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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운 어둠은 없다(3)
수라명왕검이 허공을 가르자 정면에서 덮쳐오던 불길이 좌우로 갈라졌다.
원래라면 잠시 사그라진 불꽃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서 더욱 거세게 타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냥 꺼져버린 것이다. 암류영환진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불이 꺼진 그곳을 천천히 걸어서 지나갔다.
생문을 모르는 상황에서 최상급의 진법을 무공으로 부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한 힘을 가하면 가할수록 진법은 더욱 위험해지고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원래라면 불길은 두 배로 더 강하게 피어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힘으로 밀어붙였다. 진법이 버틸 수 있는 한계치가 있다. 보통의 고수는 절대 넘을 수 없는 그것을, 나는 훌쩍 넘어버린 것이다.
화염진을 지나자 이번에는 사방 벽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쉭쉭쉭쉭쉭쉭쉭쉭!
보통의 암기가 아니었다. 스치기만 해도 죽게 되는 극독이 발린 암기였다. 게다가 날아드는 속도 역시 기관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강한 위력이었다.
내가 앞으로 쇄도하며 몸을 날렸다.
쇄애애애애액.
날아든 암기를 튕겨내며 순식간에 앞으로 날아갔다. 마신영풍보 중 마신탄영이 발휘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발휘된 호신강기와 마신탄영의 빠른 회전이 날아든 암기를 모두 튕겨냈다.
순식간에 암기진의 구역을 지나고 나는 마지막 공간에 도달했다.
투웅.
보이지 않는 막이 나를 튕겨냈다.
진법의 끝이다. 이 막을 뚫고 나가지 못하면 진법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수라명왕검을 뽑아서 그대로 내리그었다. 검기나 검강을 사용하지 않은, 오직 수라명왕검의 예기만 이용한 일도양단이었다.
쉬이이이이익!
촤아아아아악!
마치 비단천이 잘려나가듯 진법이 깨끗하게 갈라졌다. 진법 속 세상이 좌우로 분리되면서 그 너머로 진짜 세상이 모습을 보였다.
스스스스스스슷!
진법이 사라졌고 현실이 모습을 보였다.
진법 너머에는 백여 명의 무인들이 나를 기다린 채 서 있었다.
한눈에도 대단한 실력을 지닌 무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고된 훈련을 겪었고, 살인을 많이 해본 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 너머를 살폈다. 백여 명이 서 있고, 그 뒤에 높은 담이 있었다. 뒤쪽에 또 다른 적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기도가 다른 것으로 볼 때, 다른 훈련을 받은 다른 조직이었다. 서로 뒤섞이지 않고 이들이 먼저 나를 맞이한 이유기도 했다.
사내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내가 진법을 통과하는 속도가 만들어낸 공포였다. 설령 이 진법을 만든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이곳을 돌파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대로 물러가면 목숨은 살려주지.”
씨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볼 때, 아마 최대한 시간을 끌라는 명령을 받은 모양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렇다고 나는 서둘지 않았다.
이 싸움은 저 담벼락 너머, 또 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싸움이다.
이런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공의 효과적인 관리다. 최소한의 내공으로 최대한 많은 적을 베는 것, 적을 죽이는 데 화려하거나 멋있을 필요는 없다.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내가 수라명왕검을 뽑아들며 그들에게 말했다.
“이대로 물러가는 자는 살려주지.”
나야말로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내 목적은 이들이 아니라 놈들의 수장들이었으니까. 수도 없이 베어야 할 텐데, 몇 놈쯤 달아난다고 굳이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아무도 달아나지 않았다.
“쳐라!”
수장의 명령에 흑의인들이 달려들었다. 선두에서 날아들던 두 자루의 검을 피하며 수라명왕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촤아악.
빠르게 허공을 가른 수라명왕검이 두 사내의 배를 동시에 갈랐다.
마검혈우를 사용하면 한 수에 다 죽여 버릴 수 있겠지만, 이들에게 사용하기에는 내공이 아까웠다.
쓰러지는 사내를 밟고 뒤로 몸을 날렸다.
내 검이 기이한 각도로 허공을 갈랐다. 구경꾼에게는 멋지고 아름다운,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인 한 수였다.
서걱, 서걱, 서걱.
뒤따르던 사내들이 연속해서 쓰러졌다.
