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249화. 검은 사막
낮은 언덕의 다른 쪽에서 어떤 사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누런 얼굴의 사내는 뜻밖에도 극음을 보고 겁을 먹었던 선사였다. 두건과 합쳐 놓은 듯한 청록색 삿갓을 쓰고 손에 하얀 옥그릇을 쥔 그는 은은히 한기를 발산했다.
예사롭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그는 언덕 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살피며 무언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그러고도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표정이 한층 신중해졌다. 분명 멀리서 이곳을 보았을 때 누군가 흐릿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자를 찾을 길이 없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서늘한 시선으로 어느 한 곳을 바라본 그가 두 손가락을 이용해 옥 그릇 안에서 무언가를 뽑아냈다. 하얀 빛이 호를 그리며 그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가라!”
누런 얼굴의 사내가 수결을 맺으며 외쳤다.
펑.
가벼운 소리를 내며 퍼진 빛이 은하수처럼 퍼져 수십여 장을 감싸 안았다. 하얀 빛이 떨어진 붉은 땅에는 서리가 어렸으나 어디에서도 이상한 낌새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내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던 그는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눈앞의 검은 사막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기이한 곳이로구나.”
그도 진입하기를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가 다시 소매를 휘두르자 붉은 빛이 땅에 떨어져 내렸다.
빛이 사라지자 붉은 여우 형상을 한 작은 영수가 나타나 사내의 손짓에 따라 녹색 단약을 삼켰다. 영수는 무척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가 보거라.”
사내가 손가락으로 검은 사막을 가리켰다.
작은 영수는 네 다리를 폴짝거리더니 붉은 빛 줄기로 변해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갔다
잠시 후 작은 영수가 검은 사막 깊은 곳까지 들어갔지만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마치 빛깔이 기이할 뿐 자신은 보통의 사막이라고 외치는 듯 했다.
홍리수(紅狸獸)가 죽는 것도 감수할 생각이었던 그는 놀란 눈치였다.
사실 겨우 일급 영수에 불과한 붉은 여우는 동작이 기민하고 후각이 예민한 것을 빼면 별다른 쓸모도 없는 녀석이었다. 그는 사막을 몇 바퀴 더 돌아보게 하고는 다시 영수를 불러들었다.
신이 난 영수는 다시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검은 사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내가 언덕을 내려가 보이지 않자 한립의 신형이 다시 공중에 나타났다.
상대가 광범위 수색 법술을 펼쳐 주변을 살폈으나 한립의 무명 구결의 효과와 라연보가 합쳐져 손쉽게 피할 수 있었다. 또 상대가 결단기 중기 선사였지만 청죽봉운검 아홉 자루가 공격을 가하면 이길 거란 자신감도 있었다.
그렇기에 종적을 감춘 한립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값나가는 보물보다는 상대가 먼저 검은 사막을 지나도록 했다. 붉은 여우가 수색을 하고도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이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원래 가장 두려운 것은 정체모를 고난이었다.
일단 자신을 대신해 검은 사막을 시험해줄 인물이 필요했는데 그가 나타난 것이다.
누런 얼굴의 사내는 그의 뒤에서 기척 없이 나타난 한립을 눈치 채지 못하고 검은 사막으로 들어섰다.
일 장, 또 다시 일 장 더…….
더 깊은 지대로 들어설수록 사내의 얼굴엔 긴장감이 짙어졌고 삿갓에서 청록색 보호막을 펼쳐 전신을 물 셀 틈 없이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백 장을 가고도 전혀 이상이 없자 그의 얼굴도 결국엔 풀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면 벌써 벌어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멀리서 점점 작아지는 사내의 그림자를 보고 있던 한립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틀린 것인가? 정말 보기에만 이럴 뿐 아무 위험요소도 없다고? ’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부웅.
사내가 한 걸음을 더 내딛자 그 부근의 검은 모래 알갱이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허공을 빽빽하게 둘러싼 검은 먼지는 어떤 기척도 없었기에 매우 기이했다.
