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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새처럼 난다(1)
암흑십상을 태운 두 대의 마차가 호북에 도착했다.
그들을 호위한 것은 백표와 흑표대였는데,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한 은밀히 이동해서 호북에 도착했다.
마차가 무한에서 멀리 떨어진 장원으로 들어섰다.
이곳에도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흑암거해진과 같은 최상급의 진법은 아니었지만, 어지간한 외부의 침입은 막아낼 수 있는 상당한 수준의 진법이었다.
갈사량은 암흑십상의 남은 여덟 명의 재산을 흡수하면서, 그들을 수용할 안가를 미리 준비해둔 것이다.
호북의 안가는 이제 세 곳이 되었다. 첫 번째가 여인들이 기거하고 있는 섬의 안가, 아버지와 송우경, 갈사량이 머무는 두 번째 안가. 이곳이 세 번째인 것이다.
마당에 들어선 암흑십상이 다소 두려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이런 상황이 되어 본 적이 있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이 내키지 않았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꾹 참고 있는 것이다.
그들 앞에 선 백표가 말했다.
“이곳에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진법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상당한 수준의 진법이니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암흑십상은 안도가 아니라 다른 의미의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비단 이 진법이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함만이 아님을.
“대신 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냥 들어섰다간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니 절대 제 허가 없이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알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아, 그리고 죄송하지만 당분간 여러분들의 내공은 제압해두겠습니다.”
흑표대 무인들이 그들에게 다가오자 암흑오상이 조심스럽게 항의했다.
“수하들도 다 쫓아냈으면서 그나마 있던 내공까지 제압하겠다는 거요?”
어차피 상인들이라 그리 대단한 내공이나 무공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확실히 있었다. 게다가 왠지 죄인 취급 받는 불쾌감이 있었다.
하지만 백표는 단호했다.
“죄송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킨 사람은 암흑이상이었다.
“그럽시다. 어차피 우리 목숨 그대들에게 맡긴 것, 마음대로 하시오.”
모두들 암흑이상의 말을 따랐다. 불만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백표는 그들을 대하는 데 인정을 두지 않았다. 상대는 악덕상인들이었다. 호의를 베풀면 어떻게든 그것을 이용해 먹을 것이 분명했다.
흑표대 무인들이 와서 그들 모두의 단전을 제압했다.
암흑오상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벽공자를 보고 싶소만.”
불러서 따지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암흑대상과 백표 모두를 보고 한 말이었다. 대답을 한 사람은 백표였다.
“때가 되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자, 안으로 들어들 가시죠.”
상대가 이렇게 사무적으로 나오자 더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백표의 안내에 따라 암흑십상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은 흑표대 이 개 조 사십 명이 주위를 지켰다.
“두 명이 한 방을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암흑십상이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들이 바친 돈을 생각하면 이런 대접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 좋은 장원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 여러분들이 적들에게 노출될 확률이 그만큼 더 늘어나겠지요. 이 정도도 특별히 배려한 것입니다.”
백표의 말에 이번에는 암흑대상이 분위기를 바꿔주었다.
“다들 예민한데 차라리 둘이 낫겠지. 적적하지도 않을 테고.”
그가 방으로 들어서자 암흑이상이 뒤따라 들어갔다. 다른 암흑십상들도 각각 가까운 사람들과 짝을 맞춰서 들어갔다.
복도 양쪽 끝에 각각 두 명씩을 배치한 후 백표가 밖으로 나갔다. 강력한 진법에 사십 명의 흑표대라면 이들은 절대 달아날 수 없을 것이다.
방 안에 들어선 암흑대상이 침상에 걸터앉았다. 암흑이상이 그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대상.”
“왜 그러나?”
“벽리단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재산을 다 뺏으려 들 겁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은 천왕군을 상대해야 하니 당장 본색을 드러내진 않을 것이네.”
“과연 벽리단이 천왕군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알 수 없네. 하나 어차피 벽리단에게 붙은 이상, 그가 이기기를 바라야지.”
암흑이상이 한숨을 내쉬며 심정을 토로했다.
