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263화. 화신부와 보천단
은색 늑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옥패처럼 생긴 물건으로 변해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하필 한립이 옥패를 살피려던 찰나 허공에서 보물을 빼앗긴 청 노인과 극음의 눈에 띈 것이다.
극음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만천명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아래쪽 상황에 관여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한립의 손에 보물이 들어간 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모습을 바꾸는 능력이 있는 보물이 결단기 선사에게 가당하기나 한 물건인가? 사부인 그의 손에 들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을 마친 극음이 시선을 만천명에게 돌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무공을 겨룰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제단에서 또 한 번 요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는 이전에 나왔던 진동보다 더욱 격렬해서 마치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동시에 남색 화염이 구덩이 입구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비록 아주 일부만 노출된 것이지만 화염이 나타난 순간 구덩이 입구를 중심으로 한려대 전체에 화려한 남색 꽃이 피어나는 듯 했다.
촤륵.
땅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얼음과 서리가 신속히 번진 것이다. 화들짝 놀란 한립이 재빨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오축은 잠시 망설이던 사이 남색 얼음이 벌써 두 발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보호하던 현음마공은 남색 기운을 전혀 막지 못하고 있었다.
당황한 그가 당장 날아오르려고 했으나 이미 발이 묶여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으, 으악!”
공포에 질린 그가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얼음은 그의 발목을 지나 종아리로 그리고 다시 허벅지로 올라갔다.
먼저 달아난 한립과 현골이 시선을 마주쳤는데 서로의 눈에서 당황스런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오축이 거의 파란 얼음 기둥으로 변해가려 할 때 허공에서 가느다란 검은 기운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오축의 몸에서 검은 불길이 일어나며 남색 얼음을 녹였다. 얼음이 남색 수증기를 남기며 사라져가는 것을 본 오축은 즉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때 답답하다는 듯 극음의 서늘한 전음이 들려왔다.
“조심하거라. 다음에는 적시에 널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극음 사조가 허공에서 천도시화를 이용해 오축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정마 노괴들이 모두 구덩이에 모습을 드러낸 남색 화염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흥분으로 또 누군가는 긴장과 탐욕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번에 손자를 구한 극음 역시 마른 입술을 적시며 열정적으로 아래쪽을 응시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존재했을지 모를 난성해 제1의 보물 허천정이 결국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때 혈옥지주와 화망은 모두 기진맥진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으니 그것을 바라보는 노괴들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던 것이다.
구덩이 주변은 이미 남색 기운이 범람해 있어 붉은 빛을 내며 이에 대항하는 세 마리 영수들을 제외하고는 노괴들이라 하여도 쉽게 고도를 낮추기 어려웠다.
한립 등 결단기 수사들은 모두 구덩이에서 삼십 장이나 물러나 멀리서 눈으로만 정황을 살필 뿐이었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의 순간, 만호자가 돌연 고개를 들더니 어딘가를 바라보며 일갈했다.
“누가 몰래 숨어 있는 것이냐! 당장 썩 나오지 못할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먹을 날리니 금색 손이 뿜어져 나가 무언가를 잡아채려 했다.
펑!
그러나 청색 보호막이 나타나 금색 손을 막아냈고 그 안에는 하얀 의복을 걸친 누군가가 들어있었다.
“네 놈은!”
“성궁!”
정도와 마도를 가리지 않고 노괴들은 모두 놀란 듯 했고 만호자와 만천명의 안색도 달라졌다.
극음이 먼저 쏘아 붙였다.
“성궁의 집법장로께서 쥐새끼처럼 무엇 하는 짓입니까? 성궁은 영원히 내전 출입을 안 하겠다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백의 장로는 극음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만호자를 보며 차분히 답했다.
“허! 운이 따라주지 않는 날입니다. 허천정이 모습을 드러낼 때 이렇게 엄청난 움직임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려. 한기를 막느라 손을 썼더니 만 형에게 들키고 말았군요. 보아하니 이곳에서 수행이 가장 높은 선사가 바로 만 형인 듯 합니다.”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어서 방금 숨어있다 들킨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에 극음은 화가 치밀었지만 성궁에 함부로 대항할 수 없는 없었다.
청 노인이 성궁 장로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 줄곧 수염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놀라 소리쳤다.
“이런! 또 한 명이 안 보입니다. 혈옥지주와 한립을 보호해야 해요!”
멀리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한립이 일순 얼어붙었다.
그가 완전히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제단의 다른 쪽 허공에서 두 줄기 하얀 빛이 쏘아져 나왔다. 빛줄기는 타 들어갈 듯한 빛을 뿜으며 한립과 혈옥지주를 향해있었다.
한립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빨라! 너무 빨라!’
이것이 하얀 빛을 본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그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방금 얻어 만지작거리며 들고 있던 옥패로 그것을 막았다.
쾅!
한립의 두 손이 엄청난 충격에 순간 감각을 잃었고 앞가슴에 고통이 전해지며 그대로 튕겨 날아가 버렸다. 그의 귓가에 바람 소리와 만호자 등의 고함 소리만이 들려왔다.
몸을 가누기도 전에 등 뒤에서 또 한 번의 극심한 통증이 전해지며 거대한 보호막에 부딪쳐 떨어져 내렸다.
“……!”
방금 하얀 빛 줄기를 내뿜은 성궁 장로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방금 쏘아 보낸 법보 관일검(貫日劍)이 상대에게 적중됐다면 분명 두 동강이 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사지는 멀쩡한 채로 뒤로 튕겨져 나가기만 했다. 필시 엄청난 보물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별 상관하지 않았다. 다른 쪽으로 날려 보낸 비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궁 장로가 서늘한 얼굴로 제단 위를 바라보았다.
