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297화 (296/304)

=======================================

멈추면 보이는 것(1)

마신비행으로 단숨에 날아온 곳은 감숙성 서화였다.

이곳은 바로 천마의 아들 백성원이 사는 마을이었다. 아들뿐만 아니라 손자와 손자며느리, 그리고 증손자까지 살고 있었다.

내가 천마의 행방을 두고 뛰어봤자란 표현을 쓴 것도 바로 이들 때문이었다. 분명 이곳에 왔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천마가 죽음을 각오했을 때, 혹은 새로운 인생을 생각했을 때, 그는 가족만을 떠올렸다. 분명 이 서화에 와 있을 것이다.

마신비행으로 이곳까지 날아올 때는 새보다 더 빨리 왔지만 정작 도착했을 때는 느긋하게 움직였다.

먼저 객잔에 들러 술로 목을 축이고 요기부터 해결했다.

육 개월 만의 외출이다. 그간 일만 했었는데, 갑자기 이곳에 왔다고 급할 것 없다.

이번에 천마를 만나면 그와 함께 즐기면서 편히 쉬었다가 돌아갈 생각이다.

술을 마시며 객잔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웃고, 떠들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예전에 천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엄청나게 벌었으니 즐기러 가자! 강호의 모든 미녀들을 다 만나는 거다! 막 놀자! 즐기라고!”

이제 충분히 그래도 되는데, 그런 욕망보다는 이곳 사람들이 별일 없이 잘 지내는지, 무림맹 무인들의 부정부패는 없는지 그런 걱정부터 들었다. 천생 맹주는 맹주인 모양이다.

하긴 정작 그 말을 한 천마 역시 그 말을 실행하진 못하고 있을 테니.

꿈만 꾸다 가는 것이 사내들의 인생인가 싶기도 하다.

그때 옆자리 무인들의 대화가 나에 대한 화제로 바뀌었다.

옆에 앉은 내가 낯부끄러울 정도로 내 싸움을 미화해서 목청을 높였다. 암흑신과 혈신을 없앤 지 육 개월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그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갈사량의 말처럼 강호의 전설이 되어 영원이 전해질 것이란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천광이. 자넨 어디에 있나?”

객잔을 나서서 향한 곳은 이곳 서화에 만든 특별 지부였다.

예전에 이곳을 떠날 때, 은밀히 천마의 가족들을 지켜주기 위해 비밀지부를 만들었었다.

지부는 작은 규모의 무관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무관 운영은 의심을 사지 않고 무공을 익힌 이들이 보통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무관에 들어섰을 때, 여인이 나를 맞았다. 젊고 발랄한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내가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본단에 있는, 그것도 내전 무인이 아니라면, 대부분 내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무공을 배우러 오셨나요?”

“아니오. 관주님을 뵈러 왔소.”

“관주님은 왜 뵈려는 것인가요?”

“멀리 무한에서 왔소.”

무한에서 왔다는 말은 곧 무림맹에서 내려왔다는 뜻이었다.

여인이 정해진 암어를 물었고, 나 역시 정해진 암어로 대답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나를 관주에게 안내했다. 그녀와 함께 무관의 연무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녀는 이곳 무관의 유일한 여사부인 진여홍(秦女紅)이었다.

몇몇 청년들이 한옆에서 무공수련을 하다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를 쳐다보는 줄 알았는데, 시선이 향한 것은 진여홍이었다.

혈기 왕성한 놈들이니 예쁘고 젊은 여사부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본단은 어떤가요?”

어떤 의도의 질문인지 알 수 없어서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답니다. 어디 소속이시죠?”

“내전 소속이오.”

“아, 그럼 정의각이시겠군요.”

그녀가 그렇게 추측했다. 이곳은 삼안각의 세작들과 무림맹 고수들이 함께 근무를 하고 있는 곳으로 주로 접촉하는 곳이 정의각이었던 것이다.

비밀유지를 위해 큰 규모로 운영되지는 않았다. 전부 다해서 열 명쯤 되었는데, 반은 정보를 담당하는 세작들이었고, 나머지는 무력을 책임지는 무인들이었다.

진여홍은 무력을 담당하고 있었다.

“낮에는 애들 가르치고, 저녁에는 맹의 업무를 봐야 하고. 여러모로 힘드시겠소.”

