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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귀환(2)
“정도방, 칠검문, 북양문…….”
수하 군사의 입에서 문파의 이름이 연달아 나왔다. 근래 몰살당한 문파의 이름들이었다.
“시체는 모두 피와 수분이 말라비틀어진 목내이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보고를 받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갈사량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누구 소행인지는 알고 있었다. 벽리단이 쫓던 바로 천소선이었다. 벽리단이 실종된 이후, 그는 대놓고 살생을 저지르고 있었다.
무림맹에서는 그들을 붙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원체 신출귀몰해서 행적을 파악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찾기도 어렵지만 잡는 것은 더 어려웠다.
설령 행적을 파악했다 하더라도, 천소선이 워낙 고수였기에 그를 상대하는 것 역시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를 죽이려면 멸마단의 정예들이 최소 오십 명은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쪽에는 백표가 있었지만, 천소선은 천하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실력자였다. 더구나 그에게 천소선을 능가하는 방수(?手)가 있을 수도 있는 상황.
갈사량이 가장 걱정하는 상황이 백표와 천소선이 양패구상하는 일이다.
특히 백표는 천소선의 만행을 막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기에, 그와 만나면 어떻게든 죽이려고 덤벼들 것이다.
이래저래 갈사량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보고를 하던 군사가 조심스럽게 다른 사안을 꺼냈다.
“원로원을 중심으로 맹주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갈사량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언제나 맹주전과는 각을 세워온 원로원에서 좋은 말이 나왔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인가?”
수하가 보고를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새 맹주를 뽑아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꽝!
갈사량이 책상을 내리쳤다.
“망할 늙은이들! 아직 맹주님의 생사가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새 맹주라니? 단체로 노망이라도 난 것인가?”
하여튼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늙은이들이었다.
“누가 주동자인가? 서복인가?”
“네, 맞습니다.”
이번에 벽리단을 맹주로 삼을 때도 그가 앞장서서 반대를 했었다. 이후 벽리단이 맹주로 있을 때는 숨소리도 크게 못 내고 있다가, 실종이 장기화되자 슬슬 개수작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얍삽하고 비겁한 처세술이란.
“현재 십여 명의 원로원 고수들이 그와 뜻을 같이한 모양입니다.”
“그 한심한 늙은이들을 믿고 이딴 수작을 부린단 말이지?”
원로원을 제외한 다른 무력단체는 여전히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원로원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모양새였다. 맹주가 실종된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원로원을 치는 것은 내분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따라서 맹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부담되는 상황이었다.
서복이 이런 짓을 하는 것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부분열만큼은 확실히 잡아야 했다.
“현재 원로원 내부에서 서복과 가장 사이가 나쁜 인물이 누구지? 여전히 양인가?”
“네, 맞습니다. 하남신창(河南神槍) 양호중(梁皓中)과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두 사람이 견원지간이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은밀히 그와 약속 잡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서복을 엮을 구실을 만들도록.”
“네. 알겠습니다.”
양호중을 확실히 우리 사람으로 만든 다음에 서복을 단번에 칠 작정이다. 반란죄로 강하게 밀어붙이면 그를 지지하던 원로들조차 함부로 나서서 떠들어대진 못할 것이다. 거기에 양호중에게 힘을 실어주면 그가 알아서 뒷수습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맹의 비상단계를 백호령(白虎令)으로 격상한다.”
백호령은 청룡령(靑龍令) 바로 아래였다. 청룡령은 전쟁준비에 들어갔을 때 내리는 비상이니, 실질적으로는 최고 등급의 비상이 걸린 것이다.
수하 군사가 물러가자 갈사량이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쳐다보았다. 지도에는 수십 개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몰살당한 가문이 위치한 곳이었는데, 깃발은 북쪽에서 점차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갈사량은 알 수 있었다. 그 깃발의 최종 목적지가 바로 무림맹 본단이란 것을.
‘맹주님,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 * *
노인이 열어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 내 손목을 잡아끌고 달렸다.
“뜁시다!”
엉겁결에 그와 함께 달렸다.
파파파파파팍!
내가 있던 자리에 수십 가닥의 강기가 날아들었다. 들어온 문은 강기에 잘려 사라졌고, 그곳 역시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꽈꽈꽈꽈꽝!
보통 위력의 강기가 아니었다. 강호에서 보자면 상당한 고수들이 날리는 강기였다.
쉭쉭쉭쉭쉭쉭쉭!
무시무시한 공격이 연이어 우리를 뒤쫓았다. 앞서와 다른 이들이었는데, 역시 한둘의 공격이 아니었고, 위력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자, 저기로!”
사내와 함께 곧장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꽝!
우리가 뛰어내린 절벽 모서리가 강기에 의해 박살 났다.
나는 순순히 나를 이끄는 사내의 뜻에 따르고 있었다. 나에 대한 호의가 느껴졌기에 그냥 하자는 대로 했다.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죽이려는 자들의 편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등 뒤로 강기가 날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놈들의 공격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사내가 소리쳤다.
“저쪽으로!”
저 아래 건너편 벽에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경공을 발휘해서 그 동굴로 신형을 날렸다. 다행히 내 몸 상태는 그대로였다. 내공도 기억력도 그대로였다.
다시 말해 마신결의 대성상태인 천하제일인인 상태였다. 다만 경공을 발휘하자 내공이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이 소모되었다.
휘리리릭.
허공을 가볍게 날아서 동굴 입구에 내려섰다.
“됐습니다. 놈들은 이 동굴까진 쫓아오지 못합니다. 일종의 안전구역인 셈이지요.”
“대체 저들은 누구…….”
