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
255화. 세 번째 관문
쿵!
잠시 후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오른쪽 벽에서 핏빛 충돌이 일었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립은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방금 전력을 다하지도 않고 가장 기본적인 부유술로 이동을 해보았는데 순식간에 벽에 부딪칠 정도로 움직였던 것이다.
믿기지 않아 몇 번 더 시도를 해보니 역시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속도로 이리 저리 처박히며 몸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이 망토를 걸치면 놀랄 만한 속도로 움직일 수는 있으나 속도를 조절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한립은 제자리에 서서 한참 말이 없었다.
‘너무 괴이하지 않은가!’
빛처럼 쏘아나가는 속도로 보아 위기에 순간에 그의 생명을 구해줄 동아줄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속도라면 원영기 선사가 쫓아와도 일정 시간 동안은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단점도 만만치 않았다. 영력 소모가 큰 것은 당연했고 길들여 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통제가 불가능 했다. 하긴 조금 흠이 있기 때문에 이런 최상급 고보가 외전에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달아나는데 이것만한 것은 없었다.
한립은 복잡한 마음으로 피풍의를 거둬들이고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어 두 눈을 감고 요양에 들어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보로 인한 법력 손실이 커서 당장 석실을 나서기 꺼려졌던 것이다.
한번 눈을 감자 반나절이 지나버렸다. 충분히 법력을 보충한 그가 차분히 몸을 일으켜 네모난 통로로 걸어갔다. 그는 팔에 건 파라주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대연결을 운용한 채 통로로 진입했다.
처음 든 생각은 통로가 무척 짧다는 것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마자 바로 통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눈앞이 밝아지며 뜻밖에도 하늘을 가르는 회랑이 등장했다. 회랑은 아름다웠고 또 아득히 이어져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회랑 옆으로는 하얀 구름이 떠있고 산세가 수려한 것이 신선이라도 튀어나올 법한 절경이었다. 이런 모습을 눈에 담은 한립이 냉소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번 관문도 비행을 할 수 없었고 걸어가야 하는 금제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회랑의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신선 세계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한층 진해진 느낌이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한립은 조소했다.
“쯧!”
혀를 찬 그는 그저 앞으로 차분히 나아갔다. 마치 제집 정원을 거니는 듯한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그가 나아갈수록 산세는 더욱 장관이었고 귓가를 울리는 아름다운 가락도 뇌리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구름을 뚫고 하얀 두루미 떼가 날아오르니 시선을 빼앗기기 적합했다.
한립은 모든 것을 힐끗 보고는 전혀 개의치 않고 길을 걸었다.
그가 점점 멀어질수록 노랫가락은 더욱 크게 울려 퍼졌고 춤을 추며 날아오르던 두루미 떼도 회랑 양편으로 날아왔다.
잠시 후 하얀 두루미 떼가 왜곡되더니 각양각색의 궁장차림을 한 소녀들로 변했다. 모두 겨우 열예닐곱 살 정도의 고운 얼굴로 활력이 넘쳤다. 그녀들은 나긋나긋한 걸음으로 한립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들의 열렬한 눈빛과 행동은 마치 한립을 낭군으로라도 여기는 것 같았다.
돌연 노랫가락도 점차 느려지며 주변이 만월이 뜬 그윽한 밤으로 변하였다. 보기만 해도 감성을 자극하는 그런 배경이었다.
한립은 양쪽에서 무어라 말하는 소녀들을 무시하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수십 장을 걸어가자 귓가의 음성이 또 변해 애절하거나 원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소녀들은 안색을 바꾸고 원한을 담아 노려보는데 이제는 아주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한다는 기색이었다.
‘재미있네.’
한립은 그저 웃으며 소녀들의 표정을 감상했다. 마치 웃긴 연극을 보는 듯 했다.