“정말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마치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는데 맨손으로 다음 싸움을 기다리고 있는 기분입니다. 싸움에서 이긴 호랑이가 잡아먹을 때까지 말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지 않나? 게다가 우린 당분간은 먹히지 않을 꽤 괜찮은 먹잇감을 가지고 있지.”
정황으로 볼 때는 그 먹잇감이 천왕군과의 싸움이 되겠지만, 암흑이상은 그것이 나머지 여덟 명의 십상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까지 포함될 수도 있었고.
“그런 속담은 모두가 알지만, 정작 주변에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살아 돌아온 사람을 본 적이 없지요.”
암흑이상의 말에 암흑대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다 함께 죽어버리도록 만들어야지.”
“과연 그럴 방책이 있겠습니까?”
한 올의 희망이라도 찾으려는 암흑이상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며 암흑대상이 나직이 속삭였다.
“벽리단이 이기면 사용하려 했던 한 수가 있다고 했지? 여차하면 그것을 사용해야지.”
* * *
천란이 열리면서 무인이 몸을 일으켰다.
천란에서 만들어진 일곱 번째 암흑천병기였다.
놀랍게도 그는 강호에서 알려진 사람이었다. 검술로 유명한 일검장의 장주 도양명이었다.
무림맹주 마철군을 만나러 왔다가 술을 함께 마셨던 그였다. 술에 탄 강력한 미혼약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그는 암흑천병기로 재탄생된 것이다.
그는 예전의 일을 모두 기억했다. 가족과 친구들, 수하들과의 모든 일들을.
하지만 그에 대해 기억만 할 뿐, 어떤 감정도 지니지 않았다. 그리워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떠올리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오직 천왕군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이제 그는 목이 떨어지지 않는 한 죽지 않는 엄청난 치유능력에 기존의 무공을 더욱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는 암흑천병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강력한 암흑천병기가 이미 일곱 구나 만들어졌지만 천왕군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분노를 터뜨렸다.
“이제 겨우 두 기의 천란만이 완성되었다. 이래가지고 언제 암흑천병기를 대량생산할 수 있겠느냐?”
앞에 선 보고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천란을 여러 기 동시에 제작하기에 지원되는 돈이 턱없이 모자랍니다.”
“핑계 따윈 듣고 싶지 않다.”
퍽!
천왕군의 주먹에 사내의 머리통이 박살 나버렸다. 머리를 잃은 몸통이 뒤로 넘어갔다. 뒤에 있던 연구원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이제 천왕군의 불호령이 옆에 서 있던 천소선에게 떨어졌다.
“아직도 지하상계 놈들을 찾지 못한 것이냐?”
“상계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중입니다만 놈들이 워낙 치밀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핑계 따윈 듣고 싶지 않다!”
다음 순간 천소선이 움찔했다. 앞서 저 말을 하고 나서 사내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머리통을 날려버리진 않았다.
대신 날아든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감히 눈을 마주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천왕군의 눈빛이 그녀의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지만 천소선은 그 눈빛의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비단 성적인 욕망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의 짜증과 분노가 함께 뒤섞여 있었다. 정말이지 온몸이 따끔거리는 그런 눈빛이었다. 까닥 잘못했다간 일수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그 몸뚱이를 팔아서라도 돈을 구해와라. 당장 천란의 수를 늘리도록!”
“알겠습니다.”
더 이상 할아버지라 여기지 않았기에 몸을 팔라는 말에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과 그와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끝장이 날 순간이 멀지 않았음을 느꼈다. 물론 박살 나는 것은 자신의 머리통이 될 것이다.
‘우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란의 수부터 늘려야 해.’
* * *
그 시각 나는 무림맹이 내려다보이는 하늘에 떠 있었다.
저 멀리 무림맹의 내전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날아가서 천왕군과 승부를 보고 싶었다. 십일 갑자의 웅혼한 내공이 단전에서 꿈틀거렸다.
그를 죽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면?
