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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면 보이는 것(3)
북풍파에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신중한 성격의 장보를 보냈지만, 혹시라도 대룡문과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북풍파의 가주 용회찬(龍會燦)은 이번 일을 큰 기회로 보았다. 대룡문과 오랜 세월 감숙을 두고 다퉈왔지만, 최근 힘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도철방과 청하문이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평소라면 관심도 기울이지 않을 일이었는데, 이번 분쟁으로 판을 키울 생각을 했다. 서화는 자신이 오랫동안 눈독을 들여온 곳이었다. 지형적으로도 상대와는 멀고 이쪽과는 가까웠다. 애초에 그런 곳을 빼앗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부 때부터 서화는 대룡문의 지배하에 놓인 곳이었다.
이번 기회에 서화로 진출할 수만 있다면, 다시 힘 싸움의 우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연락이 없나?”
“네, 아직입니다.”
구회가 대답했다. 그는 장보와 함께 북풍파를 이끌어가는 대표 무인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차해서 크게 한판 벌어져도 우리는 절대 대룡문에 밀리지 않을 겁니다.”
구회가 큰소리를 쳤다.
“그래, 자네만 믿네.”
용회찬은 든든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크게 한판이 벌어져선 안 될 일이었다. 대룡문과 전면전이 벌어지면 서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결국 감숙의 세 번째, 네 번째 세력들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때 밖에서 수하가 큰소리로 보고했다.
“어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보고에 담긴 다급함에 놀라 용회찬과 구회가 밖으로 달려 나왔다.
마당에는 북풍파 무인들이 나와서 검을 뽑아들고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린 대문으로 누군가 들어서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대룡문의 문주 정락(鄭洛)이었다.
“정문주? 당신이 어찌 이곳에?”
용회찬이 기겁을 하며 놀랐다. 강호 일로 여러 차례 정락과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촉즉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집 마당에서 정락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다. 짐작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용회찬이 내공을 실어 크게 소리쳤다.
“기어코 우리와 전쟁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가 수하들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정락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게.”
“지금 목소리를 낮추게…….”
그때 정락의 뒤에서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용회찬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무림맹 감숙지단주 송이단(宋利團)이었다.
“송단주? 송단주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오?”
송이단 뒤로 감숙지단의 고수들이 줄줄이 들어왔고 백여 명이 넘는 지단 병력이 잇달아 들어와서 사방으로 도열했다.
송이단이 용회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무림맹주님께서 납시었소. 어서 내려와서 예를 갖추시오.”
“어이쿠!”
용회찬이 화들짝 놀라 신발도 신지 못하고 뛰어 내려왔다.
도열한 무인들 사이로 내가 걸어 들어왔다.
내 영웅담에 대해서는 강호가 떠들썩할 정도였지만, 아마도 용회찬이나 정락쯤 되면 오히려 믿지 못할 것이다.
내가 기도를 의식적으로 발산했다.
촤아아아아아악.
내 기도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함께 왔던 무림맹 무인들은 물론이고, 그곳에 있던 북풍파의 무인들, 그리고 정락과 용회찬에게 날아들었다.
거대한 기운이 그들 모두를 한순간에 옭아매었다. 그들은 아예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기도로 제압하는 것은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신위였다.
내가 용회찬 앞에까지 다가가서야 기도를 거둬들였다. 그제야 꼼짝하지 못했던 그들의 몸이 풀렸다.
“지엄하신 맹주님을 뵙습니다.”
용회찬이 뒤늦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고수면 고수일수록 내가 조금 전에 보인 수법이 얼마나 고매하고 대단한 수법인지 잘 알 것이다. 적어도 정락과 용회찬은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으리라.
“오랜만에 뵙소. 취임식 날 뵙고 오늘이 처음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감숙에 들렀다가 잠시 인사라도 드리려고 들렀으니 부담 갖지 마시오.”
“안으로 드시지요.”
“아니오, 나는 일이 있어 곧 가야 하니 잠시 걸으면서 잠시 담소나 나눕시다.”
