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257화. 2층
모두가 전방의 석회암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그때 앞에서 둔중한 울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연달아 들리는 것이 거대한 체구의 무언가가 그들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 했다.
극음 사조와 청역 거사가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져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만호자는 오히려 웃음을 흘리며 좋아했는데 동시에 온몸에 금빛이 돌며 금색 비닐이 돋아 온 몸을 보호했다. 탁천마공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립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탁천마공을 처음 보는 터라 그의 변화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나 만호자의 민감한 의식에 그의 시선이 걸렸는지 돌연 고개를 돌려 한립을 바라보고 웃었는데 그 웃음이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에도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한립은 그저 미소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만호자는 다시 그를 주시하지는 않았다.
이제 둔중한 걸음 소리는 더욱 가까워져서 삼심 장 내로 진입한 듯 했다. 전면의 통로는 칠흑같이 어두워 한립은 무엇이 접근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분명 금제가 작동돼 선사들의 의식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다만 극음 사조 등 노괴들의 눈빛이 달라진 것이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흐압!”
극음과 청역이 움직이기도 전에 만호자가 돌연 치고 나갔다.
훼엑.
쩡!
그가 바람처럼 사라지더니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극음과 청역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황을 지켜보았다.
쨍강!
보이지는 않았지만 계속되는 날카로운 소리가 무언가 박살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게 해주었다. 한립도 무언가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어둠 속이 다시 고요해지더니 만호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극음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보시지요. 잊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지도 벌써 30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우리 수준에 1층을 수호하는 것들이야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청역 역시 한결 편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니 말입니다. 이 노부도 그것을 잊고 긴장했습니다. 저번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원영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아 1층도 힘든 곳이라는 인상이 깊었나 봅니다. 하지만 만 형의 탁천마공이 저것들을 상대하는데 상극이라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리 우리라 해도 시간을 좀 허비했을 텐데요.”
둘은 만호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한립과 오축이 따랐다. 본래 무표정을 유지하던 현골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긴 했으나 역시 차분히 걸음을 옮겨 따라갔다.
십여 장을 더 가자 그제야 뒷짐을 쥐고 서있는 만호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발밑에는 은빛이 반짝이는 것들이 한 더미 쌓여 있었다.
만호자가 극음과 청역을 보더니 담담히 입을 열었다.
“몸을 덥히기에 적당한 것들이로군. 허천전 내전도 재미있어지겠어. 헌데 듣던 것보다 위력이 너무 약한 것 아닌가?”
청역이 미소를 띠고 답했다.
“만 형의 탁천마공이 대단한 것이지요. 이렇게 협소한 공간에서 법보로 싸우려 했다면 조금 성가셨을 겁니다.”
만호자도 상대가 자신을 치켜세우자 웃음을 흘릴 뿐 더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있던 금색 비늘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걸어가기 시작했다. 방금 일전의 여운이 남아 몸을 더 움직이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극음과 청역이 시선을 교환했다. 만호자가 자진해서 길을 터주겠다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은색 물체를 지나던 한립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기관으로 만든 꼭두각시!’
역시 그의 예상대로였다.
도대체 어떤 등급의 꼭두각시길래 원영기 수사와 겨룬 것인지 너무 궁금해졌다. 은색의 이름 모를 금속과 늑대 형태를 하고 있는 머리통 그리고 새까만 무광의 도까지 여러 물체가 난잡하게 쌓여 있었다.
현골이 그를 스치며 중얼거리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쳐 갔다.
“볼 것 없다. 분명 희귀한 재료는 맞지만 법보를 제련하는데 쓸 수가 없거든.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실험해본 바다.”
한립은 조금 굳었으나 마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바닥만 쳐다보았다. 쌓여 있는 물체들 사이에는 청록색 보석 같은 것이 있었는데 한기를 발산하는 것이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잠시 탄식한 그는 고대 선사들이 만든 꼭두각시의 구조나 제련법이 담긴 물건들이었기에 살펴볼 가치가 있다 여겨 눈에 띄는 대로 재료들을 집어넣고 다시 일행을 쫓아 걸어갔다.
그가 지닌 괴뢰경전의 최상층인 사급 꼭두각시라도 겨우 축기 후기 선사들 수준이었다. 이전에 보았던 중계 영석 하나에 한 번씩 공격을 하던 초대형 꼭두각시가 바로 사급이었다.
