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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되 함께 걷고(3)
대법에 들어가기 전에 송화린을 만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법에 대해서 밝히지 않았다. 속이는 것이 아니라,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였다.
그녀와 밥을 먹고 함께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물론 죽립을 쓰고 다녔기에 우릴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광두와 서너 명의 정예 맹호단 무인들이 멀리서 나를 호위했다.
“무림맹주와 이런 나들이, 나쁘지 않은데?”
기뻐하는 그녀를 보자 내 마음도 덩달아 기뻤다.
“앞으로 종종 놀러 나오자.”
“전 언제나 대기 중입니다! 바쁘신 분은 따로 계시죠.”
“하하, 미안해. 내가 시간 많이 낼게.”
“아냐. 나 신경 쓰지 말고 당신 일 해. 당신에게 이 많은 사람들의 삶과 행복이 달려 있잖아?”
그녀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등짐을 진 장사치부터 병장기를 찬 무인들까지. 저마다 바쁘게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 나도 바빠. 무공수련도 하고, 진법 공부도 하고. 미뤄뒀던 책들도 읽고.”
그녀의 노력이 느껴진다. 이전보다 좀 더 차분해진 느낌도 그러한 노력과 생각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에는 너 때문에 노력했어. 어떻게든 노력해서 네 수준을 따라가고 싶었거든.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어. 누군가와 비교해서 모자란 것을 채워야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
그녀는 괜히 거창한 이야기를 했다는 듯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건지 몰라서 그냥 수련하고 노력 중이야. 이래도 되는 건가? 이래도 되는 겁니까, 맹주님?”
충분하다거나, 옳은 길이란 대답을 해줄 만한 자격이 내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하루 그녀와 신나게 노는 것이겠지.
그래서 정말 신나게 놀았다.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먹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가볍게 술도 한잔하고.
헤어지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무슨 중요한 일 있지? 그래서 오늘 나 만난 거지?”
“느껴졌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딴에는 평소처럼 대한다고 했어도, 여자만이 느끼는 감이 있는 모양이다.
송화린은 그 내용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잘되기를 바랄게.”
“고맙다.”
정말 오늘 그녀를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다음 날 새벽, 드디어 기다렸던 순간이 되었다.
나와 마철군은 나란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임연정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대법을 시작하겠습니다.”
“잘 부탁하오.”
“걱정 마세요, 맹주님. 자, 이제 미혼약에 저항하지 마시고 그대로 주무세요.”
대법이 시작되었고, 나는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로 잠이 든다는 것부터 아주 낯선 경험이었다.
낯선 곳에서 깨어났다.
길 가운데였는데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날씨는 청명한 봄의 한낮처럼 맑고 쨍했다.
천천히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끝도 없이 나 있는 길이었다. 길 양옆으로는 들꽃이 피어 있었고, 나비가 날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던 바로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인생은 본래 외로운 법이라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노인 하나가 미소를 지은 채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바로 마신성에서 만났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나?”
“노인장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마신결의 대성을 이루어야만 만날 줄 알았습니다.”
“그랬군.”
“아무튼 반갑습니다.”
노인이 하늘 그 차체인지, 아니면 하늘의 일을 대신하는 심부름꾼인지 정확한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인간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노인과 함께 천천히 길을 걸었다.
“여긴 어디입니까?”
“자네 마음속이네.”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없는 외길, 평화로운 경치가 아름답긴 하지만, 왠지 너무 적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 영혼이 이렇게 외롭습니까?”
“외롭다고 느껴지나?”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자네가 있지 않나?”
“네?”
“자네 마음속에 자네가 있으면 된 것이지. 요즘은 자신의 마음에 자신조차 없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눈앞에 펼쳐진 길을 바라보았다.
“이 길이 제가 가야 하는 길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모호한 대답에 내가 다시 물었다.
“길의 끝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 전에 과연 길이 끝나는지를 먼저 물어야겠지.”
노인이 대답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의 누가 마지막에 도달하고 죽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다 이뤘다고 여기는 사람조차, 자신이 임의로 정한 끝일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 내가 길을 벗어났다.
“저쪽으로 가보죠.”
“좋네.”
노인은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길을 벗어나서 들꽃 사이로 계속 걸어갔다.
조금 걸어가다가 내가 노인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노인과 함께 다시 처음 걷던 길로 걸어 나왔다.
“왜 다시 돌아오자고 했나?”
“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에 어찌 길이 하나뿐인가? 저 샛길도 내가 가면 결국 길이 될진대.”
“그런데?”
“저 샛길을 걸어가다 보니 이번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어디든 이렇게 다 길이 될 수 있지. 그러니까 원래의 길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저기 잠시 앉아서 쉬었다 가세.”
“네.”
노인과 함께 길가에 앉았다. 이 길도, 저 길도, 이렇게 앉아서 쉬는 것도 모두 좋았다. 좋다고 여겨졌다.
“이렇게 맑은 마음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노인은 날씨가 아니라 마음이라 표현했다.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이미 자넨 알고 있지 않았나?”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신결의 대성을 이뤄야 나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네.”
내가 깜짝 놀라서 노인을 돌아보았다. 노인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자넨 마신결의 대성을 이뤘네.”
너무 놀라서 잠시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마신결의 대성을 이뤘다고요?”
“그렇다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가 뭘 했다고요? 이렇게 쉽게 대성을 이루다니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을 했지만, 그냥 커다란 물통에 한 방울씩 물을 담는 심정으로 편하게 수련했을 뿐이었다.
“쉽게 이루지 않았지.”
