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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253화 (10/2,000)
  • # 253

    253화. 보광각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성궁 장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러 선사들이 석회암 통로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하지만 만천명 등이 통로로 들어가는 것을 주시한 마도 노괴들은 서두를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극음 사조가 가부좌를 하고 남아있는 성궁 장로들을 힐끗 보더니 잠시 주저하다 투명한 팔찌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팔찌에서 손톱만한 구슬 네 개가 은은한 푸른빛을 발산했다.

    “파라주(婆羅珠)다. 이것을 지니면 다음 관문의 환상이 몇 배로 심해져도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게다.”

    말을 마친 그가 한립에게 팔찌를 넘겼다. 한립은 연달아 감사를 표했다.

    파라주의 명성이야 널리 알려져 있어서 1알 만 지니고 있어도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을 크게 줄여준다 했다.

    그런 것을 네 개나 엮어 만든 팔찌를 마지막 관문의 통과를 돕기 위해 자신에게 넘겨준 것이다.

    솔직히 뜻밖이었다. 하지만 크게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보물 수거가 끝나면 다시 빼앗아갈 생각인 듯 했다.

    파라주는 나무 재질 같으면서도 아닌 것이 금빛을 냈고 단향목 향이 전해져 정신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역시 남다른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이때 청역 거사가 푸른 부적 한 장을 꺼내 한립에게 내주었다.

    “보통 때라면 파라주로도 충분하겠지만 안전을 위해 이것도 몸에 지니거라. 내가 제련해 둔 청명침(靑冥針) 부보인데 보통의 법보보다도 위력이 강하니 가져가거라.”

    ‘청명침 부보? ’

    듣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영기 선사의 부보라니 그간 보아온 저급 부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주저 없이 부보를 받아 든 한립이 역시 연달아 감사를 표했다. 동시에 만호자도 말없이 검은 갑옷을 던져주었는데 은색의 비늘 같은 것이 무척 촘촘하게 달려있었다.

    극음도 그것을 보고는 눈에 탐욕이 어렸다.

    “역시 만 형이 대범하십니다. 뜻밖에 이보 황린갑(皇鱗甲)을 빌려주시다니 제자를 대신해 감사를 드리지요.”

    만호자가 냉랭한 시선으로 한립을 보더니 악랄한 얼굴로 답했다.

    “백여 년 전에야 쓸모가 있었지만 이미 탁천마공을 대성했으니 큰 필요가 없어서 말이야. 이렇게 까지 했는데 날 실망시키면 어떻게 될지는…… 큭큭!”

    한립은 안색이 변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극음이 그런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몸을 지킬만한 보물을 내주었으니 별다른 일이 없으면 무사히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하겠지요. 그럼 일단 움직이시죠. 통로의 개방시간도 제한이 있지 않습니까.”

    만호자와 청역 거사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발을 떼지 않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잠시 굳었던 한립이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먼저 통로에 들어가면 자신이 따라 들어오지 않고 달아날까 염려하는 것이 분명했다. 한립이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아무 통로나 골라 들어가 버렸다.

    극음과 다른 이들도 그제야 안심하고 각자 다른 통로로 들어갔다. 이제 석전 안에는 두 백의 장로만 남자 무표정한 얼굴의 선사가 입을 열었다.

    “마도인들의 거동이 수상하구나.”

    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인자한 인상의 장로 역시 미간을 좁히며 동조했다.

    “노괴들이 엿들을 수 없게 방비를 하긴 했으나 육안으로 보아도 결단 초기 선사를 애지중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을 보호할 보물도 내주고요.”

    “이 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마도인들이 이리 구는 것은 이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들을 움직이게 할 만한 것은 내전의 허천정 뿐이지요. 그 결단기 녀석이 보물을 찾는데 중요한 열쇠인 듯합니다.”

    한립이 대화를 들었다면 할 말을 잃었을 것이다. 간교한 여우들이 겨우 몇 마디 말로 진상을 파악한 것이다.

    정말 탄복할 만한 심계였다.