그런데 늑대 머리 꼭두각시는 분명 결단 후기의 수준은 넘어섰다. 만호자가 장난감처럼 부수었지만 극음과 청역이 처음에 긴장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이런 수준급 꼭두각시를 연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으로는 석실에 들어가 보물을 취득할 기회도 전무했다.
원영기 노괴 셋이 앞에서 걸어가고 있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을 테니 아무리 조심스레 접근한다 해도 눈치 챌 것이 뻔했다.
한립의 성격에 보물이 가득한 이곳을 맨 손으로 벗어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던 것이다. 그러니 망가진 꼭두각시들이라도 쓸어 담아 위안을 삼고자 했다.
1층에서 첫 번째 늑대 머리 꼭두각시를 만난 이후 연달아 비슷한 종류의 꼭두각시들이 출몰했지만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하는 만호자의 탁천마공 앞에선 진흙인형처럼 부서져 나갔다. 아예 극음이나 청역 거사는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한립은 매번 꼭두각시들의 잔해를 쓸어 담았다. 이런 행동에 오축과 현골은 눈치를 주었고 만호자 등 노괴들은 못 본 척했다.
만천명 등 정도인들은 다른 길로 탑을 오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나 극음 등이 차분한 것으로 보아 대략적인 행적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행은 첫 꼭두각시 경비병을 만난 이후 직진하기 보다는 이리 저리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립으로서는 이상하게 여겨지는 행동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모든 길이 똑같았는데 원영기 선사 셋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길을 택해 좌로 꺾고 또 우로 꺾고를 반복했다.
만일 300년 전에 와보았던 극음이나 청역 거사가 이리 행동했다면 그나마 덜 이상했을 텐데 둘은 내전에 들어온 이후 만호자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에 처음 와본다는 그가 길을 이끌고 극음과 청역이 뒤를 따르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한립은 길을 가며 이상한 표식이나 다른 점이 있는지 살폈다.
그들은 만호자의 맨주먹에 여덟 마리의 늑대 머리 꼭두각시들이 박살나고서야 소형 전송진 앞에 당도 할 수 있었다.
전송진은 십자 형 도로 중간에 위치해서는 은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청역 거사가 투덜거렸다.
“이제부터 2층이군요. 정도 녀석들이 무슨 수작을 부려 아직도 우리를 앞지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만호자가 서늘히 말했다.
“흥! 앞서가면 또 어떻겠느냐. 허천정이 그리 간단히 얻어지는 물건도 아닌데.”
말을 마친 그가 거침없이 전송진 안으로 들어갔다. 청역이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만호자가 들어간 후 청역과 극음은 그 뒤를 따르지 않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립을 돌아보았다. 한립은 그들의 시선에 한기가 도는 듯 했다.
두 노괴의 눈빛 속에 억지로 전송진에 오르자 하얀 빛이 발산되며 전송이 이루어졌다. 몸을 가눈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고는 얼굴이 굳었다.
1층과 똑같은 십자 형 도로에 똑같은 석회암 길이어서 만호자가 뒷짐을 지고 서있지 않았다면 전송이 실패한 줄 알았을 것이다.
그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다시 전송진이 빛나며 극음 등 다른 이들이 걸어 나왔다. 극음 사조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좋지 않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무슨 방도로 이리 빨리 달아나는 걸까요? 이제 완전히 종적을 놓쳤습니다.”
청역 거사가 그의 뒤에서 서늘히 답했다.
“됐습니다. 어쩐지 내전 밖에서 이상한 제안을 하더라니 우리가 당한 듯 합니다. 허나 그들이 먼저 간들 어떻겠습니까? 겨우 금사잠을 데리고 허천정을 얻으려 하다니 멍청한 생각입니다. 게다가 운이 따라주어 먼저 보물을 찾아낸다 해도 매복을 하고 있다 빼앗아도 늦지 않겠지요.”
“청 형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서두르시죠.”
청역 거사가 이번엔 만호자를 향해 말했다.
“이번 층의 뱀 꼭두각시들은 상대하기 까다로우니 만 형도 조심하시지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저와 오 선사가 돕겠습니다. 정도 놈들에게 더는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뱀 꼭두각시라니 재미있겠구나! 너희들 뜻대로 하거라.”
