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그러운 어둠은 없다(1)
여인과 암흑대상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흑지란 이름과는 달리 두 사람이 머무는 곳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방에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이 걸어가는 곳도 꽃나무가 아름다운 오솔길이었다.
“또 과음했군요?”
“어젠 안 마셨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이지요?”
암흑대상은 피곤하고 울적한 심기를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중원에서 날아든 소식을 들었다. 암흑십상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다.”
여인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암흑대상을 쳐다보았다.
“당신, 괜찮나요?”
“괜찮을 리가 없지.”
특히 암흑이상의 죽음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다른 여덟 명의 암흑십상들은 죽거나 말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암흑이상만은 진심으로 아꼈던 수하였다.
“당신이 나와 함께 데려와 줬으면 그는 살아있을 텐데.”
여인이 자신만 데리고 탈출했다. 말로는 한 명밖에 못 데리고 나온다고 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과연 여인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자는 평생 동안 내게서 당신을 빼앗아 간 자예요. 내가 그런 자를 살려둘 것이라고 여겼나요?”
“그 반대지. 내가 그를 내 인생에 끌어들였지. 결국 이렇게 파국으로 끝나버렸지만.”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면서 왜 나를 끌어들이지 않았죠?”
“논점에서 벗어났다.”
“흥!”
여인이 다시 걸음을 옮겼고 암흑대상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여인이 오솔길 끝에 도착하자 진법이 걷히며 눈앞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잇는 긴 다리가 하나 생겨난 것이다.
여인이 먼저 건너갔고, 암흑대상이 그 뒤를 따라 건너갔다.
다리를 지나자 그곳에 석벽이 있었다. 그녀가 벽 앞에 서자 감춰져 있던 문이 열렸다.
석굴에는 여러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삼신불망기에 있던 그림과 비슷한 장면들이었다. 다른 점은 마신이 아니라 암흑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렸다는 점이었다.
“이 그림, 오랜만에 보는군. 예전에 볼 때는 별생각 없이 봤는데.”
한참을 진지하게 그림을 올려다보다 암흑대상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모시는 신의 시대가 아니다.”
“그런 말, 말라고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 걸어가려던 암흑대상이 힐끗 그림 속의 암흑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언제나 진실은 게으른 법이지 않소?”
제가 진실이기에, 굳이 나서서 뭔가를 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진실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따를 모양이오. 당신을 이렇게나 따르는데 구해줄 수 있겠소?”
당연히 그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신도 진실만큼이나 게을러 보이는군.”
암흑대상이 여인이 사라진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석벽 끝 거대한 광장에는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수백 명이 서 있었다. 하나하나가 굉장한 기도를 드러내는 그들은 강호를 지배하기 위해 그녀가 키워온 흑지의 정예들이었다.
“이들을 포기하란 말인가요?”
“그래.”
“제가 이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나요?”
“짐작은 한다. 하지만 이들로 그를 상대하지 못한다. 그럴 수 있었다면 나 역시 그를 상대할 수 있었겠지.”
여인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저는…… 포기할 수 없어요.”
암흑대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이길 수 있어요!”
“못 이긴다. 모두 다 내보내도 놈을 죽이지 못한다. 한나절도 안 돼서 다 죽을 거다.”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요.”
“강호에서 진실을 외면하는 대가는 죽음뿐이지.”
여인이 암흑대상에게 말했다.
“도와주세요.”
암흑대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나 쉽게 대답해서 오히려 여인이 깜짝 놀랐다.
“정말인가요?”
이미 암흑대상은 그녀를 돕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그녀를 돕다가 죽을 작정인 것이다.
“아직 내 돈의 반이 남았다. 쓸 만한 수하들도 남아 있고. 거기에 당신 수하들까지 합치면 조금은 승산이 있겠지. 물론 우린 아주 더럽고 치사해져야 할 거야.”
