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
260화. 되돌아오다
“게다가 혈옥지주의 등급이 겨우 이급이었던 금사잠보다 훨씬 높으니 혈옥지주 한 마리가 그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들은 혈옥지주가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극음이 거침없이 분부를 내렸다.
“그럼 시작하시지요. 한립, 거미줄을 분출해 허천정을 끌어올리게 하거라. 내 불 구렁이 두 마리도 혈옥지주를 도울 게다.”
“예!”
“너희 수행으로는 허천정 부근의 건람빙염을 이겨낼 수 없으니 제단을 내려가 있거라.”
극염의 시선이 오축과 현골에서 청역 거사에게로 옮겨갔다.
“제자인 한립은 아무래도 청 형의 도움을 받아야겠습니다.”
노인이 웃음으로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허천정에 있는 보천단을 위해서라도 아무 일 없도록 책임을 지겠습니다.”
오축과 현골은 고분고분 제단을 내려가더니 몇 걸음을 더 물러서고 나서야 멈추었다. 노괴들을 본 한립이 혈옥지주에게 명을 내렸다.
쉭.
동시에 하얀 거미줄이 분출되어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정말 되는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보물을 찾은 뒤에 극음이 다른 원영기 노괴들의 시선을 고려해 바로 자신을 죽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면 아주 미미하게나마 살길을 찾을 기회가 열리는 셈이다.
그러니 허천정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완전 그의 관심 밖이었다.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이후 그와는 무관했기 때문이었다.
한립이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극음이 한립 앞으로 걸어와서는 검은 색 영수대를 꺼내 들었다. 그가 영수대를 풀어 가볍게 털어냈다.
붉은 빛이 번뜩이며 지면에 두 마리의 시뻘건 구렁이가 나타났다.
두 구렁이의 전신은 갑옷 같은 껍질로 덮여 있었고 머리에는 괴이한 문양이 그려져 작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극음은 화망이 나타나자 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검은 환약 두 개가 날아갔고 놀랍게도 구렁이들은 민첩하게 그것을 받아먹었다. 극음이 손가락으로 구덩이를 가리켰다.
“가거라!”
붉은 구렁이들은 여유 있게 구덩이 주변을 돌고 있을 뿐이었다.
극음은 다시 수결을 맺으며 입으로 알아 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워 영수들을 재촉했다. 그러자 놀랄만한 일이 발생했다.
주술이 길어지자 붉은 구렁이들의 몸이 암홍색으로 변하며 전신을 떨기 시작한 것이다.
펑. 펑.
구렁이들이 요동치며 꼬리를 바닥에 내리꽂히자 마치 칼날이 제단을 파고 드는 것처럼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이어 마치 뼈가 없는 생물처럼 몸이 늘어나 머리가 구덩이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꼬리는 구덩이 밖 제단에 고정한 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니 영락없이 붉은 낚싯줄 같은 형상이 되었다.
한립은 놀라 눈이 커졌고 극음은 희색이 만연해 그를 향해 소리쳤다.
“구렁이들이 허천정을 물었으니 어서 끌어 당기거라. 약을 쓰긴 했으나 건람빙염 속에서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으니 서둘러야 한다!”
극염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착취자의 악랄함이 담겨 있었다.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보물을 찾든 찾지 못하든 목숨은 간당간당 하겠지만 네 놈이 보물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겠구나!’
그러나 혈옥지주가 전력을 다해 거미줄을 당기게 시킬 수밖에 없었다. 뒤에 서 있는 만호자나 청 노인이 매와 같은 눈빛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리 없는 명령에 바로 반투명의 하얀 거미줄이 팽팽해졌고 거미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구덩이로 늘어진 구렁이의 몸 역시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쿠콰쾅.
엄청난 소리가 울리며 제단이 요동쳤다. 남색 빛이 현란하게 반짝여 눈이 부셨지만 거미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힘을 쓰고 있었다.
청역 거사가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허천정은 구덩이 깊숙이 가라앉아 있어 혈옥지주와 두 마리 구렁이의 힘에 요동을 쳤을 뿐 더 이상 끌려오지 않았다.
극음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입을 벌려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두 구렁이의 기운을 북돋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만호자를 재촉했다.