“네, 그러시지요.”
정락과 용회찬과 함께 걸었다. 후원에 이르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자 두 사람도 긴장한 채 발걸음을 멈췄다.
“일문을 이끄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어디 무림맹을 이끄시는 맹주님에 비하겠습니까?”
정락의 말을 용회찬이 받았다.
“중원에서 맹주님의 칭송이 끊이지 않습니다. 실로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찬이시오.”
내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부드러운 기도로 그들을 대했다.
“서화에 내가 존경하는 어른이 있으시오. 백성원이란 분으로 내가 큰 은혜를 입었소.”
백성원이란 말에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이번 일의 시작이 백성원의 아들인 백소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분을 뵈려고 감숙에 왔던 것이오.”
“아, 그러셨군요.”
두 사람이 눈짓을 교환했다. 백성원과 관련된 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간 난리가 날 것이란 불안이 오갔다.
아니, 눈치 빠른 그들은 이미 내가 분쟁의 원인을 알고 왔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내가 비로소 하고자 하는 말을 꺼냈다. 이 정도로 끝내선 안 될 일이었으니까.
“강호의 문파들이 비극적인 파국을 맞는 경우가 여럿 있지요. 그중 가장 많은 이유가 뭔지 아시오?”
“무엇입니까?”
용회찬의 물음에 내가 단호히 대답했다.
“바로 욕심을 부려서요.”
내가 경고하듯 차가운 기도를 드러냈다. 두 사람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반면 서로 균형을 지키고 상생을 위해 노력하는 문파들은 쉽게 망하지 않소. 나 역시 그런 이들을 적극 지지하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탑을 쌓는 일은 힘든 일이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지요.”
그야말로 직접적이고 강력한 경고였다. 두 사람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들을 내려다보던 내가 차가운 기도를 거둬들였다.
“이번에 감숙에서 맹과 관련해서 사업을 하나 진행할 생각이오. 두 분이 힘을 합쳐서 맡아주시면 좋겠소만.”
“오!”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환하게 밝아졌다. 무림맹의 사업은 대부분 규모가 커서, 그 일을 맡아서 진행하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두 문파가 합심해서 잘 해내도록 하겠습니다.”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압적으로 화해를 권했으니, 그 보상을 내리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이끄는 무림맹이 얼마나 부정부패를 엄격하게 처리하는지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맹의 감시하에 바르게 일처리를 해야 할 것이고 그에 따른 정당한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강호를 살아온 이들이었다. 내가 오늘 무슨 의도로 이 자리를 만들었는지 충분히 알 것이라 믿었다.
“다음에 백선생을 뵈러 또 올 테니, 그때 봅시다.”
마지막까지 백성원을 언급해서 그를 잘 대하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이 정도 했으면 두 번 다시 천마의 가족과 관련한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 * *
서화를 떠나기 전에 비밀지부인 무관에 들렀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도정이 든든하게 대답했다. 워낙 강직한 사람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감숙의 가장 큰 문파들이 신경을 쓰고, 이곳 비밀지부가 지켜주고 있으니 이제 천마의 가족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오니 무관 마당에 수하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이제야 내 정체를 모두 알게 된 그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첫날 안내를 해준 진여홍도 있었다.
도정이 전하기로 그녀는 내가 무림맹주란 사실을 전해 듣고 거의 기절할 뻔했다고 했다.
내가 그녀 앞에 섰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덜덜 떨고 있었다.
“진무인.”
“맹주님. 미처 몰라 뵌 점,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는 무슨. 내가 정체를 밝히지 않았는데 자네가 어찌 알겠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심껏 나를 안내해줘서 고마웠네.”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진무인.”
“네?”
“내 외모가 어떻나? 소문대로 절세미남인가?”
내 질문에 그녀가 당황했다. 얼굴이 시뻘개져서 그녀가 대답했다.
“그, 그 이상입니다.”
“역시. 거짓말을 하니 말을 더듬는군.”