이렇게 마도 일행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층과 2층의 다른 점이 드러났다. 십자 형태의 사거리의 출현 빈도가 훨씬 낮아졌고 길에 강력한 금제나 함정 등이 파여 있었던 것이다.
이런 위험 요소는 만호자 등 원영기 노괴들에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결단기 선사들에겐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노괴들 뒤에서 걸어가던 한립은 등 뒤로 한두 번 식은땀이 흐른 것이 아니었다.
그가 홀로 내전의 2층에 진입했다면 금제와 함정에 의해서 벌써 죽었을 것이다. 한립이 2층의 다섯 번째 문을 지날 때에야 결국 청 노인이 말하던 뱀 꼭두각시가 등장했다.
꼭두각시의 외형은 무척 위협적이었다.
길게 찢어진 푸른색과 붉은색의 작은 눈에 몸통의 전면과 후면에 솟은 네 개의 팔 그리고 검은 비늘이 섬뜩한 인상을 주었다.
또한 앞쪽의 두 손에는 2개의 푸른 창을 쥐고 있었고 뒤쪽의 두 손에는 갈고리가 덕지덕지 붙은 검은 채찍이 들려 있었다.
쉑!
뱀이 만호자 등을 발견하자마자 검은 빛줄기로 변해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극히 민첩했다. 탁천마공을 운영한 만호자의 광소가 터져 나왔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뱀 꼭두각시의 동작이 정말 신출귀몰해서 손에 쥔 창과 채찍을 움직여 만호자의 강철 같은 몸을 옭아 맨 것이다. 비록 그의 몸에 타격은 입히지 못해도 법보를 꺼내지 않은 그로서는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푸른 창은 만호자의 금색 손에 두들겨 맞고도 변형만 되었을 뿐 두 동강 나지 않았다.
“……?”
만호자도 그 모습에는 조금 놀란 듯 했다. 이때 뒤에 있던 극음 사조와 청역 거사가 나섰다.
극음 사조는 이전에 한립이 쓴 맛을 본 천도시화를 사용했다. 새까만 불덩이가 중년인의 손에서 떠올라 쏘아져 나간 것이다.
쾅!
그러자 만호자의 탁천마공을 상대하느라 도망갈 수가 없었던 뱀 꼭두각시의 팔 하나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다른 쪽에 있던 청역 거사도 입을 벌려 푸른빛을 분출시켰다.
포포포폭!
푸른빛은 꼭두각시를 한 바퀴 돌더니 잠시 후 자잘한 폭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뱀 꼭두각시가 균형을 잃고 흔들거렸다.
만호자가 그 기회를 틈타 꼭두각시의 가슴에 금빛 손을 찔러 넣더니 생으로 청록색 보석을 뽑아냈다. 이에 뱀 꼭두각시가 능력을 잃고 고꾸라졌다.
만호자가 영력을 잃은 꼭두각시와 손에 든 청록색 보석을 번갈아 보더니 분노한 표정이 스치며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당연히 가루가 되어 흩날리리라 여겨졌던 보석이 그가 손을 펼쳤을 때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평소 험악하기 그지없던 만호자의 표정이 약간 달라졌다.
탁천마공을 운용한 금빛 손에 걸리면 웬만한 보물은 물론이고 영성이 충분한 법보도 단번에 찌그러졌다. 조금 급이 떨어지면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가 우두커니 청록색 돌을 내려다 볼 때 청역 거사가 웃으며 다가왔다.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만 형! 이 괴이한 돌은 벌써 이전 선사들이 가져다 실험을 해보았는데 엄청난 강도를 가해도 부술 수 없을 뿐 아니라 녹여서 제련에 쓸 수도 없어 쓸모가 없다는 것이 입증 되었지요.
아마 상고 시대의 고대 선사들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다룰 수 있는 이가 없을 것 입니다. 심지어 꼭두각시 제련을 전문으로 하는 종파에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 하더군요.”
만호자는 방금 보인 난감한 기색을 숨기려는 듯 돌연 한립을 향해 그것을 던졌다.
“고대 선사의 물건들은 하나 같이 비정상적이야. 네 녀석이 이런 고물들을 좋아하는 듯 하니 가지거라.”
당황스런 와중에도 한립은 착실히 그것을 받아냈다. 그는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저물대에 청록색 돌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서 이번 뱀 꼭두각시의 잔해도 거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