거미는 처참한 꼴로 갈라져 있었고 그것이 힘겹게 끌어올리던 허천정의 건람빙염 역시 반절 정도 모습을 드러냈다가 소리 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힘이 다 빠진 두 마리의 불 구렁이로는 아주 잠시밖에 허천정을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과를 확인한 백의 장로가 만족스럽게 자신의 법보들을 불러 모으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정도와 마도 선사들을 비웃었다.
원영기 노괴들은 처음 등장한 성궁 장로에 시선을 빼앗겨 한립이나 혈옥지주를 노린 다른 장로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혈옥지주가 반으로 갈라진 것을 보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미는 것은 물론이고 눈에 불똥이 튀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만호자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두 손을 합장해 몸을 키워 당장이라도 성궁 장로들을 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기습을 가한 성궁 장로가 하얀 빛에 감싸이더니 작은 빛 무리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엔 금빛의 부적만이 남아 떨어져 내렸다.
푸른 보호막 속에 숨어 있던 백의 장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호자가 화를 억누르더니 중얼거렸다.
“성궁의 화신부(化身符)를 쓰다니! 몸을 사려 직접 나타나지 않았으니 어찌 결판을 낸단 말인가…….”
극음이나 만천명 등도 모두 침울한 얼굴로 떨어져 내리던 금색 부적이 재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 * *
내전 5층의 은밀한 곳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던 백의 장로 둘이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그 중 하나가 다행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저 자들의 뒤를 쫓아 천만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허천정을 빼앗길 뻔 했어요.”
다른 하나는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았다.
“일찍 들키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 허천정이 완전히 들어 올려진 후 그들이 서로 뒤엉켜 싸울 때 보물을 갖고 몸을 뺄 수도 있었을 텐데.”
“허허! 너무 과욕을 부리면 안 됩니다. 정마가 보물을 얻을 최고의 기회를 날리게 만든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인 것을요. 다음에 허천정이 나타날 때에는 어차피 성궁의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겠지만 우리 둘 다 그날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보천단이 정말 영근의 불순함을 보충해 천령근을 만들어 주는지 궁금했는데 말이야.”
“아쉽긴 합니다. 허나 저희처럼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은 보천단을 얻어도 늦은 감이 있지요. 누가 퍼트린 우스개인지 보천단이 수명을 늘려줄 뿐 아니라 원영기의 고비를 넘겨 더 높은 경지로 오를 수 있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것을 믿고 저리 몰려 온 것이 우스울 따름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육도나 풍파자는 어찌 이곳에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결단기 선사가 원영을 이루는 데는 큰 효험이 있다고 하나 제련이 너무 어려워요.”
“흥! 결단기 선사야 이곳에 올 능력이 되더냐? 또한 저들도 우리처럼 오랜 세월 노력해도 전혀 진전이 없는 자들이니 이런 것에라도 희망을 걸어보는 거지. 만일 이전 궁주께서 천신만고 끝에 보천단 한 알을 갖고 돌아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아직까지 그리 믿고 있을 것이다.
일단 어서 움직이자 꾸나. 화를 못 참고 저 놈들이 추격하기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
이 말을 끝으로 어둠 속의 소리가 사라졌다.
성궁의 두 장로의 예상대로 그곳에 모여 있는 정도와 마도인들은 너무 열을 받고 실망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도 한두 해 살아온 이들이 아니었기에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성궁에 찾아가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오히려 상대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립 역시 결계에 부딪쳐 떨어져 내렸던 몸을 가다듬고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찢어지고 갈라져 피가 엉겨 붙은 상처가 아니라 오른 손에 쥐고 있는 옥패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때 만천명 역시 헛기침을 해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케아악!
동시에 결국 버티지 못한 화망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허천정을 붙들지 못했다. 허천정이 엄청난 진동과 함께 급속도로 가라앉은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텅!
쐐액.
허천정이 급속도로 하강하는 와중에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 주먹만 한 오색 불빛이 푸른 화염을 뚫고 하늘 위로 솟아오른 것이다.
노괴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보천단!”
보천단의 등장에 대혼란이 벌어졌다.
싸움을 멈추고 서로 타협하려던 이들이 일순 여섯 개의 빛줄기로 변해 그것을 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곧 서로 뒤엉킨 그들은 누구도 앞서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 사이에서 빛이 요동을 치고 마기가 춤을 추었다. 그리고 오색의 빛은 구덩이 입구에 떠서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 잠에 빠진 모습이었다.
모두 오색의 빛 안에 단약 한 알이 굴러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단약이 회전할 때마다 빛이 반짝이는 것이 마치 생명이 있는 것 같았다.
오축과 현골은 넋이 나가 허공에서 벌어지는 대전을 지켜보았다. 그때 오축의 귓가에 서늘한 극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멍청한 것! 어서 가서 보천단을 챙기지 않고 뭐 하는 게냐!”
그제야 정신이 든 오축이 검은 기운으로 변해 보천단으로 세차게 달려들었다. 이때 현골 역시 손을 쓰기 시작했다. 다만 그 대상은 보천단이 아니라 그것으로 날아가는 오축의 등이었다.
오축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는지 녹색 구체가 소리 없이 접근했는데도 기습을 감지해냈다. 그는 계속 나아가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죽고 싶으냐! 감히 날 기습해!”
오축의 현음마기가 귀곡성을 내며 현골을 덮쳤다. 현골 역시 비웃으며 음산한 녹색 기운으로 이에 응했다. 극음이 오축의 상황을 보고는 만호자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만호자!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만호자가 거대한 금색 손으로 만천명을 공격하며 광소했다.
“흐핫핫. 뭐 하다니? 네가 보천단을 독점하려는 것을 막은 게지. 설마 함께 마도에 속한다 해서 보천단을 넘겨 줄 것이라 여긴 것이냐?”
극음의 얼굴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