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멈추면 보이는 것(2)
천마와 청하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술을 마셨다.
술과 요리는 인근 객잔에서 넉넉히 사왔다. 밤새 마셔도 좋을 양이었다.
“캬, 술맛 좋다.”
천마와 마셔서인지 술이 꿀처럼 달았다. 근래 마신 술자리 중에 가장 기분이 좋았다. 마주앉은 천마가 불퉁한 표정만 짓지 않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을 테지만 말이다.
“제발 인상 좀 펴.”
“알았다.”
천마가 인상을 펴며 억지로 웃었다. 그 어색한 노력이 가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 와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어?”
“그냥 아무 일도 안 했어. 산속에 오두막을 하나 짓고 살았다. 가끔 내려가서 아들과 손자 녀석 보고 오고.”
그래서 특별지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새로 정착한 이들의 명단에 없었던 것이다.
“산에서는 뭐했나?”
“그냥 약초도 캐고 무공수련도 하고. 조용히 혼자 있으니 좋더군. 아, 그리고 산에서 영약도 몇 뿌리 발견해서 복용했다.”
“운도 좋네. 누군 평생 구경도 못하는 것인데 몇 뿌리나 발견하다니?”
“내 운이 어디 보통 운이냐? 이렇게 다시 살아가시는 운이시다.”
“하하하.”
내가 웃는 모습을 보며 천마가 따라 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도 나와의 이 오랜만의 술자리가 기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무공은 어떻게 되었나? 다 회복했나?”
“이제 어디 가서 맞을 일은 없지.”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는 이미 모든 무공을 다 회복한 상태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인이사가 나타나지 않는 한, 내가 판단할 때 그가 천하제일이었다.
물론 나는 제외하고서다.
나는 처음 그를 보는 순간, 그의 실력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사실 천마와 나 사이에도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났다.
내 무공은 천외천의 경지라 할 수 있었고, 고금제일이란 말이 붙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마신이 되었다면 더 강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인간들의 기준에서는 최고 중의 최고였다.
내가 일부러 죽으려 하지 않는 한, 이 세상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천마가 술잔을 비우며 담담히 말했다.
“몸이 젊어지면 많은 것이 바뀔 줄 알았는데, 정작 그렇지도 않더군. 나는 그냥 나일 뿐이다.”
그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육체의 변화가 주는 뭔가가 있다. 활기차고, 기분 좋고.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로 강력하진 않았다. 천마도 나도, 정신이 육체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래도 젊은 것이 좋지.”
“말하면 뭐하겠나?”
술잔 부딪치는 소리까지 경쾌하게 들리는 것이 젊은 몸이거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내 유일한 친구다. 송화린도 갈사량도, 백표도, 광두도 넓은 의미에선 친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친구는 천마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할 말과 하지 못 할 말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천마에게는 못 할 말이 없다. 어느새 우린 그런 사이가 되어 있었다.
술을 두 병쯤 비웠을 때, 비로소 내가 지금 상황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래,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보자.”
내내 마음속으로 그것에 대해 신경 쓰고 있었는지 천마가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 서화에는 청하문과 함께 도철방(刀鐵?)이 있다.”
청하문이 대룡문과 한편이라면 도철방은 북풍파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번 일의 핵심은 간단해.”
“혹시 여자 문제야?”
과연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문주에게 딸이 하나 있어. 도철방의 아들놈이 그 아이를 좋아했지. 한데 그놈이 우리 손주와 그 여자애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오해를 한 거지.”
“자네 손자는 이미 혼인을 했잖아?”
“그러니까 오해지. 우리 소명이가 그 딸아이의 호위를 맡았거든. 그 멍청한 놈이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이 폭발한 거지.”
“그래서?”
“놈이 우리 소명이를 협박하고 모욕했지.”
“받아쳤어?”
“소명이는 잘 참았어. 한데 여자애가 때렸지. 그 여자애 보통 성격이 아니었거든. 그러다 애들 싸움이 부모 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대룡문과 북풍파까지 나서게 된 거지. 내가 이번 일에 대해 알았을 때는 이미 일이 터진 후였고.”
“그랬군.”
원래 큰 싸움의 원인은 대부분 사소한 이유다. 원래 사람이 큰일은 잘 참아도, 오히려 작은 일을 참지 못할 때가 많았으니까.
천마가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번에 내가 가장 화가 났을 때가 언제인지 아나?”
“언제지?”
잠시 천마가 대답을 망설였다. 이내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내가 이번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한 가지뿐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었지.”
“다 죽여 버리는 것?”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외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더군. 자그마치 팔십 년을 살았던 인생이었는데 말이지.”
천마가 술을 비웠다. 내가 그의 잔을 다시 채워주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
“마찬가지였다니?”
“벽리단의 몸으로 태어나니 처음에는 뭐가 뭔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 자네 말대로 나는 정파 꼰대지 않나? 그 꼰대가 젊은 몸으로 태어났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아니다. 이제 넌 많이 변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변했지. 혹시 자네 그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아나?”
“어디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처음에는 광두와, 나중에는 부모님과, 송화린과, 검대원들과, 갈사량과 백표와, 그리고 지금 앞에 있는 천마에 이르기까지. 내 모든 변화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었고,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내가 이곳에 와서 당신을 찾을 때, 정착한 사람들부터 찾았어.”
잠시 말이 없던 천마가 말했다.
“산에서 살아선 안 되었군.”
“그렇다고 생각해. 관계를 통해 자네가 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다른 답을 생각해내지 못할 거야.”
천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하는지 잘 알 것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만 변할 수 있다는, 내 경험에서 나온 진심 어린 충고임을.
하지만 이 역시 강요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술잔을 들었다.