“만 형, 혈옥지주에게 어서 광폭술(狂暴術)을 펼쳐 주시죠!”
“걱정 말거라.”
만호자도 이미 예견하던 요청인 것 같았다. 그는 혈옥지주를 보고 입을 달싹거리더니 입에서 붉은 빛을 뿜어냈다.
“흐압!”
만호자의 고함과 함께 붉은 빛이 혈옥지주를 노렸다.
푹.
혈옥지주의 몸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붉은 빛은 핏빛의 안개처럼 흩어져 영수를 그 안에 가두었다.
쉬익! 쉬익!
혈옥지주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무언가에 격동한 것 같았다.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광폭술이라니! 듣기만 해도 후환이 엄청난 마도의 비술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노마들은 주인인 자신에게 묻지도 않고 혈옥지주에게 법술을 걸었다. 아마 법술이 효력을 다하면 거미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결단기 선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직접 겪으니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핏빛 기운이 혈옥지주에게 모두 스며들어가자 원래 투명한 몸을 지녔던 거미가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건…….’
혈옥지주의 이런 변화는 당시 동굴 속에서 그를 공격하던 어미 거미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똑같이 짙은 붉은 색으로 변한 것이 격노했을 때나 보이는 변화였다.
이런 근심 속에 감응을 해보니 혈옥지주가 미친 듯한 동요 속에 조금 이성과 지혜를 상실한 것 같았다. 한립이 놀라 혈옥지주를 안정시키려는데 옆에 선 만호자가 호통을 쳤다.
“어서 혈옥지주를 시켜 끌어올리지 않고 뭐하는 게냐! 광폭술은 시간 한계가 있단 말이다!”
그 말에 화가 치밀었지만 혈옥지주가 더욱 힘을 쓰게 했다.
다행이 미쳐 날뛸 것 같은 상태에서도 주인으로 각인된 그의 명에는 착실히 따라주었다. 눈에 붉은 기운이 스친 이후 놀랍게도 거미줄을 당기며 뒤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콰콰콰쾅.
처음보다 더 거대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이 모습에 만호자 등이 모두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남색 빛이 더욱 강렬해져 제단 위 십여 장까지 치솟았다.
순간 서늘해졌던 몸이 금세 훈훈하게 덥혀졌다. 푸른 보호막이 그를 감싼 것이다. 푸른 기운이 거세진 찰나 청 노인이 자신의 보호막 범위를 넓힌 것이다.
청 노인이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허천정이 정말 올라오는 순간에는 이보다 몇 배는 강렬한 한기가 덮칠 테니 조심하거라. 이전에는 그런 한기에 수많은 선사들이 크게 당했었지.”
분명 한립에게 해주는 이야기였지만 그의 시선은 구덩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청역 거사도 긴장하고 있었다.
한립은 그의 말에 의아해졌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선사들이 허천정을 거의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는 소리였는데 어찌 아직까지 남아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생겼지만 지금은 물어보기에 적합한 순간이 아니었다. 그도 제단 중간의 구덩이에 집중했다.
허천정은 영수들이 전력을 다하는데도 아주 미미하게만 움직였다. 극음 등 원영기 노괴들은 물론이고 오축과 현골 역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돌아가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축은 두 손을 꽉 쥐고 긴장된 마음과 탐욕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리고 현골은 기대와 주저가 섞인 아주 복잡한 심경이었다.
허천정이 끌어올려 질수록 굉음은 커져만 갔고 그곳에 모인 이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한립만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의 혈옥지주를 살폈다.
사실 허천정이 얼마나 대단한 보물이든 어차피 자신에게 떨어질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혈옥지주는 오랜 세월 직접 키워낸 영수였다.
그가 근심을 하고 있을 때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원래 하얗던 거미줄이 은은한 남색 빛으로 물들어 갔던 것이다.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웠지만 분명했다.
촤륵.
의심스런 현상에 자세히 보려는데 뒤쪽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극히 작은 소리였으나 모두가 숨죽이고 있었기에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놀란 그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이곳의 보호막을 뚫으려는 소리였다. 이곳으로 이어지는 계단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마도 노괴들도 당연히 이 소리를 들었다. 만호자가 안색이 변해 바로 영수대를 풀어 노란빛을 풀어놓았다.