“아니에요.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애들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고. 특별수당도 나오거든요.”

하지만 그녀의 진심은 다음의 덧붙임에 담겨 있었다.

“사실 이곳에 배정 받기 전에 본단으로 가기를 바랐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죠.”

그녀의 말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무인들이 본단으로 오기를 바랐다.

“맹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소?”

“올해로 사 년째예요. 지난해까진 섬서지단에서 있었고요. 해가 갈수록 점점 본단에서 멀어지네요.”

그녀의 자조적인 말에 내가 위로했다.

“아직 젊으니 본단으로 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게 뜻대로 될지 모르겠네요. 선배들 말을 들어보면 처음에 못 가면 끝까지 못 간다고 하더라고요.”

이 부분은 앞으로 내가 개선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실력이 있으면 언제든 본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관주의 거처에 도착했다.

“무한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말 역시 일종의 암어로 무림맹에서 사람이 왔다는 의미였다.

“모셔라.”

“들어가시지요.”

“고맙소.”

거기까지 안내를 한 진여홍이 돌아서 걸어갔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이곳의 관주 도정(度貞)이었다.

그가 나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헉! 맹주님! 어떻게 여길?”

“잘 지냈나?”

벌떡 일어난 그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예를 갖췄다.

“지엄하신 맹주님을 뵙습니다. 기별도 없이 어인일이십니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조용히 나왔네.”

다시 말해 이곳 방문 역시 비밀로 처리하란 뜻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도정은 이 중요한 임무를 위해 가려 뽑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맹주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하고 정치를 하는 이가 아니었다.

“백성원 일가에 대해 말해주게.”

“네, 말씀드리지요.”

나는 그를 통해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백성원은 다시 서화표국으로 돌아가서 대표두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표국주는 개과천선을 했고, 이제 서로 힘을 합쳐서 서화표국을 잘 이끌어가고 있다고 했다.

다행한 일이었다.

손자인 백소명은 감숙에서 제법 알려진 문파인 청하문(淸河門)의 무인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손주 며느리인 지림은 아이를 키우는 데 여념이 없다고 했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혹시 마철군이 이곳에 왔나?”

“마철군이라시면 전대 맹주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아뇨, 그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오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혹시 잠시 들러서 가족들이 잘 지내는 것을 확인만 하고 또다시 강호를 주유하러 떠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얼굴로 변장을 하고 와 있는 것일까?

“혹시 이곳 서화에 정착하는 이들을 파악하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다행히 이곳 지부에서는 서화에 새로 정착한 이들에 대해 정보까지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일을 제대로 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에 대해 알고 싶네.”

“알겠습니다. 담당무인을 부르겠습니다.”

담당자는 앞서 나를 안내해준 진여홍이었다.

그녀와 새로 정착한 이들을 확인하며 서화 곳곳을 찾아다녔다.

지금 방문한 곳은 여섯 번째 집이었다.

저 멀리 그녀가 가리키는 사람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사람은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오.”

“이렇게 멀리서 구분이 가나요?”

“그렇소.”

천마를 찾는 일이었다. 서 있는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변장을 하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천마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사람을 찾으러 가시죠.”

“그럽시다.”

그날 스무 명 이상의 사람을 찾아다녔지만, 천마는 없었다. 그래도 이 방법이 가장 빨랐다. 내가 집집마다 일일이 다 확인하고 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찾으시지요.”

“그럽시다. 배도 고프니 함께 요기나 합시다. 오늘 정말 고생하셨소.”

“별말씀을요. 제 일인걸요.”

그녀는 집을 도는 내내 싫은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객잔에 들어가서 그녀를 위한 맛있는 요리와 술을 시켰다. 맛있는 것을 사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다.

“많이 드시오.”

“감사합니다.”

배를 채우고 난 후 술을 한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데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죠? 이곳까지 내려오신 것 보면 중요한 인물인 것 같은데. 혹시 현상금이 걸린 수배범인가요?”

“아니오. 그냥 건방진 놈이 하나 있소.”

극비사안이라 내가 말을 돌린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누군지 몰라도 붙잡히면 단단히 혼이 나겠군요.”

“아마 그럴 거요.”

