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258화 (15/2,000)

# 258

258화. 의외

막 찌그러진 꼭두각시의 창을 집을 때, 극음 사조의 시선이 슬쩍 이쪽을 보았다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한립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짧은 창들이 상당히 좋은 물건인 듯 했다. 하지만 자신이 필요로 했기에 못 본 척 눈감은 것이리라.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극음이 이후 자신에게 손을 쓸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창을 집으려 숙인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세 원영기 선사가 나서자 이곳 꼭두각시들도 하나씩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3층으로 향하는 전송진에 모두가 올랐다.

* * *

반나절 후 거대한 탑의 5층에 세 선사가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바로 만천명과 다른 두 정도 선사들이었다.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웅장한 높이의 무언가가 우뚝 솟아 있었다. 너비는 백 여 장에 높이는 삼십 여 장인 돌로 만든 대는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면 설 수 있는 곳이었다.

높은 대는 평범한 암석을 깎아 만든 듯 했는데 하얀 빛의 장막이 보호하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계단이 높아질수록 빛이 짙어져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천명이 그 앞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법력이 회복 되었으면 모두 움직이시죠. 천기문(天機門)에서 빌린 조물의(造物儀) 덕에 미리 꼭두각시 호위들을 피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만호자의 탁천마공이 꼭두각시들을 상대하기에는 최적의 공법이니 4층에서나 조금 지체할 뿐 이곳까지 오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천오자 도사가 조금 들뜬 기색으로 동의했다.

“만 형의 말이 옳습니다. 어서 보물을 가지러 가시죠!”

피부가 새까만 농부 차림의 노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만천명은 그런 노인을 개의치 않았다. 비록 볼품없는 차림에 말수도 적었지만 옥단공(玉丹功)이라는 대단한 공법을 익혀 실질적으로는 천오자 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정도 출신이긴 하지만 줄곧 폐관 수련을 하며 거의 교류가 없었고 냉담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만천명은 미소를 지으며 두 선사를 데리고 보호막으로 걸어갔다.

촤륵.

보라색 기운이 스치더니 하얀 보호막에 일 장 높이의 구멍이 생겨 그들을 지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계단을 오른 그들은 그 꼭대기의 남색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계단을 뒤덮은 보호막은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아직 만천명 등이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계단 밑에 만호자와 극음이 나타났다. 물론 다른 이들도 착실히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청역 거사가 돌로 만든 대를 올려다보더니 눈을 빛냈다.

“결국엔 이 괴이한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4층의 금발 꼭두각시는 우리 세 사람이 함께 나서지 않았다면 시간을 더 끌 뻔 했어요.”

극음도 조금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꼭두각시야 예상했던 바이지만 3층의 금제만 아니었어도 더 빨리 도착했을 것입니다.”

만호자가 참을성 없는 말투로 말을 끊었다.

“왔으면 됐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더냐?  만천명 놈들이 들어가 있는 지나 확인해보자꾸나.”

그 말에 극음이 불쾌한 표정을 보였으나 더 무어라 하지는 못했다.

청역 거사가 웃으며 답했다.

“만 형 걱정 마십시오. 저와 오 형이 비법을 운용해 확인해본 결과 만천명 무리는 수 시진 전에 들어가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 계단을 통해서만 한려대(寒驪臺)를 드나들 수 있으니 이곳만 지키면 된다는 뜻이지요.”

“정말이냐?  정도 녀석들이 다른 구석으로 달아났는데 멍청히 이곳을 지키고 있는 꼴은 아니겠지?”

“헤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눈앞의 보호막은 상고 시대부터 명성이 자자한 천강조(天罡罩) 금제라 출입구를 제외하면 단시간 내로 드나들 방법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상황을 지켜보시지요.”

그제야 만호자도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극음과 청역 거사도 자리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립은 모든 이들의 행동을 살피며 속으로 냉소했다.

마도 노괴들의 말도 맞는 말이었으나 만천명처럼 심계가 깊은 이가 이미 예상한 대로 움직여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런 분석을 하며 한립은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다가 현골이 홀로 앉아 보호막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얼굴이었다.

한립은 지금이 다시 상의를 해볼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머리를 굴려 보자 이미 만호자와 연합한 현골 노인에게 자신의 가치가 매우 낮아 졌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마 지금쯤 그는 극음처럼 자신의 혈옥지주를 이용해 보물을 찾아낼 욕심뿐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 서야 굳이 극음을 죽이는 것을 보물을 획득한 이후로 미룰 이유가 없었다. 이런 심란한 마음으로 말을 걸어봐야 괜히 생각만 간파 당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살 궁리는 스스로 해놓아야 할 듯했다.

“……!”

그의 눈에 한기가 스치는데 뜻밖에도 현골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한립은 식겁해 바로 안색을 평안히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골이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며 미미한 의혹감을 들어냈다. 이제 한립은 거대한 보호막 주변을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극음 등도 5층에 왔으니 결단 초기 선사가 도망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다.

잠시 후 그는 홀로 높은 대의 뒤쪽에 서있었다. 보호막 뒤로는 거대한 석회암 벽이 있었던 것이다.

그 벽에는 상고 시대의 요수나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벽은 내전에 들어온 후 무수히 많이 보아서 위쪽에 심오한 금제가 걸려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강력한 금제가 걸린 이 벽을 뚫고 달아나는 것은 원영기 선사라 해도 단시간에 불가능했다.

그것이 이 벽 너머가 내전 밖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 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한립은 이런 엄청난 내전을 건축해 놓고 사라진 고대 선사를 욕하며 아무렇게나 벽을 치고는 돌아서려 했다.

텅!

