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256화. 사마귀와 참새
한립의 모습을 보자 극음의 눈에 희색이 비치는 것은 물론 만호자와 청역 거사도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한립은 전송진을 나서자마자 앞에 있는 원요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담담히 미소를 짓고는 극음 사조 등이 있는 곳으로 가 예를 취했다.
이런 예의 바른 모습에 극음도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당장 파라주를 돌려주라는 등의 말은 삼가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만호자와 청역 거사도 갑옷이며 부보를 빌려준 사실을 잊은 척 했다.
한립이 나타났으나 노괴들은 여전히 앉아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무언가가 벌어지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한립은 눈앞의 거대한 탑에 놀라고 있었다.
‘상상한 것과 너무 다르잖아.’
그리고 틈을 보아 현골 쪽으로도 시선을 주었다.
그는 얌전히 가장 뒤쪽을 차지하고 앉아 한립의 시선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듯한 얼굴로 있었다.
현골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역도 놈이 발견하기 전에 그만 보거라, 이 녀석아! 어찌 극음 놈을 처리할지는 이미 다 계획을 해두었으니 걱정 말고. 혈옥지주로 보물을 획득한 뒤에 움직일 것이니 그 전까지는 그들의 뜻을 따르거라. 함부로 전음을 보내 들키지 말란 말이다.”
그를 달래면서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그의 전음을 듣고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의혹이 생겨났다.
‘보물을 획득한 뒤에 움직인다고? 설마 저 늙은 마두도 허천정을 노리는 것인가? ’
보물을 획득하는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전의 개방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성궁 녀석들이 보이지 않다니. 이번 난전에는 끼지 않을 모양입니다. 만 형의 의견은 어떠한지요?”
다른 두 선사 사이에 앉아 있던 만천명이 두 눈을 뜨고는 만호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만호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유유히 답했다.
“헤헤! 어찌 긴장이라도 되십니까. 기다려 보면 알 것 입니다. 성궁의 교활함이야 익히 알려진 바이니 마지막 순간에 모습을 드러낼 지도 모르지요. 우선 우리 둘이 일전을 벌이기를 고대하고 있을 지도요.”
만천명은 그 말에 냉소했으나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쿠쿠쿵.
한 시간이 넘게 흐르자 돌연 땅이 진동하기 시작하며 내전의 거대한 석문이 열리고 석회암 통로가 드러났다.
멀리서 보아도 그 안은 광활하기 그지없었다. 내전의 문이 개방되는 동시에 선사들 가운데 있던 전송진도 사라져 버렸다.
만호자가 만천명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발을 해왔다.
“하하! 보아하니 성궁 녀석들은 정말 안 오려나 봅니다. 그럼 만 선사 우리 둘이 먼저 겨루어 지는 사람은 아예 내전에 들어가지 않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만천명이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글쎄요. 저는 만 형과 그리할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럴 마음이 없다니.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를 인정하겠단 게요?”
“패배를 인정할 리 없지요. 하지만 보물을 찾기도 전에 싸움부터 하는 것은 너무 우습다 여겨지지 않습니까? 일단 보물을 찾기 전까지 서로를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쨌든 지금의 가장 큰 적은 성궁이지 서로가 아닌데다가 이리 자신만만하게 왔어도 보물을 얻지 못할 확률이 반반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싸울 이유가 없지요.”
극음과 만호자 그리고 청역이 의외라는 얼굴을 하더니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만천명, 천오자 등 정도인들은 이미 상의를 끝내 평안한 얼굴로 마도인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극음이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말은 그럴 듯 하지만 누가 먼저 시도할 것인지는 어떻게 정할 것입니까? 그리고 한쪽이 보물을 획득하면 강탈해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보장할 것입니까? 설마 세치 혀만 믿으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만천명이 주저 없이 답했다.
“극음 쓸 데 없는 소리 말거라. 당연히 그쪽에서 먼저 보물을 찾는다면 우리는 빼앗으려 들 것이고 우리가 보물을 찾는다 해도 그쪽도 마찬가지겠지. 일단 보물이라도 찾아놓고 기량을 겨루어도 늦지 않다는 말이다.”
극음은 잠시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화를 억누르고 만호자 등과 전음으로 상의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만천명을 상대로 냉랭히 외쳤다.
“그럼 잠시 일전을 미루고 보물을 찾은 후에 이야기 하시지요!”
