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247화. 빙화도
지금 상황에서 한립은 중요한 패였기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되었다. 그 설명에 만호자는 더욱 의아한 얼굴이 되어 한립을 다시 보았다.
“여기서 제자를?”
극음이 만호자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비록 아직 기명제자이나 한 선사는 이미 극음도 사람이니 손속에 정을 남겨주시지요.”
만호자가 눈을 깜빡이며 극음과 청 노인을 번갈아 본 후 한립을 보며 크게 웃었다.
“핫하하! 새로 들인 제자가 과연 남다르구나. 다른 것은 그렇다 치고 의식은 네 손자 녀석보다 몇 배나 강력하니 잘만 키우면 가능성이 있겠어. 하하하!”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극음과 청 노인은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극음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만 형,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별다른 의미는 아니고 네 기명제자가 확실히 괜찮으니 내게 넘길 생각은 없는지 묻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탁천마공을 전수받는 것이 더 적합할 듯 하니 말이야.”
만호자의 거침없는 언사에 극음 사조와 청역 거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청역 거사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방금 극음 선사 문하에 든 한 선사가 어찌 쉽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만호자가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돌연 서늘하게 물었다.
“헤헤, 싫으면 됐다. 나도 제자를 받으면 귀찮아만 질 것이니. 그런데 극음의 제자 일에 청 선사가 더 난리군?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
청 노인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으나 재빨리 담담한 눈빛으로 극음을 보았다.
극음도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가 잠시 침묵했다.
“만 형이 기왕 물어보셨으니 속이지 않겠습니다. 새로 얻은 제자는 내전에서 보물을 취할 때 꼭 필요한 아이니 눈에 거슬리셨더라도 봐주시길 바랍니다.”
극음 사조의 말에 한립은 울적해졌다.
‘자신이 언제 만호자의 눈에 거슬릴 일을 했단 말인가? 그가 대청에서 옥기둥을 가로채서 날 열 받게 했을 뿐!’
만호자가 손을 휘저으며 유유히 말했다.
“처음 보는 자인데 눈에 거슬리다니? 단지 특이한 공법을 익힌 듯해 시험을 해보았을 뿐이다. 게다가 겨우 결단기 선사를 내전에 데려가 무얼 하겠다는 것이지? 거짓으로 날 기만하려 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
극음이 눈썹을 꿈틀하더니 청역 거사를 향해 눈짓했다. 청역 거사가 미소를 짓더니 입술만 움직여 만호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만호자가 두 사람의 괴이한 행동에 처음엔 무시하는 눈빛을 보내다가 점점 안색이 변해 한립을 쳐다보았다. 이어 자신도 입술을 달싹이며 노인에게 무언가를 묻더니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눈을 가늘게 뜬 만호자가 칼날 같은 시선으로 극음 사조를 향해 음산히 중얼거렸다.
“어쩐지 웬 제자인가 했더니……. 흥! 아주 머리는 잘 돌아가는구나!”
“화내실 일은 아니지요. 만일 만 형께서 먼저 아셨다 해도 이렇게 하셨을 것 아닙니까? 게다가 이미 사실을 밝혔으니 당연히 저희 두 사람이 독식할 생각은 없습니다. 내전에서 만 형의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만호자도 잠시 생각을 하더니 안색이 풀어졌다.
“그것은 그렇지. 만일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만천명 등 저 위선자의 무리가 보물을 가져갈 가능성이 높을 게야. 일단 보물을 얻는다면 어찌 배분할 지부터 말해 보거라.”
청역 거사가 미리 생각을 해두었는지 지체 없이 답했다.
“똑같이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 선사를 포함해 네 등분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만호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청역, 나를 얼간이 등신 취급하느냐? 네 사람이 똑같이 나누자는 말을 꺼내다니. 이후 만천명은 네가 맡을 모양이구나!”
그의 말투엔 조소가 가득했다. 청 노인이 상대의 기분 나쁜 말투에도 아랑곳 없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아이구! 만 형, 화내실 것 없습니다. 저도 조금 아닌 것 같다 생각했으니 의견을 제시해 보시지요.”
“너희가 어찌 나누어 가질지는 관여치 않겠다. 다만 나는 반은 반드시 가져갈 것이야. 만천명은 홀로 너희 둘을 상대할 만 한데 내가 그자를 맡을 것이니 반절도 많다 할 수는 없겠지.”
