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
251화. 이상한 조짐
한립은 그녀의 유혹에 정말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두 눈을 가늘게 뜬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원 소저의 미모에 미혼술까지 쓴다면 아니 넘어온 사내가 없었겠소. 허나 내겐 아무 소용없으니 법력을 아껴 목숨을 유지하는데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를 매혹하려던 원요의 얼굴에서 몽롱한 기원이 싹 사라지더니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흥! 정말 미인을 향유할 줄 모르는 사내네.”
“그럴 리가 있겠소. 허천전처럼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면 소저 같은 미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까닭이 없지요. 하하…….”
“하, 꿈 깨시죠? 이런 곳이 아니었다면 나라고 뭐!”
원요는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되었습니다. 원 선사의 몸도 보상도 원치 않으니 그럼 이만 먼저 가보겠소.”
한립이 포권을 하며 다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원요가 바로 꼬리를 내리고 가련한 얼굴로 돌아왔다.
“한 형, 뭘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정말 무엇을 원하시는지 말씀해 보세요. 설마 백여 년 만에 다시 만나 함께 귀무까지 통과한 인연을 잊으신 겝니까? 보물은 청화뢰를 제외하곤 더 드릴 것이 없습니다.”
한립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원요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애절한 눈빛과 요염한 분위기 그리고 처음 보았을 때의 거만한 표정은 아예 다른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보아하니 연기기에서 결단에 이르며 걸어온 길이 평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고민을 하자 원요가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백여 년 전 인연까지 언급하시니 도와드리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하지만 헛되이 시간과 공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라 제혼을 넘겨준다면 함께 용암로를 통과하지요. 그 영수가 혼을 빨아들이는 능력에 호기심이 가서 말이오.”
제혼이 바로 그가 줄곧 원하던 보상이었다. 이런 영수가 있다면 현골 노마와의 합작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멀리 보면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영수가 아닌가!
원요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제혼을 원한다고요?”
“어찌 아니 됩니까?”
“그러니까 제혼만 주면 날 용암로에서 데리고 나가준다고요?”
한립의 서늘한 물음에도 원요는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소!”
명쾌히 확답은 주었으나 상대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제혼은 이제 한 선사 것입니다!”
원요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수대를 풀어 그에게 넘겼다. 정말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눈을 깜빡인 한립은 오히려 탐탁지 않은 기분에 휩싸였다.
‘기다렸다는 듯 제혼을 넘기다니 설마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가? ’
이런 생각에 영수대 안을 의식으로 살피자 제혼이 단잠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허리에 영수들를 매었다.
원요는 입을 벌려 잿빛 구슬을 꺼내더니 손바닥 위에 놓았다.
“제혼을 통제할 수 있는 명혼주(鳴魂珠)입니다. 법보를 제련하듯 하면 제혼은 영원히 당신에게 귀속되지요. 이 영수는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제련하지 못했으니 제 의식의 흔적을 밀어내고 제련을 하시면 될 거예요.”
미소를 머금고 설명을 마친 그녀가 한립에게 명혼주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명혼주를 내려다보는 한립은 바로 받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 구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귀무 속에서 제혼을 보고 자령 선자와의 전음을 통해 관련 정보를 알아놓았던 것이다.
거기다 마음대로 제혼을 다루지 못하는 여인의 모습에 완전히 제련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까지 알아챘었다. 그러나 명혼주를 넘기며 희색이 만연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니 의문이 들어 받을 수가 없었다.
원요가 슬며시 웃었다.
“제가 가짜 명혼주라도 내드릴까 걱정하십니까?”
그녀의 말에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한립은 바로 답하지 않고 구슬을 더 살피다 입을 열었다.
“가짜 일수도 있지요. 또 구슬에서 혼백의 기운은 느껴지는데 이것을 제련하면 불이익이 있소?”
그는 원요의 두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원요가 차분히 해명했다.
“불이익이 있을 리가요! 정말 무슨 문제가 있다면 소녀가 직접 제련을 했겠습니까? 다만 제련을 하며 불편한 점이야 참아야겠죠.”
‘불편한 점? ’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구슬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 그는 구슬을 거둬들이고 천천히 살펴보기로 했다.
만일 해로운 점이 있다면 제련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명혼주가 있으면 제혼을 부릴 수 있었다. 그는 구슬을 조심스레 저물대로 집어넣었다.
“그럼 출발하지요. 미리 말해 두건대, 용암로에서 최선을 다해 소저의 안전을 챙기겠으나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친다면 알아서 살 궁리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차분한 말과 함께 그의 한빙주가 한기를 내뿜어 원요를 그 안에 휘감았다.
“그야 당연하죠.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알아서 하겠어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한립이 바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에 원요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바싹 붙어 걷기 시작했다.
한립과 멀어질수록 한빙주의 한기도 약해지니 그녀로서는 더 가까이 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을 유지하면서 붉은 입술을 달싹여 원망을 쏟아냈다.
“그런데 정말 이번 빙화도는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무슨 검은 사막에 법보 공격도 먹히지 않는 개미 떼까지 말이에요. 만일 청화뢰가 없었으면 한 선사를 만나기도 전에 죽었을 거라고요. 게다가 방어 고보도 하나 잃었어요.”
그녀 역시 철화의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 했다.
“검은 사막이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단 말이오?”
사실 그도 철화의 같은 엄청난 요수의 등장에 의아하던 참이었다. 특수한 공법이나 법보를 지닌 선사를 제외하면 결단 후기 선사도 검은 사막에서 온전히 빠져 나올 가능성이 적었던 것이다.
원요는 미리 많은 조사를 하고 온 듯 즉답했다.