좌우에서 내 얼굴을 노리고 검이 날아들었다. 내 신형이 붕 날아서 허공에 누웠다. 좌측의 사내를 검으로 찔렀고, 우측의 사내를 발로 찼다.
푸욱! 빠각!
좌측 사내의 목이 꿰뚫렸고 우측 사내의 얼굴이 박살 났다.
당한 수법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두 사내가 절명하며 동시에 쓰러졌다.
다음으로 내가 노린 것은 수장사내였다. 상대가 아주 어리석은 놈이 아니라면, 언제나 수장을 먼저 베는 것은 옳은 선택이다.
푸아아아아앙!
수장사내의 검에서 쏟아져 나온 검강이 나를 향해 휘몰아쳤다.
회심의 일격인 만큼 아주 위협적이었다.
내가 휘몰아치는 검강 사이를 파고들며 검을 내질렀다.
푸욱!
수라명왕검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의 공격에 이런 빈틈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피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파고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일반 무인들은 볼 수 없는 빈틈이었다. 심검지경에 이른 실력만이 볼 수 있는 사각이었으니까.
수장이 쓰러지자 사내들은 급해졌다. 공격은 더욱 과격해졌고 거칠어졌다.
사방에서 검기가 쏟아졌다. 동료들이 죽어도 상관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공격을 모두 피했다. 내 움직임은 빠르고 정확했다. 거미줄처럼 얽히는 공격의 선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마치 절대 그들의 공격에는 찔리지 않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마치 영원히 마주치지 않는 두 개의 길을 나란히 달리는 것처럼.
하지만 내 공격은 반대였다.
반드시 상대를 죽이는 궤적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푹! 푹! 푹! 푹!
사방에서 달려드는 사내들이 검에 찔려 쓰러졌다. 목이 찔리고 심장이 찔렸다. 검은 한 수에 목숨을 잃게 되는 급소만 노렸다.
네 사내가 바닥에 쓰러졌을 때 정면에서 검을 휘두르던 사내의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머리통이 날아가는 궤적을 따라 내가 빠르게 쇄도하며 검을 가로 그었다.
쉬이이이익!
마치 검으로 벽을 죽 긋는 느낌이었다. 그 선에 있던 일곱 명이 동시에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내 검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내 검과 한번 부딪치지도 못했다.
그들이 동시에 죽는다는 것은 이들의 무공실력을 생각하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결과였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적들은 겉으로는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동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동요하지 않는 훈련을 받았을 뿐이라고. 동요를 애써 감추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몸은 점차 느려지고 무거워졌다. 인간인 이상 그 누구도 죽음의 공포를 완전히 이겨낼 수는 없다.
나는 계속 그곳을 누볐다.
수라명왕검이 만들어내는 바람소리는 일정했고, 상대는 잘려지는 부위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났다.
고수와 진짜 고수의 차이를 이제 확실하게 느낀다.
예전에도 이겼고 지금도 이기지만, 그 과정이나 마음은 확실히 달랐다.
예전에는 다섯 수 정도까지만 생각했다. 이놈을 이렇게 죽이고, 저놈은 저렇게 죽이고, 또 그럼 저놈은 이렇게 반응할 테니까 이렇게 죽이고.
그렇게 다섯 수 너머를 예상한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한데 이제는 전체가 다 보였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전체가 다 보였다. 물론 그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죽이느냐를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판도가 읽어진 것이다.
이렇게 슥, 저렇게 슥, 여기선 슥슥, 저기선 스스스슥.
어떻게 이 싸움을 이끌고 끝내야 할지 전체가 다 그려진 것이다.
살아 있던 마지막 사내가 쓰러졌다.
우우우웅!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강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번은 강기를 사용했다. 그것도 굉장히 강력한 한 수를 발출했다.
꽝!
앞을 가로막고 있던 담이 그대로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담을 뛰어넘는 것에 비해 더 많은 내공을 소모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뒤에는 삼백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보았다. 담벼락이 가루가 되면서 날아간 그 너머에 내가 서 있었고, 그 뒤로 백 명의 시체가 널려 있는 것을.
복수심에 들끓을 것이라고? 천만에. 공포심에 마음이 위축될 것이다.
삼백 명.
앞서처럼 싸움의 전체가 그려졌다. 이들을 상대할 때 얼마의 내공이 소모될지까지 대충 계산되었다.