반절을 달라는 만호자의 말에도 극음이나 청 노인은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분명 상대가 이리 나올 것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극음이 서두르지 않고 이견을 제시했다
“반절이라니요? 만 형께서 너무 배불리 드시고 탈이 날까 걱정입니다. 제 제자의 조력이 없다면 성공률이 극히 낮을 것이니 그의 몫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흥! 겨우 결단기 선사와 몫을 나누란 말이냐?”
“헤헤! 그냥 결단기 선사였다면 당연히 허천정 안에 보물을 나눌 자격이 없겠습니다만 극음도의 제자라면 말이 달라지지요. 그도 한 몫을 챙겨야 할 것입니다.”
극음 사조도 이 점에 한해서는 물러설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만호자가 말을 꺼내려다가 노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하시지요! 그만들 다투시고 나중에 보물을 공평히 다섯 등분해 만 형이 두 몫을 차지하시고 나머지는 오분의 일씩을 가집시다. 그럼 어느 정도는 공평하다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노인의 말에 만호자가 주춤하더니 수염을 쓰다듬었다. 극음이 바로 동의했다.
“그것 좋은 생각입니다. 만 형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그러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처음 제안보단 훨씬 낫군.”
그도 극음과 청 노인이 벌써 말을 맞춘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정한 최후의 선이라면 괜히 소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마도 노괴들이 아직 얻지도 못한 보물 배분으로 입씨름을 하는 동안 만천명 등도 보물에 관해 이야기 하는 중이었다.
천오자 도사가 약간 걱정스레 물었다.
“만 문주님, 금사잠을 이용해 허천정을 얻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리라 여기십니까. 이전의 선배 고인들이 무수히 시도했으나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일이라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만천명은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걱정 마시지요! 금사잠 만으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할 수는 없으나 미리 천청화(天靑花)를 구해놓지 않았습니까. 금사잠 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으면 복용을 시켜 가능성을 10분의 3, 4 정도로는 끌어올 릴 수 있을 것입니다.”
“빈도도 알고 있으나 마음이 불안해서 그럽니다. 부끄럽게도 수행이 부족해 아직도 욕심을 부리는 꼴이지요.”
“허허, 허천정 같은 보물은 천성쌍성 그 노괴들이라 해도 탐낼 것인데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수도를 하고는 있다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욕망이 없는 신선은 아니니까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농부 차림의 선사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만 문주님, 마도 무리들은 무엇을 속삭이고 있는 것일까요? 방금 전까지는 분위기가 험악하더니 지금은 웃고 떠들고 난리입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마도인들이야 수련하는 마공이 강한 만큼 정신이 이상해질 가능성도 높은 이들 아닙니까. 그들의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것이야 일상다반사이지요. 다만 허천정에 관해서는 우리가 갖지 못하더라도 저들의 손에 들어가게 두어서는 절대 안 될 것 입니다. 어쨌든 극음의 변종 화망 역시 보물을 구하는데 유리한 영수 중 하나니까요.”
천오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만 문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만일 허천정이 마도인들 수중으로 떨어진다면 그들의 세력이 불길처럼 타오를 것이 분명합니다. 마침 성궁의 세력이 가장 약한 시점에 난성해가 마도 세상이 되게 두고 볼 수는 없지요!”
만천명이 이어서 무어라 말하려는데 거산 방향에서 붉은색과 푸른색 빛이 치솟았다. 그리고는 협곡 입구에 가까이 있던 절벽이 요동을 치며 두 개의 통로로 갈라졌다. 협곡 내부로 통하는 문이 틀림없었다.
두 통로 앞에 돌연 비석이 솟아올랐다. 하나에는 현정로 또 하나에는 용암로라는 고대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용암로라 적힌 통로에는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의 열기가 쏟아져 선사들의 입을 마르게 했고, 현정로에는 추운 기운이 넘쳐흐르며 광풍이 불어와 선사들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두 통로가 나타나자 극음 사조는 몸을 일으키더니 관심 가득한 목소리로 한립을 향해 물었다.
“그럼 가자꾸나. 빙화도 끝에서 다시 만나면 되겠다. 내 비록 널 데리고 통과는 못해 주지만 한기나 열기를 막은 물건 몇 가지를 내줄 수는 있다.”