다음 순간 내가 말문을 닫았다. 비로소 나와 함께 왔던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다.
사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아는 얼굴이지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얼굴로 보일 겁니다.”
사내의 얼굴은 바로 천하진의 얼굴이었다.
과거 무림맹주 시절의 천하진, 즉 내 얼굴이었다. 천하제일이라는 오만함과, 강호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 고지식하고 더없이 답답했던 나. 나는 그런 내 자신을 가장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가 덧붙여 말했다.
“동시에 많이 그리워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워한다고요?”
“이 얼굴에서 그대의 애증이 느껴집니다. 대체 누구의 얼굴입니까?”
그는 동경을 비춰보지 않는 한, 자신의 얼굴이 누구로 변했는지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과거의 나요.”
“그렇군요.”
사내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이번 시험의 안내자입니다. 그냥 줄여서 ‘안’이라고 불러도 좋고, 안내인, 안내자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하긴 내 얼굴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호칭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심지어 그는 인간도 아닐 것이다.
“시험이 거칠군요.”
대체 어느 시험이 시작하자마자 그 시험의 안내자와 함께 공격을 당할까? 이 하나만 봐도 이 시험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얼마나 통과하기 어려운지도 짐작이 갔다.
“우릴 공격한 자들은 누구요?”
“흑마군(黑魔軍)입니다.”
이어지는 당연한 질문.
“그럼 백마군도 있소?”
그러자 안내자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했다.
“저들이 곧 백마군이기도 합니다.”
“무슨 뜻이오?”
“그대가 마신이 되면 이곳의 모든 마군들이 그대에게 충성을 바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 저들을 죽인다는 것이 곧 미래의 내 수하를 죽이는 것이겠군요.”
“그렇습니다만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들은 죽으면 다시 그대로 태어나게 되니까요. 마신이 탄생할 때까진 끝없는 윤회를 반복하는 존재들이지요. 죽는 즉시 곧장 흑마군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들의 운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여 봤자 소용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곳은 어디요?”
“마경(魔境)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마경에서도 입신관(入神關)이 있는 곳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 시험을 끝낼 수 있소?”
“저를 따라오십시오.”
그가 나를 데리고 동굴 안으로 데려갔다.
동굴의 벽에 화려한 색감의 벽화가 있었다. 마경의 역사와 태초 마신의 싸움들이 아주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잠시 삼신이 뒤엉켜 싸우는 그림에서 멈춰 섰다.
내가 죽였던 암흑신도 있었다. 물론 내가 상대했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암흑대상의 몸에 깃든 암흑신을 상대했으니까.
그림 속의 삼신들은 상징적인 존재들이다. 암흑신도, 혈신도, 마신도 모두 인간에게 깃드는 악신들이다. 인간이 만든 악이고, 인간에 의해 자라난 악이었다.
사내가 나를 기다려주었다. 천하진의 모습을 한 그는 정말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나를 안내하는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만 같았다.
다시 그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마치 선학비동의 그 아름다운 동굴과 비슷했는데, 그보다 좀 더 어둡고 척박한 느낌이었다.
그 가운데 맑은 연못이 있었고, 연못을 중심으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들판에는 꽃과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동굴은 마군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유일한 장소이지요. 따라서 유일하게 휴식할 수 있는 곳이랍니다. 특히 저 연못에 들어가면 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소생연(甦生淵)이라 불리는 곳인데 모든 외상과 내상이 낫게 됩니다. 만약 도전에 실패해서 되돌아올 수 있다면 소생연에서 회복하도록 하십시오.”
“마군들은 얼마나 강하오?”
“아주 강합니다. 인간 고수들에 비교했다간 아무리 당신이라도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겁니다.”
정확히 얼마나 강한지는 역시 직접 싸워봐야 알 것 같았다.
다시 그가 나를 데리고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동굴 반대쪽에 입구가 있었다. 그 절벽 끝에서 바라보니 아주 멀리 성이 보였다. 내가 멀리 성을 바라보았다. 아주 멀리 있는데도 이렇게 커 보이는 것을 보니, 그야말로 거대한 성이었다.
이곳 절벽에서 저 성 사이에 마치 난관처럼 여러 지형들이 있었다. 숲도 있었고, 늪지도 있었으며 마을과 미로도 있었다.
“시험은 간단합니다. 바로 저 성 꼭대기에 도착하면 합격입니다.”
“여기서부터 그냥 날아서 가면 되는 것 아니오?”
“그럴 수 없습니다. 저기 시작지점이 보이시죠?”
과연 시작되는 곳임을 알 수 있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저 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경공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아니,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경공을 사용하는 순간, 내공이 평소의 수십 배가 필요하고 지속시간이 길어지면 내공소모가 다시 몇 배로 더 늘어나게 됩니다. 결국 얼마 가지도 못하고 내공이 바닥나서 오히려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겁니다.”
모르긴 해도 저곳까지 가는 과정에 분명 엄청나게 강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시험은 언제부터 할 수 있소?”
“당장 할 수 있습니다. 싸우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이곳으로 돌아와서 다시 도전하십시오. 저 시작지점의 문을 다시 나오면 시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죽였던 마군들도 원래대로 다시 생겨나게 되지요.”
다시 말해서 들어갔다가 저 입구로 빠져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무리해서 함부로 돌아와선 안 됩니다. 괜히 돌아오려다가 더 위험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반대로 진행한 것이 아까워서 무리해서도 안 됩니다. 모쪼록 잘 판단하십시오.”
사내가 그 결정적인 이유를 경고하듯 말해주었다.
“잊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죽으면 진짜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