럼 사라질 일만 남았다. 육체를 떠나서도 원영의 상태로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준이 아니었다.

    이게 바로 원영으로 몸을 빠져 나오면 위력이 큰 특수 능력을 이용할 수 있음에도 쉽게 그리 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만천명은 보천단에 눈이 멀어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지금 만호자가 결코 협상을 하지 않을 기세인 것을 보니 그가 어찌 해야 할지는 분명해졌다.

    그가 막 ‘둘’을 세었을 때 더는 고민하지 않고 보천단을 던져 주었다.

    만천명이 원영어검을 써 순식간에 보천단을 차지하더니, 얼마 안가 만호자에게 그것을 던져 주니 상황이 너무 급변해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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