빛이 사라지자 온 몸이 노란 반점으로 뒤덮인 표범 형태의 영수가 나타났다. 이 표범은 일반적인 짐승보다 몇 배나 몸집이 컸고 놀랍게도 눈이 세 개나 달려 있었다.
청 노인의 눈에 한기가 감돌았다.
“만천명 무리가 노부의 청극조와 오 선사의 요수를 없애고 돌아왔습니다. 역시 보물을 포기하지 못했군요.”
극음도 얼음장 같은 얼굴로 말했다.
“허천정이 거의 들어 올려 졌지만 그럴수록 흡인력이 강해져 끌어올리기 어려워지니 최대한 시간을 끌어봅시다.”
정도인들이 다시 돌아온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사형 말대로 합시다!”
노인이 전투를 준비하며 소매에서 대량의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 하나하나가 변해 백여 마리의 참새형 요수인 청극조들이 되었다.
겨우 주먹만 한 크기였지만 뾰족한 부리와 강철 같은 깃털을 지닌 새들이 노인의 머리 위를 선회했다. 보기만 해도 엄청난 기세가 느껴졌다.
다른 한쪽에서 극음 역시 수결을 맺어 검은 기운을 불러 일으켰다. 검은 기운이 가시자 곳곳에 열댓 마리의 철갑으로 무장한 요수가 등장했다.
“…….”
만호자는 그 둘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단 아래 있던 오축은 서둘러 원영기 노괴들 쪽으로 다가가 불안감을 표출했으나 현골은 이리저리 상황을 살필 뿐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이때 엄청난 속도의 빛줄기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만천명 등 정도 선사들이 당도한 것이다.
만천명은 제단에서 허천정을 끌어올리는 혈옥지주와 남색 빛이 요동치는 구덩이를 보더니 소리쳤다.
“아주 잘되어갑니다 그려.”
만호자가 바로 눈을 부릅뜨고 일갈했다.
“잘되어가지. 만 문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더 좋을 뻔 했지만 말이오.”
“만 모도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 했으나 어린 친구가 이미 멸종된 지 오래인 혈옥지주를 지닌 것을 알게 되자 그럴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말을 마친 그의 입에서 기이한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만호자 등이 조금 긴장하며 상대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경계했다.
만천명이 서 있던 돌바닥이 돌연 반짝이더니 남색 쥐 한 마리가 솟아올라 그의 어깨 위로 튀어 올랐다. 만법문 문주라는 작자가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만호자 등을 비웃고 있었다.
청연이 쥐를 보고는 외쳤다.
“화석수(化石獸)!”
“내 이 아이를 숨겨놓아 여러분을 감시하지 않았다면 이런 적기에 나타날 리 없었겠지요. 화석수가 별 다른 능력은 없으나 일단 돌 속에 숨으면 쉽게 발견되지 않는 점이 남다르지 않습니까!”
만천명이 한 손으로 어깨 위의 쥐를 쓰다듬더니 혈옥지주를 보며 유유히 말했다.
“제가 두 가지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첫째, 당장 거미를 죽여 영원히 허천정과는 이별한다. 둘째, 마도와 정도 쌍방은 공평하게 허천정의 보물을 나눈다. 어쨌든 허천정을 독점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입장 아니겠습니까?”
“공평하게 나누자?”
그 말에 극음이 얼굴을 구겼으나 조금 구미가 당기는 눈치였다. 어차피 한립의 몫까지 챙길 그는 결국엔 적지 않은 보물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극음이 말하기 전에 맨 앞에 서 있던 만호자가 미친 듯 웃어댔다.
“보물을 나누자니 헛소리하는구나! 이 어르신이 입에 문 고기를 빼앗아 먹겠다니. 간도 크구나.”
말을 마친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표범에게 신호를 보냈다.
크항!
영수가 포효하며 이마의 세 번째 눈에서 황토색 빛기둥을 분출해 만천명에게 날아갔다. 이에 만천명이 고함을 질렀다.
“짐승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그는 만호자가 자신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하리라곤 생각 못했다. 만천명은 서둘러 보랏빛을 내뿜어 황토색 빛기둥을 막으려 했다. 보랏빛이 막 황토색 빛기둥과 마주친 순간 노란빛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