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248화. 난항
한립은 붉은빛의 벽을 살피다 그냥 파고 들어갔다. 뒤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는데 다른 선사와 인사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붉은빛 속으로 들어가자 엄청난 열기가 야수처럼 덮쳐와 물 속성 방어막이 번뜩이며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웠다.
화들짝 놀란 그는 얼른 영력을 더 불어넣어 방어막을 유지하고는 곳곳을 살펴보았다. 새빨간 암석과 주황색 토지, 붉은빛을 내뿜는 초목부터 흐릿한 선홍색 하늘까지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빛깔이었다.
물 속성의 방어막에 벽화보의를 입었음에도 공기 중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자령 선자의 말에 따르면, 두 번째 관문에서는 아무도 공중 비행을 할 수 없고 두 발로 걸어서 통과를 해야 했다. 그러니 전송진과 멀리 떨어진 이들은 밤낮없이 걸어야 겨우 대협곡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단순히 수행에만 의지해서 통과하기는 어렵고 각종 냉기가 화기를 막아줄 보물이 있어야만 하는 관문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열악한 환경만이 문제가 아니라 협곡 내에 자생하는 요수들이 더 큰 난관이었다.
이번 관문에 도전하는 이들 중 절반 정도는 이런 요수의 손에 죽어 나갈 것이다. 게다가 흑심을 품은 다른 선사의 기습을 받아 저물대도 털리고 목숨도 잃은 일이 비일비재했다.
전송진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위험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다른 이들이 지닌 한기가 열기에 대항하는 보물을 획득할수록 이번 관문을 통과할 가능성을 높여 줄 것이다.
한립은 바로 출발하지 않고 사방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다경이 지날 동안 꼼짝 않던 그는 품에서 극음에게 받은 백서패를 꺼내 허리춤에 걸고 물 속성 방어막을 거두어들였다.
푸른빛을 대신해 하얀 빛이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법력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가부좌를 하고 법력을 보충하다간 죽기 십상이었다.
고개를 들어 붉은 태양을 발견한 그는 방향을 정해 지체 없이 출발했다. 앞에는 규칙 없이 늘어선 암석들과 사람 반 토막만 한 나무들뿐이라 길이랄 것도 없었다.
계속해서 걷다 보니 기이한 붉은빛을 발산하는 잡초더미에 앞이 막혔다. 잡초더미를 바라보던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돌연 그의 손에서 남색 구체가 생성되어 뿜어져 나갔다.
촤랏.
남색 구체는 잡초더미에 닿자마자 수증기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가 이리저리 살폈으나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기이한 잡초로 막혀 다른 길이 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한립은 시험 삼아 몇 걸음을 다가섰다.
‘이게 무슨 잡초야!’
그것들은 한 줄기 한 줄기가 예리한 붉은 칼날로 엄청난 열기를 품고 있었다. 백서패와 벽화보의로 인해 큰 문제는 생기진 않았으나 발밑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도록 만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물 속성 방어막을 펼쳤다. 이렇게 되면 법력 소모가 빨라지겠지만 그가 뛸 수 있게 해주었다. 라연보를 펼친 그가 푸른 그림자처럼 변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복서는 결단 중기 선사로 불과 흙 속성 영근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300년간 수련에만 매진한 끝에 지금의 수행을 얻게 되었고 난성해에서 명성도 대단했다.
심지어 주변 선사들은 그가 원영기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의 공경과 선망 그리고 찬사를 늘 반겨왔다.
하지만 그가 우연히 잡은 사급 요수의 뱃속에서 상고 시대부터 전해지던 분원단(分元丹)을 얻지 못했다면 아직도 축기기를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ㅣ.
이렇게 상고 시대 영단의 단맛을 본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허천전 원행을 준비해 왔다. 그가 준비한 것은 화룡충(火龍蟲)으로 이것을 이용해 난성해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허천정을 얻을 계획이었다.
그 안에 있는 여러 고보와 보천단만 있다면 원영기에 이를 날이 멀지 않게 된다. 그러나 허천전에 온 복서는 많은 원영기 노괴들을 보고는 머리에 찬 물을 끼얹은 듯 마음이 가라앉았다.
원영기 선사들이 이곳에 온 것은 당연히 내전에 들어가 허천정을 찾을 계획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원정에서는 그저 네다섯 명이 오는 정도였는데 이번엔 무려 여덟 명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그냥 포기하기에는 아쉬웠다.
혹시 기회가 생길까하는 마음에 귀무를 통과해 두 번째 관문인 용암로까지 오게 되었다.
사실 첫 번째 관문인 귀무나 세 번째 관문인 환영 세계를 조금 염려했을 뿐 두 번째 빙화도는 아예 안중에 두고 있지 않았었다.
그가 익힌 공법이 난성해에서 이름 난 태양결(泰陽決)이기 때문이었다.
태양결은 난성해 불 속성 공법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최상급 공법이었다. 공법의 태양진화(泰陽眞火)를 이용해 재로 만든 적이 무수히 많았기에 열기를 피하는 것에는 자신감이 충분했다.
물론 맨손으로 이곳에 오지는 않았다. 열기를 막을 법기 두 개를 준비해 온 것이다. 그도 더 많이 준비해오고 싶었지만 화룡충을 구하느라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태양결을 익힌 그가 두 개의 보조 법기까지 있으니 두 번째 관문은 누워서 떡 먹기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후회가 되어 미칠 것 같았다.
용암로에 들어서자 알게 된 사실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버티는데 태양결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끊임없이 공법을 운용해야 했다.