그도 환각이 이어지는 이번 관문이 귀무와 빙화도 이후에 등장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이런 자잘한 환영 외에도 다른 위험한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거침없이 나아가자 풍경이 또 바뀌어 소녀들이 순식간에 나이를 먹어 요염하고 굴곡진 몸매를 지닌 여인으로 자라났다.
절세가인들은 뜨거운 눈으로 그를 주시하며 도발적으로 옷을 벗어 제겼다. 하얗게 드러난 풍만한 신체는 사내라면 누구라도 눈이 갈만한 유혹거리였다. 또한 그녀들이 소근 거리는 요사스런 말들은 듣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한립이 일순 멈칫하다가 대연결을 운행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과연 엄청난 미혼술이었으나 그런 것에 당할 그가 아니었다.
회랑의 양쪽으로 늘어선 여인들은 더욱 대담해 져서 그를 향해 온 몸을 흔들어대는 등 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흠…….”
대연결로 완전히 미혼술을 방비하고 있는 한립은 그저 좋은 구경을 한다는 마음으로 그녀들을 감상했을 뿐이었다.
이후 여인들은 다시 모습을 바꿔서 각양각색의 미녀로 거듭났다. 콧대 높은 귀부인부터 열정이 넘치는 기녀 또 청순가련한 소녀까지 온 세상 미인들은 모두 쏟아놓은 꼴이었다.
한립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눈빛만은 서늘한 것이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시각적으로 나마 미인들을 실컷 즐긴 그가 결국엔 회랑의 끝에 다다랐다.
그러자 눈앞에 궁전이 나타났고 큰 대문을 시작으로 검은 담벼락이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문은 십여 장 높이였는데 안을 들여다봐도 거무튀튀할 뿐이라 들어가기가 심히 꺼려지는 곳이었다.
그가 대전을 바라보자 동시에 회랑 주변도 순식간에 뒤집혀 하얀 구름이 떠있는 본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립은 회랑의 변화는 신경 쓰지 않고 대문에 집중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미간을 좁힌 그는 안력을 북돋았다.
그러자 궁전 안에는 검은 기운뿐만 아니라 붉은 기운이 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악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팔짱을 낀 채로 대문 앞에 멈춰선 한립이 생각에 잠겼다.
비록 다른 이들에게 자세히 듣지는 못했으나 겉모습만 보아도 궁전 안은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심을 시험하는 곳이 틀림없었다. 그에겐 방금의 유혹보다 훨씬 어려운 곳이었다.
스스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이 자신이었다.
그는 두려운 것 없는 사내대장부도 아니었고 세상의 진리를 꿰뚫은 성인도 아니었다. 그저 좋은 머리를 굴려 지금까지 살아남은 범인에 불과한 선사였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를 직면하면 머리가 새까맣게 변해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보아하니 파라주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였다.
결심을 하고 한립은 손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너무 어두워!’
막 궁전 안에 들어섰을 뿐인데 답답할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이 엄습해 온 것이다. 어떤 금제를 설치했는지 몰라도 한립의 안력에는 겨우 삼 장 거리가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물론 의식을 퍼뜨려 탐색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밝을 때는 그나마 나았지만 적막 속에서 어둠을 걷자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축인 그가 손에서 화구를 뿜어냈다.
푸슉.
하지만 불꽃이 막 타오른 순간 스스로 꺼져버렸다. 한립은 달갑지 않은 마음에 이번엔 저물대에서 월광석을 꺼내 보았다.
그러나 월광석도 저물대를 나서자 빛이 사라지더니 보통의 돌처럼 변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기는 했으나 어린 여인의 울음소리 같았다.
한립은 냉소하며 그저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아무리 멀어지려 해도 울음소리는 더욱 커지고 선명해져서 마치 그의 뒤를 쫓는 느낌이었다.
“하아!”
한립이 아무래도 마음이 심란해졌는지 한숨을 내쉬자 돌연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이런 결과에 만족한 그는 더욱 속도를 높여 궁전을 통과하려 했다.