“아닙니다. 절, 절, 절세미남이십니다.”
“하하하.”
내가 크게 웃었다. 지켜보던 이들도 모두 웃었다.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본단으로 가겠다는 꿈, 포기하지 말게.”
진여홍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실력이 있으면 언제든지 도전할 수 있는 무림맹으로 내가 만들겠네. 한번 지방으로 빠지면 영원히 본단으로 갈 수 없다는 말도 옛말이 되게 해주겠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네! 맹주님! 절대 제 꿈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본단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네.”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하늘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 * *
천마와 난 술을 마셨던 그 언덕에 서 있었다.
청하문은 비상이 풀리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멀리 백소명과 조예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있었다. 한 번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다시는 경솔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설령 또 실수를 저지르면 어떤가?
젊은이들은 이런 일, 저런 일 겪어가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니까.
“어때? 만족해?”
“격조까진 모르겠고, 일처리가 나쁘지 않네.”
“하하하.”
내가 크게 웃었고 천마가 따라 웃었다.
“고맙다.”
“맹주친구 좋은 게 뭐냐? 이럴 때 써 먹는 거지. 자, 이제 놀러가자.”
“놀러가자니?”
“나랑 강호나 주유하자.”
“안 바빠? 맹주가 무슨 강호주유야? 나중에 해.”
“나중이 어디에 있나? 나중, 나중 하다가 어느새 늙어버렸던 우리 아닌가? 이번 삶은 그러지 말자고.”
천마의 눈동자가 격동했다.
“가도 돼?”
“돼. 미녀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경치 좋은 곳 구경도 하고.”
“무림맹은?”
“알게 뭐야. 알아서들 잘하겠지.”
내 말에 천마가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이런 무책임한 녀석 같으니라고. 마음에 든다. 딱 내 마음에 들어. 좋아, 가자.”
천마가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내가 뒤따라 날아오르지 않자 천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자면서? 안 가?”
천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려와. 뭐 바쁘다고 날아가? 걸어가자. 가다가 다리 아프면 마차도 얻어 타고. 그렇게 여행하자.”
“다리가 아프긴. 세게 걷어차면 세상도 망하게 할 다리면서.”
한마디 툴툴 거린 천마가 웃으며 내려왔다.
“그래, 걸어가자.”
“진짜 여행처럼.”
처음이자, 이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나는 천마와 그렇게 걸음을 옮겼다.
* * *
“사실이에요?”
수란의 물음에 나물을 다듬던 송화린이 잠시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뭐가?”
“맹주님이 전대 맹주와 여행을 떠났다는 것요.”
“맞아.”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전서를 보냈다면서요. 그것도 맞나요?”
“맞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면서 송화린이 다시 나물을 다듬기 시작했다.
“맙소사!”
수란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송화린을 쳐다보았다.
“괜찮으세요?”
“뭐가?”
“안 섭섭하세요?”
“뭐가 섭섭해?”
“아가씨와 함께 여행을 가지 않고, 다른 사람과 갔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
“맙소사! 진심으로 괜찮으시구나!”
송화린이 미소를 지었다.
“만약 내 행복만 생각하면…… 그래, 섭섭하겠지. 내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구나, 이런 원망이 들겠지.”
“당연히요. 누구나요.”
“하지만 누군가와 혼인한다는 것은, 혹은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마음 말이지. 자기가 행복하려면 혼자 살아야지. 자유롭고 편하게.”
“아!”
“그러니 내 행복을 뚝 잘라서 상대방에게 줘도 전혀 아깝지 않은 사람을 만나도록 해.”
수란이 감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아가씨 대단하세요.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요!”
“별걸 다 존경한다.”
다음 순간, 수란이 흠칫 놀랐다.
“헉! 그런데 나물이 다 조각조각 찢겼어요. 산산조각 내셨어요.”
갈기갈기 찢긴 나물을 내려다보던 송화린이 으스스하게 웃었다.
“이미 갔는데 어떻게 해? 기분 좋게 보내줘야지. 대신 돌아오면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