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245화. 의외의 사건
원영기 선사가 그가 지닌 혈옥지주를 탐낸다는 것은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마음이 불편해도 자신을 바라보는 극음 사조의 눈빛에 한립은 그러겠다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
그가 허리에 걸어둔 영수대 하나를 풀었다. 곧 하얀빛이 영수대에서 분출되어 한립 앞에 내려앉았다.
빛이 가시자 맷돌만한 하얀 거미가 나타나 흉흉한 얼굴로 곳곳을 살폈다. 거미가 등장하자 극음 사조는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혈옥지주였어! 하하하…….”
한참 후 극음 사조는 기이한 눈빛은 거두었지만 웃음만은 여전했다. 그 소리에 주변의 공기가 다 울려 한립의 안색이 살짝 달라졌다.
원영기 선사의 법력은 심오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한립은 상대가 곧 화제의 요점을 제시하리라 생각했기에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극음 사조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의 귓가에 현골의 초조한 음성이 전해졌다.
“어찌 혈옥지주를 지니고 있단 말이냐! 처음부터 노부에게 이야기를 했어야지!”
답답해 죽겠다는 목소리였다. 한립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화가 치밀었다.
“제가 무엇을 지녔는지를 어찌 당신에게 알려야 합니까?”
하지만 극음에 이어 현골까지 이상하게 나오자 혈옥지주에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것은 확실해 졌다. 다만 이것이 그에게 화가 될지 복이 될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막 이런저런 사실들을 헤아려 보는데 현골의 전음이 다시 울렸다.
“극음은 분명 내전에 같이 가자 청할 것이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내가 몰래 뒤따르마.”
아마 한립의 기분이 상한 것을 알아챘는지 현골의 음성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한립은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만일 혈옥지주 때문에 난전에 끼어들었다 큰일이라도 당하면 어쩐단 말인가! 극음이 결국엔 입을 열었고 현골의 예감은 적중했다.
“한립, 내전에 가볼 생각은 없더냐? 원한다면 내가 안전하게 데리고 다녀와 주마.”
“내전을 말입니까?”
유혹을 하는 중년인의 말에 한립은 화들짝 놀랐다. 결단기 수사에게 내전은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보물이야 많겠지만 그에 비례하여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허천전에 대한 정보를 듣자마자 배제시킨 곳이었다. 방금 원영에 큰 도움이 되는 구곡영삼을 얻은 마당에 괜히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극음이 안전하게 데리고 다녀온다는 말이나 현골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란 말을 믿고 따를 마음이 없었다.
목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한립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거절했다.
“완배의 수준에 내전은 가당치 않습니다. 저는 앞의 두 관문이나 경험해 보고 돌아갈 예정이라 내전은 안 가도 될 듯합니다.”
그 말에 극음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동시에 오축이 노한 얼굴로 질책했다.
“한립, 당초 사조께 우를 범한 것도 죄를 묻지 않았건만 이런 제안을 거절해? 감히 우리 극음도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더냐!”
극음 역시 오축을 막지 않고 불쾌하단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립은 말이 없었다. 그의 귓가에 재촉하는 현골의 말이 연달아 들려왔지만 이리 쉽게 휘둘릴 수는 없었다.
“가지 않겠습니다. 오 도주님께서 저를 내전으로 불러다 무엇을 하려는 지는 모르나 당연히 저를 위해서는 아니겠지요. 완배는 정말 안전하게 이곳을 둘러보다 나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오축의 작은 두 눈에 흉악한 기운이 어렸다.
“흥! 가고 안 가고가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으냐? 안 가겠다면 본 소주가 널 멸하겠다. 성궁 사람들의 말 때문에 감히 손을 쓰지 못할 거라 여기지 말거라!”
사실 사조가 미리 언질을 주어 위협하고 있는 것이기는 했으나 오축은 정말 한립이 거슬렸다.
