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252화. 보물이 있는 누각
앞선 대화 때문이었는지 두 사람은 말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도리어 일반적인 개미 떼조차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한립은 물론이고 원요가 생각해도 이상해서 점점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그렇게 길을 가던 두 사람은 도중에 높은 모래 언덕을 오르고서는 얼어붙었다.
“이게 무슨…….”
원요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한립의 표정은 훨씬 나았으나 그도 그녀 못지않게 놀라는 중이었다.
검은 사막에 어울리지 않는 이, 삼십 장 높이의 거대한 얼음 기둥이 우뚝 솟아있었던 것이다.
그 기둥은 한랭한 기운이 넘쳐흘렀고 빛을 받아 반짝였으며 그 안에 거대한 검은 거인을 가두고 있었다. 대머리 거인은 추한 얼굴에 두 눈을 부릅뜨고 얼음 속에서 꼼짝 않았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던 한립이 부근의 땅을 훑었다. 검은 사막 곳곳이 파이고 울퉁불퉁해진 것이 전투를 벌인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의 눈빛이 다시 거인에게로 옮겨 갔다.
“……!”
넋을 놓고 있던 원요가 겨우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발견한 거라도 있어요? 어찌 된 일이죠?”
그저 미소를 지은 한립이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의식을 퍼뜨렸다.
인근에 숨어있는 선사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한립은 그대로 모래 언덕을 내려가 얼음 기둥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런 태도에 원요가 답답한지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그에게서 멀어져 봐야 스스로 법력을 소모해 열기를 이겨내는 결과밖에 남지 않았으니 곧 바짝 따라 붙었다.
그녀와 한립이 얼음 기둥의 십여 장 거리 내로 가까워지자 원요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개미 떼?”
이 정도 거리가 되자 그녀도 분명히 거인의 진면목을 보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대머리 거인은 무수히 많은 개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형상이었다.
정말 불가사의한 모습이었다.
철화의가 얼음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죽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립은 걸음을 멈추고 눈앞의 얼음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이왕 모두 죽었으니 우리는 어서 갈 길을 가요. 시간을 지체하지 말아야죠.”
그녀의 말에 한립이 미심쩍어했다.
“어찌 죽었다고 확신하시오?”
“그럼 살아있단 말인가요?”
그녀는 한립을 보며 설명했다.
“명성 높은 만법문 현황경(玄黃鏡)도 못 들어봤어요? 그 보물로 살아있는 것을 비추기만 하면 바로 혼백을 흩을 수 있고 남은 신체는 수정 기둥 같은 모습으로 남게 돼요. 아마 며칠만 지나면 남은 것마저 사라지고 말 거예요.”
“못 들어봤소!”
“…….”
한립의 솔직한 답해 여인이 눈을 부릅뜨더니 할 말을 잃었다.
다시 한 번 얼음 기둥을 둘러본 그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라면 이 벌레들은 만천명이 처리한 것이겠군.”
원요가 한립을 슬쩍 보며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누구겠어요? 지금 무슨 생각해요? 이 수정 기둥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사라지지만 일반적인 법보로는 훼손할 수가 없다고요. 그렇기에 현황경의 명성이 자자한 것이고요.”
한립은 차분히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는 두 손으로 허리춤에 있는 영수대를 꺼내 거대한 서금충 무리를 내보냈다.
“가거라!”
웽웽!
그의 손짓에 따라 구름처럼 몰려간 딱정벌레들이 얼음 기둥을 둘러싸 버렸다.
“날벌레 잔해를 먹어 치우게 하려고요? 아무리 영수가 강력해도 그렇게는 안 될…….”
원요가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하얀 얼음에 덮여 있던 거인이 눈에 띄게 줄어들더니 단시간 만에 머리통이 아예 사라진 것이다.
그녀의 입이 벌어져 한참 다물 줄을 몰랐다.
원요의 놀란 눈빛 속에 서금충 대군은 거대한 거인을 남김없이 갉아먹었고 수정 구슬처럼 생긴 검은 물체만을 남겨두었다.
연정(煉晶)이라 불리는 것이었는데 개미 떼의 여왕개미가 매일 광석을 갉아먹고 체내에 쌓아두는 진귀한 재료였다.
비록 이런 정보를 아는 선사는 극히 드물었지만 말이다. 한립도 오래된 고대 서적에서 관련 글귀를 읽었던 것이 떠올라 시도해본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연정을 얻게 된 것은 뜻밖이었다. 연정은 법보의 가장 좋은 보조 재료 중 하나였다.
일단 법보에 섞어 넣기만 하면 위력이 크게 증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강도를 상상할 수 없이 높여줘 어떤 물체로도 절단되지 않게 해주었다.
만천명이 이런 사실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연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덕에 한립만 큰 소득을 거둔 셈이었다.
시간을 두고 청죽봉운검을 제련하는데 쓴다면 법보의 위력을 한 층 더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원요는 연정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희색이 만연한 한립의 표정에 좋은 물건일 거란 것은 눈치를 챘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캐묻는 실수를 범하진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 * *
대충 만들어진 석전 안에는 전송진 외에도 사면에 한 개씩 거대한 석회암 문이 있었다.
모든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기에 그 안은 밀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석전 안에는 대량의 돌 탁자와 의자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겨우 대여섯 명의 선사들이었다.
극음 사조, 청역 거사 그리고 만천명이 자리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결단기 후기 선사들이었다.
이들 모두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특히 극음 사조의 얼굴은 포악하기 그지없어서 전송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빙화도를 탈출한 선사들이었다. 검은 사막과 피의 숲이 원영기 선사들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결단 후기 선사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고 빠져 나왔을 터였다. 물론 그 이하의 선사들은 아예 빠져 나오지도 못했다.