“이기기 위해서 더러워져야 한다면 얼마든지 더러워질 수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치사해질 수도 있어요.”
암흑대상이 기뻐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가치가 뒤바뀌지 않는 한, 치사함이 정의를 이길 수는 없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리라.
‘우리가 평생 서로를 미워하고 살았는데…… 마지막은 함께 할 운명인가보군.’
암흑대상이 여인에게 물었다.
“당신이 준비해둔 회심의 한 수는?”
“암전수혼대법(暗轉搜魂大法). 일전에 천왕군에게 시행했던 바로 그것이었죠. 그것을 변형해서 새롭게 완성시켰어요. 천왕군보다 훨씬 더 강한 자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예요.”
“잘됐군.”
“한데 문제가 있어요.”
“언제나 그렇지.”
“재물이 필요해요. 그것도 굉장한 정신력을 지닌 자가. 예전에는 천왕군처럼 암전수혼대법을 견딜 만한 정신력이면 충분했는데, 이 새로운 대법에는 그 정신력과 더불어 필요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지?”
“악심이에요. 완전히 악인이어야 하죠. 악하면 악할수록 더욱 강한 자가 탄생할 거예요.”
암흑대상이 곧바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적당한 놈을 알고 있다.”
* * *
실종사건이 발생한 마을에 도착했을 때, 무림맹 무인들이 그곳을 조사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 전체가 실종된 일대 사건이었다. 며칠째 무림맹에서 나온 무인들이 마을과 인근 숲을 수색하고 있었다.
“대체 이 사람들이 어디로 간 거지?”
“녹림이 다 납치해간 것 아닐까요?”
“이놈아! 여자들이라면 모를까, 늙은이들까지 왜 끌고 갔겠느냐? 게다가 내가 이곳에서 근무한지 삼십 년째다. 주위에 그런 간 큰 녹림은 없다.”
“아니면 사파인이 사술을 연마하기 위해 모두 끌고 간 것은 아닐까요?”
“차라리 그럴 수는 있지.”
“하지만 새 맹주님이 되시고 사파 놈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요즘이 아닙니까?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를 간 큰 놈이 있겠습니까?”
“어쨌든 샅샅이 뒤져! 이 사람들 찾아야 할 것 아냐?”
“네!”
나는 지붕 위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온다는 전서구보다 빨리 도착했기에, 그들에게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나를 한 번도 못 본 변방의 무인들이었기에 내가 무림맹주란 것을 믿지 못할 것이다.
굳이 이런저런 일을 만들지 않더라도, 나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고 이곳을 조사할 수 있었다.
그때 한옆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여기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뭐라고?”
무인들이 소리가 난 곳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다음 순간, 내가 손을 한번 휘저으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휙휙휙휙휙휙휙휙.
그곳에 있던 무인들이 선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마혈과 수혈을 동시에 제압당했는데, 너무 빠르고 정확해서 자신들이 당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잠이 든 것이다.
무인들이 찾아낸 시체를 살펴보았다. 체내의 수분은 물론이고 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은 목내이였다.
피가 한 방울도 없다면? 혈신을 따르는 자의 소행?
놈이구나!
예전 벽리단의 꿈에서 보았던 사내가 떠올랐다. 놈이 천소선을 데리고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사량의 말에 따르면 최근에 실종 사건들이 있었다고 했다.
만약 놈들의 소행이라면? 계속 희생자를 만드는 것으로 볼 때, 위험천만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문득 벽리단의 꿈에서 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상을 피로 덮을 혈신이 태어날 것이네.”
그 전에 어떻게든 찾아내서 제거해야 한다.
본격적으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일반 무인들이 찾지 못한 피를 흘린 흔적을 찾아냈다. 누군가 뒤처리를 하긴 했지만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난 후, 시체를 따로 처리했고.
주위를 살핀 결과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시체를 파묻은 곳을 찾아냈다. 시체는 모두 목내이처럼 피가 빨린 상태였고, 발로 짓밟혀 부서져 있었다.