“네?”
노인이 한 사람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이십 대의 젊음에, 이 대단한 무공에, 무림맹주라는 최고의 권력에, 그 어마어마한 돈에. 나 같은 놈 빼주려다가 죽으면 아깝지 않을까?”
“이 말은?”
이혼대법을 하자고 설득하던 과정에서 천마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자넨 이런 상황에서 친구를 위해 이혼대법을 결정했네.”
“설마 그 결정이?”
“마신결의 대성을 이루는 데 마지막 한 바가지의 물이 된 것이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천마를 빼내 주려한 마음이 대성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줄이야?
“이제 마신지검을 사용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까?”
“당연히.”
“혹시 마신지검이 심검의 경지와 같은 것입니까?”
“그렇다네.”
“아!”
나는 다시 탄성을 내뱉었다.
새로 태어나면서 내가 목표한 것.
심검지경.
그 어려운 목표를 이룬 것이다.
천마를 살려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천마를 죽일 수 있는 심검을 얻게 된 것이다. 이 또한 정말이지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결과였다.
“자넨 이제 선택을 해야 하네. 어쩌면 마신결의 대성을 이루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지.”
“어떤 결정입니까?”
“마신이 되는 시험에 응하느냐, 마느냐의 결정이지.”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나는 이제 입신의 경계에 섰다. 걸어 들어가느냐, 돌아서 나오느냐는 내 선택에 달린 것이다.
“어떤 시험입니까?”
“아주 어렵고 힘든 시험이지. 자네가 죽을 수도 있다네.”
마신결의 대성을 이룬 내가 죽을 수도 있다면, 그 시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 한 시진이든, 십 년이든 얼마든지 생각하게. 자네가 결정을 내리면 내가 알아서 다시 찾아올 것이네. 그럼 그때 보세.”
노인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다음 순간, 눈을 떴다.
꿈결 같았던 마음의 대화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임연정이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법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 * *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마철군이 깨어났다.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옆 침상에 걸터앉아서 그가 깨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연정 역시 한옆의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천마는 내 몸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 그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이제 그는 저 마철군의 몸에 깃들어 있어야 한다. 만약 저자가 여전히 마철군이라면, 대법은 실패고 나는 친구를 잃은 것이다.
제발 저 몸으로 들어갔기를.
마철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나 역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향한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대법이 성공했음을.
눈빛에 담긴 것은 호의였고, 감격과 기쁨이었으며, 대법에 실패한 척 장난조차 칠 수 없는 감출 수 없는 격정이었다.
“기분이 어때?”
내 물음에 마철군이, 아니 천마가 대답했다.
“나쁘지 않군.”
“당신 맞지?”
“의심 많은 정파꼰대 같으니라고.”
“하하하.”
내가 침상에서 내려가 그에게 걸어갔다. 침상에 앉아 있는 그를 힘차게 안았다.
“좋네. 이렇게 보니까.”
천마가 나를 밀어냈다.
“징그럽게 무슨 짓이냐?”
“하하하. 자네가 확실하군.”
“이딴 시험 따윈 안 해도 된다. 내가 확실하니까.”
그가 침상에서 내려오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
“성질도 급하지. 좀 더 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 괜찮다.”
“쉬어.”
“벌써부터 잔소리를 하는군.”
천마가 말로는 불평을 했지만 전혀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사실 기쁨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그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겠는가? 춤이라도 추고 싶을 거다. 당장이라도 자식과 손자들을 보러 달려가고 싶을 것이다.
“그래, 좀 피곤하네.”
천마가 다시 침상에 누웠다. 아직은 새 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강호를 활보하려면 그의 독문무공인 혈뢰천화공을 새 몸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고.
“이제 쇠털같이 많은 날이 있으니 우선은 푹 쉬어.”
돌아서 나오려는데 천마가 물었다.
“넌 괜찮나?”
“나?”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느껴졌다. 마신결의 대성을 이룬 후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내공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정순해졌고, 몸은 금강불괴가 된 듯 튼튼해졌다. 온몸 곳곳에 힘이 넘쳐흘렀다.
마신영풍보는 더욱 빨라졌을 것이고, 마신결의 초식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마신지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내 마음의 검은 어떤 모습일까?
“그렇게 막 돌아다녀도 돼?”
“워낙 실력 좋은 사람이 대법을 해줬잖아?”
내가 임연정에게 걸어가서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소.”
“대법이 성공해서 다행이에요.”
임연정의 얼굴에 감격이 가득했다. 이혼대법을 연구하고 공부한 그녀가 처음으로, 그것도 혼자서 성공시킨 것이다.
“그대 덕분에 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을 얻었는지 모를 것이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마신결의 대성을 이뤘고, 천마라는 친구를 얻었다.
“이제 한 번 갚은 거예요.”
“무슨 말씀이시오?”
“맹주께서 저와 제 아들을 구해주셨을 때, 평생을 다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이제 겨우 한 번 갚은 거예요.”
나는 안다. 각박해진 강호에서 호의를 호의로 갚는 사람이 정말로 귀하다는 것을.
그래서 이 되돌아온 호의는 다시 호의로 돌려줄 것이다. 그녀가 가장 필요할 때, 내게 왔던 호의 그대로 고이 되돌려 줄 것이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마음이 이럴진대 긴말은 필요 없으리라.
“고맙소.”
연구소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저 하늘 어디선가 노인이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대체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서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천마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운명이 너를 이곳까지 이끌었다면, 아마 굉장한 적이 나타날 거다.
괜찮다.
나는 이제 싸울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