약간의 법력 소모가 아니라 전력을 다해 태양결을 운용해야 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들어서기 전에 태양결 공법 일성만 운용해도 다른 이들의 화염을 완전히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용암로에서 발산되는 고온은 선사들이 내뿜는 화염과는 완전 다른 것이었다. 결계의 작용으로 불 속성 공법을 억제하는 듯했다. 게다가 준비한 법기도 효과가 미미했다.
벌써 오랜 시간 걸어온 복서는 마음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 속도로 법력을 소모하다가는 손에 영석을 쥐고 끊임없이 영력을 보충 해도 반나절이면 고갈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열기에 재가 될 것이다.
복서는 그렇게 죽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미친 듯이 달려가며 곳곳을 살폈다. 하지만 주위는 고요하기만 했고 아무도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 다른 사람의 보물을 강탈해 목숨을 연명할 작정이었다.
앞을 향해 죽어라 달릴수록 복서의 살고자 하는 갈망은 더욱 강렬해져 갔다. 일각을 계속해서 달린 후 겨우 멈춰선 그는 무척 초조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이대로 대협곡을 통과할 수 없었고 더 달려가다가 다른 선사와 마주한다면 싸울 법력이 남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치고 이렇게 약해진 그를 상대가 두고 볼지도 문제였다.
복서는 달궈진 솥 위의 메뚜기처럼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엔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돌연 고개를 든 그가 붉은 하늘을 불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결심이 섰는지 온 몸에 노란빛이 분출되며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중에 떠오르며 그는 쉼 없이 두 눈을 깜빡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삼장 정도 높이에 이르러서도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자 그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 정도 높이만 되어도 비행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법기를 이용한 비행만 가능하다면야 대협곡 끝에 이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기쁨을 억누른 그는 재빨리 법결을 맺어 노란빛으로 변해 사라지려 했다.
쿠쾅!
“크악!”
막 십여 장을 날아간 복서는 선홍색 상공에서 떨어진 은빛 벼락을 맞고 재로 변해 흩어져 버렸고, 그의 품에선 두 개의 물건이 떨어져 근처 풀숲으로 사라졌다.
* * *
용암로의 모처에서 삼십 대의 아름다운 여인이 남색 천을 두르고 용암의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이유는 한 자 정도의 사각형 돌다리를 제외하면 대략 사십여 장은 될법한 붉은 강이 그녀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끓어 넘치는 용암을 바라보던 그녀가 미간을 좁히더니 결국엔 조심스레 돌다리로 발을 옮겼다.
돌에 발이 닿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돌다리의 열기는 상상을 초월해서 몸에 걸친 면사가 전부 막아줄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인은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레 나아갔다.
‘와르릉!’
중반까지는 무척 순조로웠으나 돌다리 중심에 도착한 순간 거대한 울림이 멀리서부터 전해졌다.
흠칫 놀란 그녀가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는 핏기가 가셨다. 엄청난 돌풍이 용암의 강 상류에서 불어와 마치 불의 기운을 지닌 거대한 용처럼 그녀를 덮친 것이다.
“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여인이 종적을 감추었다. 잠시 후 돌다리 밑 용암에 푸른 무언가가 반짝이더니 곧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 * *
현정로의 어느 얼음 산 부근, 중년인과 노인이 등을 맞대고 열댓 마리의 투명한 요수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요수들은 붉은 기운과 하얀 기운을 동시에 내뿜고 있었는데 일전을 벌이는 요란한 소리가 잠시 들리다가 모두 흩어져 버렸다. 꽁꽁 얼어붙은 땅엔 잔혹하게 헤집어진 시체 두 구 만이 남아있었다.
그 시각 현정로의 다른 편에선 극음 사조가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전신에 검은 빛이 찬란한 것이 한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간혹 얼음 속에 매복해 있던 투명한 요수들이 그를 기습해 오긴 했지만 검은 빛이 번뜩일 때마다 두 동강이 났을 뿐이었다.
이어서 그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길을 재촉했다.
* * *
이틀 후 용암로의 어느 새빨간 언덕 위에서 한립이 주저하는 기색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날 라연보를 시전해 초고속으로 초지를 통과한 이후 그는 다시 정상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라연보를 계속 이용하는 것은 몸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결단 후의 강대한 신체도 너무 긴 시간 동안 유지하기엔 무리였다.
이곳에 당도하기 전 습지를 통과할 때는 엄청난 정신력의 한립 조차 온 몸이 긴장감에 식은땀으로 범벅 됐을 정도였다. 보기에는 별다를 것 없던 땅이 실제로는 용암이 쌓인 구덩이였던 것이다.
만일 습지에 빠지는 순간 만호자가 내어준 한빙주를 적시에 발동해 전신을 감싸지 못했다면 지금쯤 숨이 끊겼을 것이다.
그 뒤로 괴상하게 생긴 수목들을 통과하며 세 마리 화령수(火靈獸)에게 걸렸다가 또 한참을 고생해서 겨우 빠져 나왔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처럼 한립을 얼어붙게 만든 것은 없었다. 그의 앞에 검은 모래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것이다. 정말 검은 모래와 그 모래로 이루어진 언덕뿐이었다.
이런 이상한 광경에 한립은 긴장했고 무턱대고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을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은 사막의 면적은 어마어마해서 길을 돌아가려면 최소한 이틀은 지체할 것이 분명했다.
이전에 통과한 선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두 번째 관문은 반드시 5일 이내에 통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송진이 사라져 그곳에 갇힌 이들은 죽은 목숨이 된다.
그의 추측으로는 겨우 대협곡 중반에 이르렀기에 여기서 이틀을 지체하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질 것이다.
그는 사막을 내려다보며 이곳엔 또 어떤 위험이 숨겨져 있을까 추측해 보려 애썼다. 그때 한립의 표정이 달라지더니 바로 흐릿하게 변한 몸이 공중에서 사라졌다.
얼마 안 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