내 주위의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놈의 실력을 정확히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실력을 안다고 해도 싸움의 결과가 그대로 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나 나나 인간의 경지를 넘은 무공이었기에, 싸움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또한 겉으로 느껴지는 실력과는 달리 어떤 숨겨진 수법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고.
현재 마신결은 팔 성이었고, 마신영풍보는 칠 성이었다.
팔 성의 마신결을 대성으로 만들기만 하면 놈은 확실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이봐, 천광이.]
[왜?]
[무공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 없나? 천기심환공보다 강력한 공간을 만들 수 없을까?]
[그건 쉽지 않아 보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정파에는 그런 무공이 없어서.]
[알았어. 한번 방법을 찾아보지.]
[역시!]
[역시 뭐? 잡은 물고기라고?]
[바다지, 바다. 물고기는 나고.]
[말이나 못하면.]
그때 저 멀리 누군가가 맹주전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는 사람이었다.
저 여인은?
* * *
맹주전 지하 밀실에서 나온 천소선이 향한 곳은 마철군의 거처였다.
마철군은 그녀의 방문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깊은 절망감이었다.
“왜 왔소? 내가 병신 짓 하는 것 구경하러 오셨나?”
“누군가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죠.”
“흥! 살아남으라고 해놓고, 고작 내게 시킨 일이 이런 것들이오?”
자신이 초대한 사람이 지하로 끌려간 이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좋은 꼴을 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제 뜻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내 뜻도 아니잖소?”
“어차피 불가피한 희생은 막을 수가 없어요. 멀리 보고, 크게 보세요.”
“웃기는군. 코앞에서 난리가 나고 있는데 멀리 보라고? 이보다 더 큰 일들이 어디에 있다고 크게 보라는 거지?”
“하하.”
“웃어? 지금 웃음이 나오나?”
“당신 꽤 웃기는 사람이란 것 알아요? 당신, 재치 있어요.”
“뭐? 이런 미친!”
마철군이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활짝 웃는 천소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는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상태였다.
천소선이 이런 애교를 떨 수 있는 것은 순간적으로 발휘된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내와 여인의 모습을 모두 가진 채 성장해왔다. 대부분 사내로 살아왔지만 동시에 마음속에서 이 여인도 함께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인은 숨겨왔던 매력을 아낌없이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마철군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는 순간.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이 상황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돈이 필요해요. 그것도 많이.”
그녀의 말에 마철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당신은 대체 어떻게 돼먹은 사람이오?”
“미안해요. 하지만 그 돈을 구하지 못하면 저는…….”
“닥치라고!”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 지난 후 마철군이 물었다.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
“천왕군에게 당하고 말 거예요.”
“당하다니?”
“그는 제 몸을 노리고 있어요. 이미 느꼈겠지만 그는 제 할아버지가 아니에요.”
“빌어먹을!”
다시 정적이 흘렀다.
“얼마나 필요하오?”
“많을수록 좋아요.”
“알겠소. 본가인 천도문을 통해 최대한 구해보겠소.”
“고마워요.”
그녀가 이제 살았다는 얼굴로 마철군에게 다가가서 가볍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마철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힘껏 껴안았다.
그녀의 물컹한 가슴이 느껴지자 마철군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마철군의 손이 천소선의 가슴으로 파고들려고 할 때, 그녀가 손목을 잡고 제지했다.
“나중에요.”
그녀가 뒤로 떨어졌다.
“당신이 좋은 사람인 것 알아요. 그러니 순간을 참지 못해서 우리의 미래를 망치지 말아요.”
“알겠소, 미안하오.”
“다시 올게요.”
그녀가 밖으로 나갔다.
마철군이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쳐다보았다.
나는 허공에 떠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 천마의 대법이 있던 곳에서 만났던 그녀였다. 그녀는 그곳을 탈출하면서 천소선이 사용했던 지풍을 사용했었다. 천마를 통해 이미 그녀가 천소선임을 확인한 후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남녀 간의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사내놈들끼리 뭐하는 짓인가?]
[그만큼 천소선이 절박하다는 의미겠지.]
그 절박함에서 내가 본 것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