망할 놈들!
나는 결코 이 짓을 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목숨 따윈 하찮게 여긴 대가가 얼마나 큰지 반드시 보여줄 것이다.
주위를 살피자 그곳에서 마차가 한 대 출발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차? 왜 마차를 이용했지? 아! 천란을 싣고 다니고 있구나!
이 짓을 한 자들이 꿈속의 사내와 천소선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나는 곧장 마차를 추격했다. 이미 사건이 벌어진 지 며칠이 지났으니 멀리 가버렸겠지만, 단서는 이 마차의 행적뿐이었다.
물론 떠나기 전에, 마혈을 제압한 무림맹 무인들을 풀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손을 한차례 휘젓자 봉쇄되었던 혈도가 동시에 풀렸다.
휙휙휙휙휙휙!
다시 제압당했던 무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내이가 된 시체입니다.”
“사파 놈의 짓이 틀림없다!”
“본단에 전서구 날리고, 지부에 사람을 보내서 인원 더 보내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바쁜 소동이 벌어졌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저녁 나는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버려진 마차라고 여기고 가져온 것입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중년사내가 머리를 조아렸다.
마차를 추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문적인 추격술을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내 무공실력으로 메울 수 있었다.
마차는 이 사내가 자신의 집에 가져다 둔 상태였다. 길에 버려져 있었다고 했다.
“주인을 찾아주지 않고 가져온 것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무사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집이 너무 가난해서, 그에 대해 책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실종 사건이 있었던 마을에서 마차로 이틀거리에 있는 도시였다. 마차가 그냥 외곽을 달렸으면 지금쯤 놈들과 만났겠지만, 그들은 마차를 이 도시에 버리고 떠나버린 것이다.
워낙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었기에 더 이상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마차가 버려지는 순간을 본 사람도 없었다. 일부러 추적을 피하려고 한 행동이니 목격자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추적할 것을 예상한 움직임이었다.
“마차는 그냥 가져도 좋소.”
“어이쿠, 감사합니다.”
사내의 집을 나온 후 문 앞에 잠시 섰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서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추격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꿈에서 봤던 사내와 천소선이라면, 확실히 좋지 않은 조합이 확실했다.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 * *
“빌어먹을!”
마령인이 손에 쥐고 있던 서찰을 와락 구겼다.
갈사량이 보낸 서찰이었는데, 그것을 읽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래서 내공을 안 풀어주겠다는 말이지?”
마령인이 앞에 놓인 탁자를 내리치려고 손을 번쩍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내공이 없어서 부수고 싶어도 부술 수도 없었다.
물론 자신은 직접 나가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공이 있더라도 앞장서서 싸울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자신은 천도문이라는 거대 세력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분명 심각한 일이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얕잡아 보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수하가 추가보고를 했다.
“참 그리고 뇌옥에 갇혀 있던 마맹주께서 석방되셨다고 합니다.”
마령인이 깜짝 놀랐다.
“뭐? 놈들이 형님을 석방시켰다고? 그럴 리가?”
앞서 자신의 내공을 풀어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한 것보다 더 격한 반응이었다.
“확실한 소식입니다.”
마령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안다. 벽리단이 그냥 마철군을 풀어줬을 리가 없다.
마령인이 창가로 걸어갔다.
“만약 풀어줬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벽리단과 마철군이 모종의 계약을 맺은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실력 좋은 세작을 보내서 형님을 감시해라.”
하지만 수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길한 마음이 들어 돌아보니 복면사내가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고를 하던 사내는 이미 마혈을 제압당한 채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누구냐?”
당연히 처음 보는 사내였고, 누군지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 없이 천도문주의 방에 들어온 것으로 적어도 자신의 실력은 보여주고 있었다.
복면사내가 씩 웃는 순간, 마령인은 정신을 잃었다.
문주의 실종을 알리는 비상종 소리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