“현명한 선택이다. 그럼 들어가지.”
말을 마친 그는 바로 거대한 석문으로 걸어갔고 천오자와 농부 차림 선사도 그 뒤를 쫓았다.
“흥!”
만호자는 상대의 거침없는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돌연 시선을 원요와 다른 결단 후기 선사에게 돌렸다.
동시에 그 둘도 불길한 느낌을 받았는지 바로 노란빛과 붉은빛으로 변해 석문을 통과해 달아나려 했다.
만호자가 흉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감히 어딜!”
그가 두 팔을 오므렸다 펴니 두 줄기 금빛이 그들에게 쏘아져 나갔다. 그 결과 사내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렸는데 금빛에 휘감겨 조각조각이 난 채였다.
다른 한쪽으로 날아간 금빛도 붉은 빛을 따라잡았다. 하지만 눈을 찌르는 듯한 녹색 화염들이 터져 나오며 금빛을 흩었다.
붉은 빛 속의 선사는 공격에 자극을 받았는지 거의 유성처럼 쏘아져 나가 사라졌다. 청역 거사가 만호자의 행동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다가 뜻밖에 한 명이 달아나 버리자 놀란 기색을 표했다.
“음? 이상하구만.”
천오자 역시 이 광경을 보고 불쾌하다는 기색으로 물어왔다.
“이 무슨 짓이오! 어찌 무고한 선사들에게 살수를 펼치는 것이오!”
만호자가 노인을 힐끗 보며 명쾌히 답했다.
“기분이 좀 불쾌해 몇 명을 죽였다면 어쩔 테냐? 설마 방금 죽은 선사를 대신해 내 탁천마공 맛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닐 테고.”
“만호자!”
만천명이 고개를 돌려 노도사를 말렸다.
“됐습니다. 어차피 공격당한 선사들이 정도인들도 아니니 지금은 거사를 신경 쓸 때입니다.”
만천명의 만류에 천오자도 만호자를 노려보더니 결국엔 몸을 돌려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도인들도 대문을 지나 내전으로 진입했다.
극음 사조가 멀어지는 그들을 보고는 만호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잘하셨습니다. 괜히 거사를 앞두고 쥐새끼들이 돌아다녀 봐야 거슬릴 뿐이지요. 분명 어부지리를 노리는 놈들일 테니 성가신 일을 벌이기 전에 처리하는 것이 옳지요. 헌데 아직 한 명이 더 남았는데 어찌 없애지 않으십니까?”
그의 시선이 현골에게 닿아 있었다.
현골은 그 말을 듣고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아예 자신 이야기가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만호자가 무표정하게 의외의 말을 꺼냈다.
“저 자는 은인의 후인이라 살려둔 것이다. 너희 둘도 건드리지 않아야겠지?”
극음이 만호자와 현골을 번갈아 보더니 확실히 자신이 아는 자가 아님을 확인하고는 웃으며 답했다.
“만 형과 인연이 있는 후배를 어찌 건드리겠습니까. 다만 만 형도 빚을 질 때가 다 있다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감히 나를 떠보는 것이냐?”
“그럴리가요. 정말 그저 궁금해 물은 것입니다. 하지만 방금 달아난 흑의 계집은 정체가 수상하니 조금 조심해야겠습니다.”
“나도 장님은 아니다. 방금 계집이 쓴 것이 삼양노마(三陽老魔)의 청화뢰인 것을 모르겠느냐? 삼양노마의 측근이 아니고서는 그런 물건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겠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 계집이 살아서 달아나게 두었겠느냐.”
극음 사조는 만호자가 유쾌하지 않은 기색을 보이자 노련하게 말을 삼갔다. 청역 거사가 한쪽에서 대화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계집이 정말 삼양노마와 어떤 관계인지는 관계없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정마가 성궁과 난성해의 패권을 두고 다툴 중요한 시점이니 괜한 원한을 만들 까닭이 없지요. 노마의 능력에 비록 마도 출신이라지만 중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저 계집은 살려두는 것으로 하지요.”
사실 삼양노마를 꺼리던 만호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일련의 사건에 한립은 마음이 복잡해졌고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결단기 선사를 개미 밝아 죽이듯 살해하는 만호자의 모습도 그랬고 그 공격을 피해 달아난 원요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현골은 언제부터 만호자를 끌어들인 것인가?