사내도 경험이 풍부한 자라 바로 옥그릇을 하늘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다량의 광채가 분출되더니 청록색 보호막 밖에 또 한 층의 빛의 장막을 깔았다.
이때 공중에 떠오른 무수히 많은 검은 모래는 날개 달린 벌레의 모습으로 변해 하늘을 뒤덮었다.
“흐압!”
사내의 노호성에 하얀 빛이 크게 증가하더니 주먹만 한 방패들이 무수히 나타나 그를 보호하며 회전했다.
그도 이쯤 되자 검은 모래의 정체를 똑똑히 알아챘다. 놀랍게도 겨우 날개 달린 개미 떼에 불과했는데 그 수가 엄청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곤충 요수의 정체와 약점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답을 내기도 전에 검은 홍수가 얼음방패가 일으킨 돌풍으로 돌진해왔다.
파파파팍.
모든 개미들이 수장 밖으로 튕겨나가 버렸다. 그 모습에 조금 안심한 사내가 희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튕겨나간 개미들이 부상도 없이 몇 번의 날갯짓만으로 다시 날아오른 것이다.
그가 생각할 틈도 없이 한 팔을 들어 올리자 회색의 비도가 무지개처럼 뻗어나갔다.
부웅.
개미 떼를 멸하려던 비도가 일으킨 기세에 만 마리가 넘는 개미 떼가 일제히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회색 비도의 난도질에도 개미들은 전혀 상하지 않고 도리어 비도에 올라탔다.
“……!”
까맣게 벌레에 휩싸인 비도를 본 사내가 대경실색해 법보를 회수하려 했지만 비도는 잠시 회색빛을 깜빡이더니 아예 검은 기류에 묻혀버렸다.
쿨럭.
동시에 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낸 사내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의식과 연결된 법보가 영력을 다하자 그의 원기도 크게 상한 것이다.
더는 기다릴 것도 없이 하얀 돌풍에 휩싸인 사내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지금 달아나지 못하면 살아날 가망이 없다 여긴 것이다.
이때 비도의 잔해마저 갉아먹은 검은 개미 떼가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를 쫓지 않고 허공에 군집하더니 검은 빛의 기다란 창으로 변한 것이다.
쐐액.
엄청난 소리를 내며 장창이 쏘아져 나갔다. 사내가 전신의 영력을 끌어올려 주위에 하얀 돌풍의 기세를 북돋았지만 검은 창은 하얀 돌풍에 머리를 찔러 넣었다.
푹!
연달아 울린 소리와 함께 검은 창이 돌풍의 중심을 꿰뚫고 나타났다. 그러자 검고 번들번들하던 창의 전신이 축축한 선혈로 가득했다.
* * *
하얀 돌풍이 그치고 누런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있었고 청록색 보호막이나 얼음 방패 등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훑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촤락.
이때 검은 창에서 모래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이 다시 흩어져 검은 개미 떼로 돌아오더니 주저 없이 그를 뒤덮은 것이다.
“흐, 흐하학! 악!”
참혹한 비명이 들려오더니 어느 순간 적막이 찾아왔다.
시간이 흘러 개미 떼가 다시 떠올랐을 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내는 물론이고 그가 갖고 있던 보물도 남김없이 삼킨 것이다.
한립은 이 모든 것을 언덕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철화의(鐵火蟻)잖아! 이런 곳에 저런 영충이 서식하다니.”
처음 검은 안개가 뿌옇게 끼었을 때만해도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벌레들이 사내의 법보도 두려워하지 않고 창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서야 철화의라고 확신했다.
사실 개미 형태의 곤충 요수의 종류는 수없이 많아서 전문적으로 그것들을 부리는 선사가 아니라면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종류에 따라 능력과 무서움은 천차만별이었다. 철화의는 곤충 요수 서열 37위를 차지하는 영충으로 강한 요수였다.