물론 그가 이곳에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딘가 신나게 강호를 주유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괜찮으시면 본단 이야기 좀 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아, 혹시라도 부담은 갖지 마세요. 청탁 같은 것은 절대 안 할 테니까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 같으면 훨씬 더 교묘하게 말하면서 나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하하, 하셔도 들어줄 힘이 없소.”

힘은 넘치도록 있지만 청탁을 들어줄 생각은 전혀 없으니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가 본단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본단에는 몇 명이 상주하며, 어떤 구조로 되어 있으며, 내전까지 들어가려면 몇 단계의 경계를 거쳐야 하는지 등의 이야기였다.

그런 시시콜콜 지루한 이야기를 마치 그녀는 활극을 듣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 맹주님을 직접 본 적이 있나요?”

“있소.”

“아! 정말 소문대로 절세미남인가요?”

“절세미남?”

아, 내가 그렇게 소문난 모양이다. 그래, 못생겼다는 소문보다는 낫겠지.

“기준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나는 어떻소? 절세미남인 것 같소?”

그러자 그녀가 살짝 당황했다.

“음…… 절세까지는 아니고, 음, 아니에요. 미남이세요.”

“거짓말을 전혀 못 하는 성격이군요.”

“아뇨…… 네.”

그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렇다면 맹주님도 절세미남은 아니신 것 같소. 내가 맹주님과 닮았다는 소리를 듣소.”

“음, 그럼 절세미남은 절대 아니시군요.”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헤헤, 농담이에요.”

정말이지 유쾌한 성격의 그녀였다.

두두두두두.

그때 객잔 밖으로 이십여 기의 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늦은 시각 저잣거리를 달려가는 속도치고는 제법 빨랐다. 저러다 행인들이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서 내 신경을 거슬렀다.

“저들은 누구요?”

“아, 복식으로 볼 때 북풍파(北風派)의 무인들이었어요.”

북풍파는 이곳 감숙에서는 유명한 문파였다. 대대로 명문인 데다 고수들도 상당히 보유한 거대문파였다.

“북풍파는 지금껏 이곳 서화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어쩐 일일까요? 이곳은 대룡문(大龍門)의 영역이거든요.”

대룡문은 감숙의 또 다른 명문거파였다. 두 문파는 감숙을 두고 패권다툼을 하고 있었다.

“혹시 청하문도 대룡문과 관계가 있소?”

청하문은 바로 천마의 손자가 들어가 있던 곳이었다.

“네. 청하문주와 대룡문주는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입니다.”

“그럼 대룡문에 문제가 생기면 청하문도 나서겠구려.”

“당연히 그렇겠지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찾으려던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소.”

놀란 얼굴의 그녀를 두고 객잔을 먼저 나섰다.

* * *

달빛을 누비며 청하문 위를 훨훨 날아가다 그중 한 지붕 위로 내려섰다.

지붕 위에 서 있던 사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왔어?”

마치 조금 전에 헤어진 사람처럼 말한 사내는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천마였다.

너무 반가웠기에, 너무 좋았기에, 왜 그냥 떠났느냐 따지지 않았다. 와락 끌어안지도 않았다. 그저 그를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나 역시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냥 강호 일이지. 얽히고설킨. 손자 놈이 있는 곳이니 신경이 쓰이네.”

“여기서부터 시작된 일이군.”

“작은 일이 커졌지.”

“과연 천마가 가는 곳에는 풍운이 이는구나.”

“나 때문이 아니라고! 망할! 차라리 나 때문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뭐가 고민이야? 그냥 다 죽여 버리면 되지.”

“그래도 돼?”

천마가 돌아보며 진지하게 묻자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천마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천마의 고민에서 인간미를 느꼈다. 나와 친해지지 않았다면 그는 다 없애버리는 것으로 벌써 해결했을 것이다. 그의 변화가 자랑스럽고 기뻤다.

힘이 있어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잔혹한 심성도 참아낸다. 그래, 이렇게 변한 사람이기에 나는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래도 자네가 와줘서 기쁘군.”

천마는 진심으로 기뻐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누가 그러더군. 인생의 반은 부모 때문에 힘들고, 나머지 반은 자식 때문에 힘들다고.”

천마가 픽하고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강호가 평화로워도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다시 만나는 것을 보니, 과연 그는 천마고 나는 맹주인가보다 싶다.

“자, 고민은 한잔하면서 풀자고. 작별주는 생략했어도 재회주는 해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