“한번도요! 용암로에 검은 사막은 처음 나타났어요. 이전에 이곳을 다녀간 선사들은 고온과 위험한 지형 그리고 가끔 만나는 불 속성 요수만 이겨내면 됐단 말이죠. 만약 철화의 떼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곳을 통과하려는 선사들은 없었을 거예요. 아마 귀무를 지나 보상을 받자마자 돌아갔겠죠.”
‘빙화도가 정상이 아니란 말이군.’
* * *
“이건 정상이 아니야. 누군가 손을 쓴 게 틀림없어.”
현정로의 혈홍색 얼음 기둥 속에서 청역 거사가 뒷짐을 쥐고는 중얼거렸다.
그의 주위엔 무수히 많은 푸른빛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그 밖으로 수백 마리의 은색 요수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요수는 털에서 은빛이 번뜩이고 머리에 작은 뿔이 나있었다.
쿵! 쿵!
그들은 하나 둘 은색 빛이 되어 노인에게 충돌해왔는데 작은 체구와는 달리 엄청난 굉음을 내는 것이 결코 약한 요수가 아니었다.
노인은 이런 공세 속에서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괴물 쥐들의 공격이 확실히 그를 성가시게 한 것은 분명했다.
“죽고 싶어 그리 날뛰더냐!”
줄곧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팔을 휘두르니 주위의 푸른빛이 폭발하여 근방 수장을 쓸어버렸다.
잠시 후 푸른빛이 사라지고 땅에는 수많은 짐승의 시체가 쌓여있었는데 모두 푸른 침이 조밀하게 박힌 채였다. 청역 거사는 당연한 결과라는 듯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시선 속에 노인의 손이 다시 움직이자 미세한 침들이 역류하듯 하나로 뭉쳐져 그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두 번째 관문에서 은광서(銀光鼠)라니, 설마…….”
노인은 어두운 얼굴로 움직이지 않았다.
“흥! 현정도에 은광서가 나타났으니 용암로도 이전 같지는 않겠구나. 한 가 녀석이 어찌 되었을지!”
초조한 기색의 그가 탄식하더니 제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대협곡의 어둠 속에 두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철화의와 은광서를 이용한 것이 너무 경솔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이전에도 손을 안 쓴 것은 아니지만 은밀히 움직였지 않습니까. 이번에 검은 사막과 피의 숲을 나타나게 한 것은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었어요. 정마 양측의 수많은 결단기 수사들이 죽어나갔을 테니 만호자나 만천명도 눈치 챘을 테고요.”
근심 어린 목소리에 서늘한 답이 돌아왔다.
“눈치 챘겠지. 허나 이전에 허천전에서 한 일을 정마 양측이 모를 거라 여겼더냐? 그들도 일찍이 알아채고 있었으나 성궁의 세력이 강해 항변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허천전 내의 작은 금제들이나 조종하는 줄 알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게지.”
“검은 사막과 피의 숲이란 패를 이리 써버린 것도 아깝습니다. 어쨌든 선대 성궁의 주인께서 많은 시간을 들여 장악하신 것인데요.”
“아까울 것도 없다. 지금 난성해에는 수많은 유언비어들이 떠돌고 있고 두 분 성주께선 폐관 수련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르러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다. 난성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뿐더러 심지어 성궁 내부 제자들 사이에서도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단 말이다.
이런 시점에서 세력을 키우려 하는 정도나 마도는 모두 눌러버려야 할 대상일 뿐인 게야. 어느 일방이 일을 벌이더라도 성궁으로서는 무서울 것이 없으나 둘이 연합을 하면 문제가 커지는 것이지.
일단은 어떤 수단을 쓰든 두 세력을 억눌러 우리에게 주의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쨌든 성궁이 오랜 세월 난성해를 제패했으니 누구든 함부로 대항할 수는 없을 터.
시간을 충분히 끌어 두 분 성주께서 폐관 수련을 마치시면 정마가 연합한다 해도 걱정거리가 아니지. 만법문 풍파자나 성마도 육도라 해도 두 분 성주의 원자신광엔 주춤할 테니 말이야.
이런 상황에 철화의나 은광서 금제를 발동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우리 쪽에서 대량의 결단기 선사들을 처리할 살상력이 없어.
지금 양쪽의 인물들을 보니 분명 허천정을 노리고 왔을 터. 자신의 직전 제자가 당하지 않았다면 이 일을 가지고 따지고 들 틈도 없을 게다.”
서늘한 음성이 단숨에 상황을 정리했다.
* * *
한립이 지천에 깔린 벌레들을 보며 물었다.
“오는 동안 몇 번째 만나는 개미 떼인지 아시오?”
“일곱 번째요! 자주 만나긴 했지만 만 마리 이상의 대규모 무리는 없었어요.”
그들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지도 반나절이 지났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떨어진 개미 떼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운 서금충이 한립의 손짓에 영수대로 돌아왔다.
원요가 한립의 얼굴을 살피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어왔다.
“왜 그러죠? 표정이 좋지 못한데 이제 사막의 중심부를 지났으니 남은 길은 훨씬 안전할 거라고요.”
한립이 냉소했다.
“정말 안전할 거라 확신하오? 이후 어떤 위험이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 여왕개미를 포함한 개미 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요. 만일 아직 여왕개미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우리가 운이 좋았소. 아무래도 계속 전방을 경계하며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 말에 원요가 얼굴이 창백해져서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이 많은 것 아니에요? 여왕개미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아예 없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기를 바래야지요.”
한립은 철화의 무리에 여왕개미 요수가 존재할 수 있고, 그것의 능력은 대단치 않으나 지능이 뛰어나 마주한다면 매우 어려운 일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