전설에서나 전해진다는 서열 3위 천정의(天晶蟻)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개미형 요수가 철화의였다. 철화의는 도검이나 일반적은 법술 공격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 속성과 얼음 속성 중계 이상 법술 또는 기타 속성의 극소수 법술만이 이 날벌레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또한 서금충에 버금가는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해 법보의 직접적인 공격에 강한 점은 오히려 서금충을 앞섰다.
그것들은 서금충처럼 영력을 집어 삼키는 기이한 능력은 없어도 그에 상응하는 검은 화염 분사나 군집해 형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마치 언제든 모양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불 속성 법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서금충처럼 이미 멸종되었다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극히 드물게 발견되는 요수였다. 또한 간혹 발견된다 하여도 수백 마리나 천여 마리 정도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철화의의 생존에 필요한 환경 때문이었다.
뜨거운 용암지형뿐 아니라 인근에 대량의 철 혹은 구리 광산이 있어야 자생할 수 있었다. 이런 특수한 지형을 벗어나면 금세 약해져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런 단점이 전부였다면 다른 선사들이 벌써 이것들을 영수로 길러내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곤충 요수에겐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철화의는 야생에서 자란 것이든 사람 손에 길러진 것이든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떤 통제 의식을 치르든 번번이 그것을 이겨냈던 것이다.
많은 선사들이 헛꿈을 꾸며 발견한 사실이었다. 그 구체적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이들은 철화의의 강한 성격이 그 이유라 했고, 또 다른 이들은 체질상의 문제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렇게 되니 철화의에 대한 자료는 천남 지역은 물론이고 난성해에서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천년 가까이 극소수의 선사들만이 이런 요수를 마주했고 철화의의 군집 수량도 날이 갈수록 적어져 거의 자취를 감춰가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검은 사막에서 뜻밖에 철화의 떼를 마주한 한립은 멍하니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철화의는 검은 사막의 가장 위험한 요소인 듯 했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개미 떼가 서식하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방금 전 사내가 겨우 수백 장을 걸어가 한 무리를 마주했으니 더 많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한립은 서둘러 저물대를 뒤지며 무엇이 있나 살피기 시작했다. 얼음과 물 속성 중계 부적이 열댓 장 있었으니 방금 본 규모의 개미 떼 두, 세 무리는 상대해볼 만했다.
그러나 겨우 부적만 믿고 드넓은 사막으로 진입하는 것은 너무 경솔한 행동이었다. 그의 시선이 서금충들이 담긴 영수대에서 멈추었다.
‘서금충들로 철화의를 상대하게 하면 어떻게 되려나? ’
일단 서금충은 곤충 서열에서도 철화의 위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수량도 많았다. 또 철화의의 빛깔이 전설 속의 검은 금빛이 아닌 것으로 보아 서금충처럼 완전히 진화한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서금충들로 철화의를 처리해 볼만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해 보고는 결심을 내렸다.
일단 서금충으로 저 날벌레들을 상대해보고 안 되면 수중의 부적을 이용해 다시 돌아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립은 서늘한 얼굴로 언덕을 질주해 내려가 검은 사막으로 진입했다.
잠시 후, 어느 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두 눈이 검은 모래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돌연 허리를 굽힌 그가 검은 모래를 한 줌 쥐어 눈앞까지 들어올렸다.
“흥!”
잠시 후 콧방귀를 뀐 그가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가 천천히 손바닥을 펴보았다.
그 결과, 손에 든 모래는 대부분 멀쩡했고 깨져나간 것이 거의 없었다. 한립은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검은 사막은 무슨, 흑철(黑鐵) 더미에 불과한 것을!”
다시 머리를 굴려보던 그가 탄식했다.
“이런 엄청난 양의 철광석 더미를 이용해 사막 지형을 만들어 내다니 허천전의 주인이란 자가 대단한 인물이기는 했구나.”
손에 든 알갱이들을 털어낸 그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눈썹을 꿈틀했다. 그는 허리에 찬 하얀 요패를 건드려 전신을 하얀 빛으로 가렸다.
방금 누런 얼굴의 선사를 피하느라 요란한 백서패의 효과를 거두었다가 열기를 참지 못해 다시 발동한 것이다. 지금은 영력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