“그 역시 자네의 선택에 달렸지. 변화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느냐, 그냥 이대로 살아가느냐? 솔직히 나는 모르겠네. 그 변화가 자네에게도 정말 가치 있는 일인지, 정말 자네를 행복하게 해줄 것인지. 결국 자네가 선택할 일이겠지.”
천마가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우린 이런저런 또 다른 이야기들을 해가며 사온 술이 다 빌 때까지 마셨다.
* * *
다음 날, 우린 청하문에 와 있었다.
청하문주 조충(曺沖)과 조예란(曺藝蘭)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움직임을 눈치챌 수 있을 고수는 이 청하문뿐만 아니라 강호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북풍파에서 고수들을 보내왔다.”
“죄송해요, 아빠. 제가 참았어야 했는데.”
“이미 저질러졌는데 어쩌겠느냐? 다만……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책임을 져야 한다면 기꺼이 지겠어요.”
잠시 조충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침묵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조예란이 흠칫 놀랐다.
“설마? 백무인에게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죠?”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이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 않느냐?”
“아버지!”
조예란이 정색했다.
“제가 비록 급한 성질에 사고나 치는 천둥벌거숭이지만,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아끼고 또 우리 가문을 얼마나 위하시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할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예란은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비록 실수는 했지만, 그 실수를 남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음을 그녀의 다부진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래, 이 애비가 실수했다.”
“제가 놈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할게요. 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그러자꾸나. 쉽진 않겠지만 그렇게 풀어보자꾸나.”
우린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쳐 죽일 정도는 아니지?”
“그렇군.”
만약 천마가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질렀다면? 흥분해서 일 처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천마는 크게 느꼈을 것이다.
“이쪽 상황은 알았으니, 반대쪽 이야기를 들으러 가보자고.”
“좋아.”
번쩍하는 순간, 우린 그곳에서 사라졌다.
* * *
“이놈아! 네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사람은 도철방주 구소추(具昭秋)였다.
아들인 구황진(具黃璡)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둘이서 이상한 분위기였었습니다.”
“이 멍청아! 그 백소명이란 자는 일편단심 자신의 아내만 위하는 자라는 것을 듣고도 그딴 변명이더냐?”
구황진이 고개를 숙였다.
“네놈 말만 믿고 나섰다가 이 애비까지 이게 무슨 꼴이냐?”
아들 일로 나섰다가 말싸움이 나고, 조충과 손속까지 나눴던 것이다. 물론 서로 흥분해서 본의 아니게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 때문에 일이 커져버린 상황이었다.
“아버지! 저는…… 조소저를 좋아합니다. 조소저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이 멍청한 놈아! 할 수 있는 혼인도 이제 다 틀렸다.”
“아버지, 안 됩니다. 제발 저 살려주십시오! 조소저 아니면 안 됩니다.”
“북풍파는 대룡문의 영역에 들어갈 구실만 찾고 있었다. 우리가 그 빌미를 제공한 꼴이 되었으니, 이번 일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나버렸다.”
“아버지!”
“아들 하나라고 오냐오냐 키운 벌을 결국 이렇게 받는구나.”
구소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천마와 함께 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었다.
“여기도 쳐 죽일 정도는 아니군.”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던 천마가 조금 풀어진 어조로 말했다.
“내가 손주 때문에 노심초사 하는 것과 다르지 않군.”
결국 여기도 자식 때문에 고민이고 말썽인 것이다.
“그렇지. 위선적인 정파라고 욕을 해도, 그건 사파나 마교도 마찬가지지.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다 다른 법이지 않나? 그리고 정파인들이 가장 숫자가 많잖아? 자연 드러나는 과실도 많아 보이는 법이지. 하지만 대부분의 정파인들은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라네.”
천마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다들 비슷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 이번에는 칼자루를 쥔 쪽으로 가볼까?”
* * *
서하 인근의 한 장원에 북풍파 무인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이미 수십 명의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번에 무인들을 통솔해 나온 사람은 바로 장보(張報)였다.
“이번이 본파가 서화로 세력을 넓힐 절호의 기회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우렁차게 대답을 한 수하 중 하나가 물었다.
“한데 대룡문이 그냥 있지 않을 텐데요. 놈들이 나서면 어떻게 합니까?”
“마찰이 불가피하겠지. 놈들과 충돌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원칙이다. 대룡문 역시 우리와 정면충돌을 할 생각은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청하문을 최대한 압박해서 이곳에 본파가 진출할 교두보를 세우는 것이다.”
“네!”
우린 밖에서 무인들의 우렁찬 대답을 듣고 있었다.
“이들 역시 다 쳐 죽일 정도는 아니지?”
“그렇군.”
천마는 살짝 맥이 빠진 표정이었다. 이 정도 움직임은 보통의 문파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자파의 이익을 위해 밀고 당기고, 압박하고, 협상하고.
만약 자신이 눈이 뒤집어져서 다 없애버렸다면, 그야말로 죄 없는 자들을 모두 죽여 버린 것이 되었을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실수도 많이 했겠군.”
혈천마교에서는 조금만 거슬리면 힘으로 눌러버렸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그가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나도 내 치부를 드러냈다.
“지난 일에 너무 자책마라. 우리 정파도 어디 바르게만 살았겠나?”
천마가 고마운 눈빛을 드러내며 내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처리하지? 그냥 놔둬?”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 손자 일인데, 그럴 수는 없지.”
이번 일에 큰 악인이 없다 하더라도, 강호의 일에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천마의 손자가 이번 문제의 핵심에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번 일을 해결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처리해?”
“내게 맡길래?”
“당연하지, 이놈아.”
천마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믿음에서 오는 것임을 알았기에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자, 그럼 무림맹주답게 격조 있게 처리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