그의 주먹과 벽이 만나 울린 작은 소리에 이미 세, 네 걸음을 가던 그가 멈추었다. 한립이 묘한 표정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아마 일반적인 수도자가 방금 그 소리를 들었다면 신경 쓰지 않고 갈 길을 갔을 것이다. 그만큼 방금의 울림은 아주 평범했다.

하지만 한립은 강호 문파 출신으로 기관이나 밀실에 대해 일찍이 연구한 바가 있었다. 방금 울림이 귀에 들어온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번뜩 든 것이다.

고계 금제를 설치할 수 있는 고대 선사의 건축물에 놀랍게도 기관이나 밀실에 이용되는 이중 구조의 벽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기민하게 발을 놀려 벽 앞에 섰다.

톡.

그는 방금 주먹으로 내려친 주변의 벽돌들을 하나하나 튕겨보았다.

톡. 팅!

“……!”

막 세 번째 벽돌을 튕기는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 벽에 조각된 조류 요수의 붉은 눈 부위였다.

조각이 신의 경지라고 까진 할 수 있으나 생동감이 넘쳐서 당장이라도 포효하며 날갯짓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새겨진 조각을 훑고는 다시 주변의 벽을 튕겨보았다.

‘확실해!’

분명 벽 너머에 숨겨진 공간이 있으며 그 안에 무엇을 감춰둔 것이다.

한립은 바로 움직이지 않고 의식을 퍼뜨려 노괴들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가 지체 없이 손가락을 들자 푸른빛이 반짝이며 수촌 길이의 검이 나타났다.

석회암 벽을 원형으로 파내고는 푸른빛이 사라졌다. 다른 손으로 그 부분을 밀어내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았기에 생각할 것도 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안의 공간은 넓지 않아서 그의 손에 단번에 무언가가 걸렸다.

“……!”

길고 둥글면서 부드러운 것이 몽둥이 같은 느낌이었다.

손을 구멍에서 빼내자 그것은 뜻밖에도 오래된 누런 두루마리였다. 그는 당장 두루마리를 펴보려다 움찔하며 그것을 품에 넣고는 구멍을 막아버렸다. 멀리서 보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었다.

한립이 막 이런 행동을 마쳤을 때 극음 사조의 음산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한립 당장 돌아 오거라. 지금 움직여야 하니.”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방금 전에 휴식을 취한다 하지 않았던가?  어찌 이리 빨리 움직인단 말인가?  설마 노괴들이 무언가 눈치를 챈 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쪽으로 돌아오자 모두가 고개를 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한립도 시선을 쫓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얼굴이 굳었다. 한립이 도착한 것을 본 극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선 만호자에게 말했다.

“만 형, 우리도 그만 올라가시죠. 만천명의 금사잠이 허천정을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된 것인지 확인을 해보아야겠어요.”

만호자는 답할 새도 없이 보호막으로 걸어갔다.

쿵!

두말 할 것도 없이 탁천마공을 운용한 그가 보호막에 주먹을 내지른 것이다. 보호막에 수 장에 이르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고 만호자가 먼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극음과 청 노인 역시 한립을 가운데 두고 계단을 올랐고 현골과 오축은 마지막으로 보호막 내로 진입했다.

‘너무 춥잖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으나 보호막으로 들어오자 엄청난 냉기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서둘러 보호막을 펼쳐 냉기를 차단했다.

만호자는 다른 이들을 기다릴 생각도 없이 남색 빛이 나는 꼭대기를 향해 돌진했다. 이 모습을 본 극음과 청 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마주치고는 걸음을 서둘러 그를 쫓았다.

한립에게 눈치를 주며 서두르라는 의사 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달아나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품에 넣어둔 두루마리를 열어볼 틈을 주지 않아 한립은 속으로 극음에게 화가 났다.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던 곳은 내전의 가장 고층이었으니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유용한 정보가 담여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극음이 눈치를 주는 것도 모자라 오축도 전음으로 무슨 명을 받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그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현골 역시 의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억지로 속도를 높이던 그가 몇 걸음 더 가기도 전에 느려졌다. 이번엔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계단 끝의 남색 빛에 다가갈수록 냉기가 짙어져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얼어가는 기분이었다. 한립은 창백한 얼굴로 호흡을 멈추고 폐부로 냉기가 스미는 것을 막았다.

이때 다시 극음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네게 준 백서패는 열기뿐 아니라 한기도 막아준다. 이럴 때 쓰지 않고 뭐하는 게냐!”

그제야 생각이 난 한립이 저물대에서 백서패를 꺼내 허리에 매달았다. 역시 백서패에서 하얀 빛이 돌기 시작하니 주위가 한결 따뜻해졌다.

이제 여유가 생긴 그는 걸음을 재촉하면서 다른 이들은 이 한기를 어찌 피하나 살폈다.

만호자 등 원영기 선사들은 그저 보호막만으로 태평하게 걸어가고 있었고 현골은 목에 붉은 빛이 반짝이는 구슬을 하더니 한기를 느끼지 않는 듯 했다.

또 그의 뒤에 바짝 붙어선 오축은 어깨에 뱀 문양 완장에서 분홍빛이 뿜어져 나와 그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멀쩡한 모습을 확인한 그는 시선을 거두었다.

이미 한려대의 끝에 도달해 소형 제단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제단 위에는 여덟 개의 금빛이 요동을 쳤고 그 가운데에 눈을 찌를 듯한 남색 빛을 뿜어내는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다.

한립은 정신이 번쩍 들어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금빛의 중간에는 놀랍게도 청록색 누에가 있었는데 손가락 굵기의 금색 실을 뿜어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매번 금빛이 빛날 때마다 구덩이 속의 남색 빛도 요동을 치는 중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