나는 문득 느꼈다. 아마도 내 무공의 다음 단계는 이 자연스러운 계산조차 생략될 것이라는.
이번에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살고 싶은 자는 지금 달아나도 좋다.”
하지만 아무도 달아나지 않았다. 사내들이 일제히 살기를 내뿜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이번의 싸움은 다른 방식으로 결정했다.
주위가 어두워졌다.
삼백 명의 사내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악!
그곳에 검기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여인과 암흑대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세 번째 진법이 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 번째 진법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세 번째 진법이 돌파당한 것이다.
“진법파훼에 조예가 깊은 자겠지요.”
여전히 그녀는 현실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암수대(暗獸隊)가 일백에 흑암대(黑暗隊)가 삼백, 서른세 명의 야월(夜月)이 밖을 지키고 있어요. 거기다 이곳까지 내려오려면 여섯 개의 죽음의 기관까지 뚫어야 해요.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뚫는 것은 불가능해요.”
암흑대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벽리단은 이곳까지 뚫고 들어올 것이다. 그저 그때까지 대법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탈출로는 어디지?”
“이쪽이에요.”
한쪽 벽을 조작하자 감춰져 있던 문이 열렸다. 다행히 탈출로는 대법이 거행되는 그곳에 준비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다시 다급한 보고가 날아들었다.
“암수대가 전멸했습니다.”
“백 명이 이렇게 빨리?”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그녀가 대법을 진행하는 연구원들을 재촉했다.
“서둘러라.”
연구원들은 대답할 시간조차 없었다.
바로 그때 두 번째 보고가 날아들었다.
“흑암대가 전멸했습니다.”
“이 미친 새끼야! 암수대가 전멸한 보고는 지금 들었잖아?”
여인이 버럭 화를 내자 수하가 당황하며 보고했다.
“아닙니다. 암수대가 아니라 이번에는 흑암대가 전멸했습니다.”
“뭐? 조금 전에 암수대가 전멸한 소식을 들었는데 그사이에 흑암대가 어떻게 전멸을 해? 더구나 흑암대는 삼백 명이나 되는데?”
“그게…… 단 일 수에 다 죽었다고 합니다.”
“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단 한 수에 흑암대를 죽일 수 있는 무공이 있을 것이라곤 꿈에서라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흑암대라면 무림맹 본단도 쳐들어 갈 수 있었다.
비록 무림맹을 점령하진 못하겠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병력이었다. 무림맹과 양패구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단 한 수에 전멸했다고?
암흑대상이 그녀에게 차분히 말했다.
“침착해.”
“어떻게 침착해요?”
“흥분할 필요 없어. 이것이 현실이니까. 대법에만 집중해.”
여인이 암흑대상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대체 누굴 상대했던 건가요?”
“거지꼴이 되어서 당신에게 구해달라고 했어야 할 상대.”
그때였다.
꽝! 꽈앙! 꽝!
건물이 흔들렸다.
“기관이 부서지고 있어요.”
야월도 죽었다는 보고를 하는 수하조차 오지 않았다.
잠시 여인이 멍하게 서 있었다. 죽음이 무섭게 돌진해 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이 시대는 우리 시대가 아니었어요.”
암흑대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당신 먼저 가요.”
“뭐?”
“당신 먼저 탈출하라고요!”
암흑대상이 가만히 여인을 응시했다. 이 말을 여인이 자신에게 할 줄은 몰랐다.
“이러니까 당신도 꽤 귀엽네.”
“장난칠 시간 없어요. 어서 가요. 나중에 약속한 곳에서 만나요. 전 대법이 끝나는 대로 마령인을 데리고 갈게요.”
“당신이 먼저 가. 내가 저자를 데리고 갈 테니까.”
“아뇨. 흑지의 주인은 나예요. 가요, 당신이.”
“당신을 만난 이후에 처음으로 후회가 되는 순간이군.”
“무슨 후회요?”
“당신이 이렇게 귀여운 여자인 줄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하는 후회. 돈은 적당히 밝힐 걸 하는 후회.”
암흑대상의 말에 여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런 빌어먹을 상황의 연속이…… 당신과 내 인생인 거죠.”
바로 그때였다. 오늘 계속된 소식 중에 유일하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대법이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