극음과 청역 거사는 당연히 한립의 안위를 걱정 중이었다. 만일 용암로에서 한립이 죽어버리면 혈옥지주도 날아가고 괜히 헛꿈을 꾼 셈이 된다. 특히 극음 사조는 보장된 이익이 더욱 컸기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만천명 또한 서늘한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영기 선사들은 빙화도의 이런 변화가 성궁의 짓이란 것을 모를 리 없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도대체 성궁은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설마 허천전 안의 정마 양쪽을 모두 찢어 발겨놓겠단 뜻인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만호자, 천오자, 농부 차림의 선사 그리고 오축과 현골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전송진을 빠져 나왔다.
내전 안 모두가 얼굴이 말이 아닌 것으로 보아 분명 속으로 성궁을 향해 욕지거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빙화도 관문의 통로가 닫힐 시간이 반나절도 채 남지 않았다. 아직도 한립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오축이 살아나와 조금 나아졌던 극음의 얼굴이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
오축은 극음이 이전에 준 고보의 도움으로 이곳을 멀쩡히 빠져 나왔으나 한립도 그런 보물을 지니고 있을 거라 보장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울적해진 극음이 자신도 모르게 청역 거사와 만호자를 살폈다. 청역 거사는 전송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만호자는 내전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턱을 움찔거리는 것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이었다.
극음은 한숨만 나왔다. 혈옥지주를 잃으면 허천정을 얻을 가능성이 너무 낮아질 테고 연합도 어찌될 지 알 수 없었다.
현골은 돌 탁자를 골라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마치 법력을 보충하는 듯 했다. 한립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도 조금 놀라긴 했으나 그럴 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에 한립의 능력은 기껏해야 결단 후기의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이변이 발생한 빙화도를 통과할 수 있을 지는 반반의 확률에 맡겨야 했다.
이렇게 한립이란 조력자를 잃으면 극음을 상대하기 어려워진다. 아마 다른 기회를 기다려야 될 수도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허탈해진 현골이 성궁에서 나왔다는 장로 둘을 향해 마음속으로나마 저주를 퍼부었다.
만천명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았다. 결단기 선사들의 조력을 받으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모두가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성궁의 장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곱지 않은 시선들이 둘에게 집중되었다. 인자한 얼굴을 한 백의 장로가 대중의 차가운 시선을 훑어보더니 탄식했다.
“허! 어떤 경솔한 선사가 빙화도의 강력한 금제를 건드려 협곡 내에 혼란을 가져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두 사람이 조사를 나섰으나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번 원정에서 많은 선사들이 화를 피하지 못했을 텐데 허천전 감독을 맡은 저희는 성궁으로 돌아가면 면벽 수련 백 년 형 정도를 받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일이 발생해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정마 양쪽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겨우 저런 뜬 구름 잡는 소리로 책임을 피하려 하다니 마치 자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이지 않은가! 그러나 대전의 상황은 두 장로가 예견한 대로였다.
이곳에 모인 선사들은 얼음장 같은 시선을 보내긴 했으나 누구 하나 직접 나서서 따지지 않았다. 만호자, 만천명 등 원영기 선사들도 그들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각자 할 일을 하였다.
성궁이란 이름은 감히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인 것이다.
두 백의 장로가 시선을 교환하더니 구석진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었다. 모두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각자 할 일을 하는데 전송진이 다시 빛나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과 원요였다.
원요는 다시 전신을 검은 옷으로 감싸 남장을 하고 있었는데 석전 안의 일부 사람들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극음이 한립을 보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한립!”
그는 활짝 웃으며 당장 곁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만호자와 청역 거사도 놀란 눈치였으나 극음의 곁으로 모여 들었다.
몰래 탄식한 한립이 원요에게 몇 마디를 하고는 극음 사조에게 걸어갔다. 마도 노괴들이 보물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건들지 않을 것임을 믿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 오자마자 현골을 발견하니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극음은 한립에게 자비로운 사부의 모습으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물었다.
한립은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사실 상대도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던 것이다. 역시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극음이 연달아 칭찬을 해주었다.
그 옆에선 청역 거사도 미소로 그를 맞이하며 안부를 물어왔다.
만호자 만이 체면을 중히 여겨 그 연극 속에 끼어들지 않았는데 한립이 한빙주를 돌려주려 하자 대범하게 손을 휘저어 가지라는 뜻을 표했다.
보아하니 예상치 못한 위험에도 빙화도를 탈출한 그가 모두의 중시를 받게 된 듯 했다. 다만 오축만이 적의를 그대로 드러내며 표독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극음 사조도 이것을 발견했는지 돌연 그에게 눈치를 주었고 입을 달싹거렸다. 전음을 들은 오축이 고개를 숙이며 평온한 안색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이런 모습을 눈에 담으며 현골에게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정확한 계획을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설마 되는 대로 하자는 심산은 아닌지 걱정이 된 것이다.
이렇게 머리를 굴리다 보니 남은 시간도 금세 지나갔다.
잠시 후, 석전 중간의 전송진이 돌연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살아나온 이들은 고작 열댓 명이었다.
쿠쿵!
동시에 사면의 네 개의 석문이 열리며 깊은 통로를 드러냈다. 백의 장로가 통로 앞에서 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4개의 통로 중 3개는 어떤 누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통로와 연결된 누각마다 보유한 물건이 달라서 고보, 단약 혹은 공법을 보관하고 있지요.
단 모든 누각은 금제로 인해 누구든 단 한 가지 물건만 선택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일단 물건을 손에 넣으면 즉시 다음 관문인 몽환의 세계로 전송됩니다. 지금이라도 세 번째 관문을 포기할 선사는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시면 자동으로 허천전 밖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그의 이런 설명에 감사하는 이가 없었다. 적대적인 분위기에도 장로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