원요는 삼양노마라는 이와 연관된 인물인 것 같았는데 그가 누구길래 만호자도 쉽게 원한을 만들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연이은 질문들이 답을 찾지 못하고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조용히 마도인들의 대화를 들으며 필요한 정보를 모으는데 집중했다.
“어서 내전으로 들어가시죠! 정도 녀석들을 감지 할 수 없는 것이 심상치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청역 거사가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그 말에 만호자도 석문을 보더니 바로 몸을 움직였다. 극음과 청역 거사도 그 뒤를 따랐다.
한립과 오축 그리고 현골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석문을 지나 자취를 감추 자 그들이 떠난 후 빛을 잃었던 전송진에서 빛이 분출되며 두 선사가 걸어 나았다.
바로 성궁의 백의 장로들이었다! 사방을 둘러본 그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자 안심한 기색이었다.
그 중 하나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 들어갔나 봅니다. 노괴들이 아무리 간교해도 성궁이 천 년 전부터 이곳 전송진의 금제를 풀었다는 사실은 모르겠지요. 언제든 내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도요.”
“가지!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허천정이 그들 손에 떨어지지 않는 한 들켜선 안 될 것이야.”
“당연히 그래야지요.”
두 사람도 하얀 빛으로 변해 석문을 통과했다.
* * *
한립은 극음 사조의 뒤에서 걸었으므로 자연히 오축과 나란히 갈 수 밖에 없었다.
한립의 마음은 불편했으나 극음이 오축에게 무어라 했는지 그의 태도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아주 친절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립을 친밀하게 대했던 것이다. 이전의 질투와 혐오어린 시선은 없어진 듯했다.
하지만 이런 뻔한 수작에 한립의 마음은 더욱 서늘해졌다.
‘극음 노마가 오축에게 이후 날 없애버릴 거라고 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변할 수가.’
비록 마음속으로 근심이 가득했으나 한립은 미소를 띠며 오축의 물음에 응했다. 극음과 만호자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내전에 들어온 후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이 탑에 들어오고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한립은 의문을 품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금 그들은 일종의 미로 같은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높고 두꺼운 담으로 사방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사거리도 있었고 방원형 석문도 뚫려 있었다.
석문들의 모양과 크기는 일정했지만 어떤 때는 남쪽 또 어떤 때는 북쪽으로 뚫려 있어 어떤 규칙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윗부분에 하얀 빛이 나는 것이 금제가 걸려있는 듯했다.
비록 십자형 길은 자주 나타나지 않았으나 방원형 석문은 적어도 예닐곱 개를 지나쳐 왔다. 그들이 가지 않은 길의 문까지 따지면 상당히 많은 문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데 또 하나의 방원형 석문이 나타났다.
그것은 다른 문들과 달리 고대 문자가 새겨진 상부에 빛이 나지 않았다. 아마 금제가 깨진 듯 했다. 그가 의아한 시선으로 석문을 자세히 살피자 오축이 한립의 표정을 보고는 설명해 주었다.
“한 사제, 저 석문은 이미 누군가 보물을 가져간 것 같아. 모두 수중의 허천전 지도를 가지고 단 하나의 석실만 열수 있는데 보물을 얻는데 실패하든 성공하든 허천전 밖으로 전송되어 버려서 다시 내전으로 들어올 수 없거든.
그렇지만 않았다면 나도 석문 하나를 골라 도전해 봤을 텐데! 게다가 결단기 선사의 경우 그저 1층의 보물 정도만 시도해 볼 수 있어. 층이 높아질수록 보물을 얻으려다 죽을 확률이 높아지지.”
‘한 사제? ’
처음 듣는 칭호는 아니지만 그것이 오축 입에서 나오니 너무 낯설고 불편하게 들렸다. 하지만 표정 관리에 탁월한 한립은 항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 형, 그럼 하나 택해서 시도해 보시지요. 어쨌든 2층으로 올라가면 영영 기회를 잃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 그러니 말아야. 하지만 할아버님께서 절대 곁을 떠나지 말라 하셨는걸. 아마 보물을 획득하는데 내가 도움을 될 일이 있는 것 아닐까?”
한립은 이야기를 하며 눈으론 석문들을 주의 깊게 보아두었다. 보물을 취하면 외부로 전송된다니 이후 이것을 이용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