한립은 귀무를 통과하며 자령 선자에게 빙화도에 대해 정보를 얻었었다.
일단 통로를 선택하면 결계에 의해 자동으로 대협곡 안에 보내진다. 다른 사람과 같은 곳에 떨어질 확률이 극히 낮았기에 극음이 이리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생각 끝에 한립이 조용히 말했다.
“용암로로 가겠습니다. 마침 열기를 막아줄 만한 옷이 있어서요.”
“그러려무나. 이것을 가져가면 이번 관문 통과가 어렵지는 않을 게다.”
극음은 주저 없이 남색 옥패를 꺼내주었다. 그 모습에 만호자가 비웃었다.
“줄곧 좀생이처럼 굴더니 아주 오랜만에 인심을 쓰는구나. 귀한 백서패(白犀佩)를 다 내주고.”
극음 사조는 화를 내기보다는 웃으며 말했다.
“제자의 수행이 낮으니 사부된 도리로 돌보는 것이 당연하지요. 백서패가 귀하다지만 전 현정로를 가려 하니 당장은 무용지물입니다. 만 형에게도 귀한 한빙주(寒氷珠)가 있다 알고 있는데 잠시 빌려주시는 것이 어떨지요? 선사도 제 제자가 내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무슨 일을 당하길 원하진 않으실 테니 말입니다.”
“흥! 허천정을 얻기도 전에 죽어나가게 할 수 없지. 이 한빙주는 이전에 잉어 요수인 한리(寒鯉)를 잡아 얻은 것인데 네 녀석이 덕을 보겠구나.”
말을 끝낸 만호자가 품을 뒤져 하얗고 부드러운 구슬을 꺼냈다. 엄지 손톱만한 구슬이 곧 한립 손에 들어왔다.
한립은 기쁜 마음에 연달아 예를 올렸다. 비록 두 노괴들이 자신의 혈옥지주 때문에 이런다는 것은 알았지만 일단 용암로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흡족했던 것이다.
백서패와 만호자의 한빙주는 똑같이 하얀색이었지만 구슬을 받고는 극심한 한기에 한립이 놀라 떨 정도였다.
가만히 이를 지켜보던 청역 거사가 미소를 짓더니 현정로 안으로 사라졌다. 다른 선사들도 조용히 자신이 선택한 협곡의 길로 들어갔다.
일각이 흐르자 벌써 모여 있던 반절이 줄어있었다. 극음이 한립을 보며 인자하게 말했다.
“한립 먼저 들어가거라. 며칠 후 협곡 끝 전송진에서 보자꾸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 한립은 예를 취하고 용암로라 쓰인 비석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마음이 약간 초조해졌다. 현골 마두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도망간 건 아니겠지? ’
열 길 물속보다 한 길 사람 속이 더 알기 어려운 일 아닌가!
정말 현골이 그렇게 나온다면 자신도 최악의 순간 그에 대한 정보를 팔아버릴 작정이었다. 한립의 눈에 흉흉한 기세가 스쳤다. 아마 그 눈빛이 누군가를 놀라게 했는지 돌연 귓가에 현골의 목소리가 울렸다.
“부근에 숨어있으니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 말거라. 빙화도를 통과하면 찾아가마.”
그 말을 끝으로 현골의 목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한립이 성큼성큼 통로로 향했다. 뜨거운 바람이 그를 맞이하며 누구든 말라 죽일 기세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잠시 눈썹을 끌어올린 그가 전방을 주시했다.
통로는 두장 정도 높이로 그리 넓지 않았으나 은은히 분출되는 붉은빛이 눈길을 끌었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그는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그러나 엄청난 고온에다 쉼 없이 불어 닥치는 열기에 이미 얼굴 피부가 벗겨질 것 같았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물의 속성의 방어막을 펼쳤다.
푸르스름한 방어막 속으로 들어가자 타 죽을 것 같던 열기가 크게 줄었다.
이어 저물대를 뒤져 푸른빛이 도는 벽화보의를 꺼내 들었다. 바로 귀무 속에서 죽은 선사에게 벗겨낸 열기를 피하는 옷이었다.
그가 옷을 걸치자마자 서늘한 한기가 전해져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열 걸음 정도 더 걸어가자 눈앞이 확 밝아지며 붉은빛이 그를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