그가 수 장을 가기도 전에 아까 전의 흐느낌이 재현되더니 그 앞에 뿌연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주저앉은 여인은 상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비통하고 애절하던 울음소리는 그녀에게서 들려오던 것이었다. 한립은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이런 환각이 궁전의 금제가 불러일으킨 거라면 돌아가거나 피하기보다는 정면 돌파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여인의 거리가 겨우 일곱 장 정도로 가까워졌다.
고함을 쳐 여인을 비키라 하려던 그가 돌연 울음소리가 귀에 익으며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란 생각이 들었다.
한립은 흠칫 놀라 경계심을 높였다. 금제의 환각에 당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하얀 상복 차림의 여인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누군가가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정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립이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섰다. 겁에 질린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를 불렀던 것이다.
“넷째 오빠…….”
그 소리에 머리가 멍해지더니 뇌로 피가 흐르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의지를 벗어나 이미 그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설마 너는! 설마…….”
백의 여인이 고개를 들더니 맑은 눈에 슬픔을 가득 담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익숙한 얼굴, 오뚝한 코, 말을 거는 듯한 눈동자가 자신의 여동생과 너무나 흡사했다.
“오빠 나 못 알아보겠어? 나야…….”
“누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여인을 본 그가 오래 동안 묻어두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넷째 오라버니 나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몇 해 전 중병을 앓다 죽었는데. 나 너무 무서워…….”
여인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창백한 낱으로 그를 향해 다가왔다. 마치 비에 젖은 아기 새 같은 처량한 모습이었다.
이때 한립의 얼굴에 이상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미 여동생을 닮은 여인은 그의 코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한립의 눈에 한기가 스치더니 푸른 소검이 소리 없이 날아가 여인의 이마를 통과했다.
“꺄악!”
비명이 터지고 여인은 검은 기운으로 변해 사라졌다. 한립은 검은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유유히 중얼거렸다.
“모습은 똑같다만 어릴 적 헤어진 누이가 나를 어찌 알아보겠느냐. 지금 모습은 고사하고 어릴 적 모습도 까맣게 잊었을 것이 분명한데.”
그가 고개를 숙여 손목의 파라주를 내려다보았다.
자신감 있게 말하긴 했으나 파라주가 누이의 모습을 가장한 환영이 다가오자 뜨거워졌던 것이다. 그것을 신호로 잠시 주저하던 한립이 과감히 출수를 할 수 있었다. 사실 검이 그녀의 이마를 뚫을 때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상대가 환영이란 것을 알아도 조금이라도 오래 누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미련이 남았던 것이다. 미미한 상실감을 느끼며 한립은 홀로 어둠을 뚫고 나아갔다.
* * *
하루가 지나자 거대한 건축물 앞에 십여 명이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건축물은 구름을 뚫을 듯 높았고 전체가 푸른빛이 도는 거석으로 만들어졌다. 멀리서 보면 다섯 층이었지만 올라갈수록 좁아졌다. 각 층간의 거리가 백 여 장에 달해 건물이 얼마나 높은지 말해주었다.
하얀 보호막으로 뒤덮은 건물에 비해 개미처럼 작은 선사들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간에는 하얀 빛을 내는 전송진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극음, 만천명 등의 마도와 정도 원영기 노괴들이 있었고 오축, 현골 그리고 또 다른 결단 후기 선사들이 앉아 있었다.
아직 한립과 원요, 성궁 장로들 그리고 또 한 명의 결단 후기 선사가 전송진을 통과하지 못한 채였다.
극음 노괴는 겉으로는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속으로는 점점 초조해 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통과 속도로 보아 한립과 오축은 비슷하게 전송되어 왔어야 옳았다.
지금 그는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전송진이 빛나며 누군가 걸어 나왔다. 만호자 등이 동시에 실망한 기색을 하게 만든 이는 복면을 한 원요였다.
여인은 원영기 뇌괴들의 시선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으나 모르는 척 묵묵히 걸어갔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나오자마자 다시 전송진이 빛나며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