    “허천정을 가져가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해. 난성해에서 오래 전 멸종된 영수를 제외하면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지. 그렇지 않았다면 성궁의 이전 성주들께서 벌써 챙겨 놓으셨겠지.”

    “그렇게 손 놓고 있을 일은 아닙니다. 혹시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요수들을 찾아냈을 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교활한 자들이 시간을 내 이곳을 찾았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전에도 거의 허천정을 가져갈 뻔한 사례가 있었으니 말입니다. 마지막까지 끌어올리지 못해 겨우 보천단 한 알을 얻고 다른 이의 암습에 당했지만요. 만천명의 금사잠도 아예 가능성이 없다 할 수 없고요.”

    “그렇다면 만일을 위해 은밀히 잠입하지. 아무 일도 없다면 다행이겠지만 보천단이 다른 이들의 손에 굴러 들어가게 놔둘 수는 없으니 말이야.”

    “그러시지요!”

    * * *

    한립은 자신이 성궁 장로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석회암 계단을 오르며 놀라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렇게나 선택한 통로에 들어오니 상층으로 향하는 끝없는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그 끝을 보지 못한 것이다.

    ‘누각이란 것이 이리 높은 곳에 지어져 있단 말인가? ’

    의혹을 안고서도 발은 쉼 없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백여 장을 더 올라가고 서야 겨우 빛이 들어왔다. 역시 계단의 끝에서 모퉁이를 돌자 평범해 보이는 방원형 출구가 나타났다.

    한립은 성큼성큼 출구를 빠져나갔다. 암황색 하늘과 뿌연 공기 그리고 붉은 태양까지 모든 것이 흐리멍덩했다.

    도무지 규모를 파악할 수가 없는 공간이 나온 것이다. 짙은 안개로 상세한 전경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천 장은 넘을 듯한 광활한 공간에 한립 외에는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전면에는 수십 장 길이의 옥으로 만든 다리가 허공너머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끝에는 이 공간의 하나 뿐인 네모난 누각이 보였다.

    전체 높이가 삼십 여 장 되는 누각은 겨우 2층이었는데 건물의 외관이 정교하고 아름다워 신선이 살 법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누각의 입구에 걸린 거대한 편액에 크게 보광각(寶光閣)이라는 고대 문자가 적혀 있었다. 한립은 조급히 다가가지 않고 자세히 누각을 살폈다.

    규모가 크다고는 할 수 없으나 놀랄 만한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으며 하얀 기운이 건물을 덮고 있었다. 강력한 금제가 걸려있는 것이다.

    한립이 걸음을 뗐다.

    천천히 옥으로 만든 다리를 건너 보광각 방면으로 이동한 것이다. 다리를 건너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다리 밑으로 주었다.

    만 장은 훨씬 넘을 것 같은 보이지 않은 심연 속에 검은 기운만이 느껴졌다.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 지는 광경이었다.

    담이 크다 할 수 있는 그도 다리 아래를 보고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알 수 없는 느낌에 그는 아무 수확 없이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의식이 강력하긴 하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를 살필 재주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침없이 누각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누각은 거대한 위용을 드러냈고 보통의 이층 누각보다는 훨씬 커 보였다. 누각의 입구는 반원형이었는데 노란빛의 장막이 그곳을 막고 있었다.

    한립은 그 앞에 당도해 빛의 장막을 살폈다. 고개를 갸웃한 그가 푸른빛을 내니 일촌 길이의 검이 나타났다. 그의 손짓에 따라 푸른 검이 서서히 노란빛의 장막을 찔러보았다.

    하지만 파문이 일 뿐 검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막히는 것이 없는 듯 했다. 뜻밖이었는지 칼을 거둔 한립이 이번엔 자신의 팔을 집어 넣어보았다.

    조금 서늘한 것이 액체에 잠기는 기분이었다.

    한립은 더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쏘아져 나가 빛의 장막 안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빛의 장막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간 그는 잠시 멍해졌다.