이런 악감정에는 이유가 없었다. 한립 역시 그에게 호감이 있을 리 없으니 차갑게 그를 주시한 후 극음 사조에게 직접 말했다.
“선배님께서 영수가 왜 필요하신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영수의 주인이 죽으면 통제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지요. 게다가 위험에 처하면 혈옥지주에게 자폭을 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위협을 담은 말에 중년인이 조금 놀란 듯 했다.
한립은 이 담판의 진정한 대상은 극음인 것을 알았기에 괜히 오축과 입씨름할 필요가 없다 여겼다.
하지만 오축은 이런 무시에 열이 받았는지 얼굴이 험악해지며 무언가 소리치려 했다. 그때 극음 사조가 팔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영리하고 담도 큰 후배라…… 본 사조가 네 혈옥지주를 이용하고자 하니 너도 헛걸음을 하게 하진 않을 것이다. 내전에 이르면…….”
극음이 조건을 말하려는데 돌연 얼굴을 굳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느 곳을 노려보더니 매섭게 소리쳤다.
“감히 누가 엿듣고 있느냐!”
날카로운 음성엔 살의가 담겨 있는 것이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한립은 다른 이유로 흠칫 놀랐다. 혹시 현골이 들킨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자신은 어찌 대처해야 할 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주 나이 많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그리 화낼 것은 또 무엇입니까. 우연히 지나는 길일뿐인데 공격이라도 할 기세입니다.”
푸른빛이 반짝거리더니 수십 장 밖 허공에서 학사 차림의 노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웃음기 어린 눈을 가늘게 뜨고 극음과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극음과 종일 같이 있던 청역 거사였다. 노인을 본 극음이 살기는 감추었지만 얼굴이 구겨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청 선사 날 미행한 겁니까?”
“미행이라니요? 그저 주변을 돌아다니다 멀리서 오 선사와 어린 친구가 한담을 나누는 것을 보고 인사라도 할까 해서 들른 것이지요. 선사가 이리 불쾌해 할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 걸 그랬습니다.”
“…….”
그가 변명을 하든 말든 극음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혈옥지주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청역 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혈옥지주라니, 정말 얻기 어려운 영수입니다. 이전 선배 선사들의 말에 따르면 허천정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영수 중 하나라 했으니 오 선사의 화망(火蟒)이나 만천명의 금사잠(金絲蠶)보다 훨씬 성공확률을 높여 주겠습니다.”
“주변을 돌아다녀? 인사를 하러 와? 그런 자가 은신술을 펼친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느냐!”
노인의 어처구니없는 해명을 들은 극음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게다가 자신이 숨기려던 혈옥지주의 비밀까지 드러나자 더욱 얼굴이 굳었다.
학사 차림의 노인은 하얀 거미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한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선사가 오 아우가 신경 쓰던 그 후배였구만. 늙은이가 항상 담력과 식견이 있는 젊은이를 문하로 들이고 싶어해왔는데 이번 기회에 나를 스승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
“저를 제자로 삼아주신단 말입니까?”
한립은 이 일을 기뻐해야 할 시점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극음이 한기가 서린 얼굴로 검은 기운을 내뿜으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내뱉었다.
“청 선사. 그게 무슨 뜻이오.”
“허허! 농담을 좀 했을 뿐인데 뭘 그리 긴장을 하십니까. 만일 저 선사를 제자로 받아들인다면 극음 아우가 가만있지 않겠지요. 하지만 만호자가 이곳에 혈옥지주가 있는 것을 안다면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청역 거사의 말에 극음 사조의 표정이 풀리다가 만호자를 언급한 부분에선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일단 혈옥지주를 얻은 사실을 숨기고 다른 이들을 선동해 정도인들과 싸우게 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서로 싸우다 원기를 크게 상한 틈을 타, 한립의 혈옥지주를 이용해 은밀히 허천정을 가지고 나오면 보물을 혼자 독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는 이전에 다른 이들의 몫을 챙겨주겠다는 말은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계획이 눈앞의 늙은 여우에게 들키기 전까지는 말이다.