    눈앞에는 일장 높이의 옥 탁자가 무수했던 것이다. 탁자의 크기는 제각각이었고 모두 다른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 위로는 다양한 빛의 보호막이 원형으로 씌워져 있었다. 속에 물건을 보관하는 형식 같았다.

    한립은 약간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보광각이란 세 글자를 보고 나서 운이 좋아 고보를 보관한 누각을 택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엔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온 이들이 벌써 고보를 하나씩 선택해 세 번째 관문에 진입했거나 이층으로 올라간 듯했다.

    자세히 탁자들을 살핀 그는 어떤 것은 이미 비어 빛의 보호막도 사라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이상한 마음에 자세히 사방을 살폈어도 마찬가지였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샅샅이 뒤지자 다른 것들과 달라 보이는 옥 탁자가 눈에 띄었다. 그 탁자는 일층의 맨 뒤에 홀로 동떨어져서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의식을 통해 탁자를 훑어본 한립은 자신이 익힌 진법 지식을 통해 간단한 전송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선을 거둔 그가 이제 옥 탁자들을 돌며 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볼 때마다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고보들이긴 한데 별 볼일 없어 보여.’

    수십 개를 확인한 그는 아예 흥미를 잃어버렸다.

    옥 탁자 위의 물건들은 고대 선사의 법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옛날에 쓰던 장창이나 날이 두 개 달린 작살 등 상고시대의 양식을 하고 있었다.

    비록 고보라고는 하나 상고 시대의 비검, 비도, 법보 정도로 지금의 뛰어난 법보에도 위력이 못 미치는 것이다.

    완전히 쓸모없는 물건들은 아니지만 청죽봉운검 법보가 있는 한립에게는 바구니 고보처럼 특수한 기능이 있는 것이 필요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무언가를 놓쳤을까 모든 탁자의 물건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그저 한숨을 내쉰 한립은 전송진으로 다가갔다.

    아마 이 층의 물건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서였다.

    전송진에 영석을 몇 개 배치하자 하얀 빛이 돌며 새로운 장소로 전송되었다.

    ‘이곳이 이층? ’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고 눈앞의 거대한 원형 보호막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었다. 열댓 장 높이의 보호막은 짙푸른 빛을 발산해 시선을 빼앗았다.

    그 안에는 수십 가지 각양각색의 고보들이 떠다니고 있었는데 두루마리, 옥패, 사발, 수건 등 용도를 알 수 있는 물건도 있었지만 아예 무엇인지 감도 오지 않는 물건도 많았다.

    한립은 크게 기뻐하며 이층으로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들이라면 이렇게 많이 남아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보호막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이 벌어지며 일촌 가량의 푸른 소검이 분출되었다.

    소검은 한립의 머리 위를 맴돌더니 그의 의식이 시키는 대로 보호막의 하단을 찔러보았다.

    텅.

    가벼운 소리와 함께 짙푸른 빛이 솟아올랐고 푸른 검은 반탄력에 의해 돌아왔다. 그 모습에도 한립은 놀라지 않았다.

    얻기 어려운 물건일수록 그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약간 흥분한 기색으로 입을 벌리자 총 아홉 개의 소검이 그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소검들은 맑은 소리를 뿜어내며 푸른빛이 찬란한 거대한 검으로 합쳐졌다.

    “갈라버려!”

    산이라도 쪼갤 기세로 푸른 검이 휘둘러졌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검과 보호막이 닿은 순간 균열이 일어났다.

    그러자 한립의 입 꼬리도 올라갔다. 하지만 한립이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전송진에서 강력한 기운이 몰아쳤다.

    쩡!

    거검이 기운에 의해 튕겨나간 것이다. 놀란 한립이 굳은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짓에 다시 아홉 자루 소검으로 돌아온 푸른빛이 체내로 흡수되었다.

    웽웽웽웽.

    이후 허리춤에 있는 영수대에서 서금충 무리가 솟아올랐다. 금은색 딱정벌레의 익숙한 날갯짓 소리가 공간을 채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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