상대를 죽여 입막음을 하는 것도 성공할 확신도 없었다. 게다가 성공 가능성이 높아도 만천명 등의 정도 세력을 상대하려면 경거망동 할 수 없었다.
만호자의 탁천마공(托天魔功)의 위력은 극음도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다. 극음이 천도시화(天都尸火)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지만 상대와 대등한 대결을 펼치리란 자신은 없었다.
만일 상대가 청 노인처럼 한립을 문하로 들이겠다면 자신은 어쩔 도리가 없다. 청 노인이 이미 혈옥지주에 대해 알아버렸으니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는 안색을 바꾸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상대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챈 것이다. 학사 노인도 극음의 그런 반응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전음을 보내는 듯 했다.
극음의 표정이 묘했다.
노인이 전음으로 전한 말은 아주 간단했는지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의견이 어떠하신가?”
극음이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단번에 동의했다.
“그러지요. 그 의견대로 하겠습니다.”
만족스런 표정의 노인이 한립에게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히 말했다.
“그럼 우리 둘 중에 누가 저 선사를 제자로 들여야 하겠습니까?”
“스스로 고르게 하시지요. 그래야 공평할 듯 합니다.”
노인은 극음의 말에 일순 이상하단 얼굴을 하였으나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모습을 본 극음이 미소를 띠더니 고개를 돌려 한립에게 말했다.
“이미 들었으니 알겠지만 네 혈옥지주는 보물을 찾기 위해 아주 중요한 영수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지.
만일 네가 영수의 주인이라 내가 어쩌지 못하리라 본다면 완전한 착각이다. 본 사조는 영수를 강시로 제련하는 법을 익혔으니 그저 혈옥지주를 죽여 요시(妖尸)로 만들면 그 뿐이다.
다만 이렇게 하면 혈옥지주의 수행이 크게 줄어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이런 방법을 쓰고 싶진 않다. 만일 일이 끝난 이후 불이익을 당할까 두렵다면 우리 둘 중 하나의 제자로 들어 오거라.
그럼 한 식구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찾은 보물의 일부도 나누어주마. 똑똑한 자이니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 잘 알 것이야.”
차분한 말투로 위협 반 유혹 반의 말을 늘어놓은 극음이 한립을 바라보았다.
한립은 마음속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청 노인이 나타나자 둘이 치고 받고 싸우며 자신이 달아날 기회를 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활한 늙은이들이 이리 간단하게 합작을 해버릴 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 현골이 나선다 해도 승산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혈옥지주로 상대를 위협하는 것도 별 쓸모가 없는 듯했다. 그가 자폭을 지시하려 해도 그 전에 상대가 자신을 제압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살 길이 있는데 괜히 원영기 수사들을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한립이 막 입을 떼려는데 귓가에 청역 거사의 전음이 울렸다.
“한립, 노부는 한 번도 제자를 받은 일이 없고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느니라. 만일 내 문하로 들어온다면 법보 등 일체의 보물들을 전수받게 될 게야. 이렇게 엄청난 기회는 평생에 다시없을 게다.”
그의 말은 유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상대의 말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마음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청 노인의 말을 고려 해보기도 전에 이번엔 극음 사조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청 노괴가 무엇을 약속했는지는 모르나 내 한 가지만 일러주마. 노괴는 산수 신분이라 홀로 황량한 섬 하나를 독점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모든 것을 다 네게 넘겨도 별 게 없으리란 말이지.
하지만 극음도는 전혀 다르다. 선사도 많고 세력도 강해서 본 사조의 직전제자가 되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네가 원한다면 아름다운 여종부터 진귀한 연단 재료까지 무엇이든 고를 수 있게 해주마. 보아하니 묘음문 자령이란 계집과 가까이 지내던데 만일 마음이 있다면 그 아일 잡아와 반려로 맞게 해줄 수도 있다.”
극음은 아주 직설적으로 단숨에 수많은 조건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