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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되 함께 걷고(2)
내가 무림맹으로 돌아왔을 때 갈사량이 신행에서 돌아와 있었다. 여기저기 사람 많이 가는 명승지를 여러 군데 돌아다녔다고 했다.
“내자가 평범한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반서정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평생 정보를 다루고 특별한 일에 매달려온 그녀였다. 신행만큼은 평범한 다른 부부들처럼 다녀오고 싶었던 것이리라.
“신행이 즐거웠던 것 같군. 얼굴이 환해지셨네.”
내 말에 갈사량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반응하면 놀릴 수밖에 없지 않는가?
“십 년은 더 젊어지신 것 같네.”
“맹주님, 놀리지 마십시오.”
그러자 백표가 슬쩍 거들었다.
“십 년이 아니라 이십 년은 더 젊어 보이십니다. 이거 조만간에 조카를 안아볼 수도 있겠습니다.”
“허허. 자네까지 왜 그러나?”
갈사량은 활기차 보였다. 요즘 들어 웃는 모습을 간간히 보였지만, 지금 보이는 미소가 훨씬 편안해보였다.
그래, 앞으로도 쭉 행복하시게.
“참, 천도문주 마령인이 다녀갔습니다.”
“역시 그 일로?”
“네. 봉쇄된 내공 때문이지요.”
나는 이번에 맹주가 되고 난 후, 천왕군에게 단전이 봉인된 이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 단주직에서 해임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단전을 풀어줄 생각이 없네.”
마령인이 어떤 자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마철군보다 훨씬 사악하고 간교한 놈이다. 내공을 풀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놈도 함께 뇌옥에 가두고 싶지만 일처리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는 상태다.
마령인을 건드리는 것은 천도문을 건드리는 일이니, 힘으로 짓누를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해법이 뒤따라야 했다.
“일단 애 좀 타게 놔두게.”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백표에게 물었다.
“멸마단은 어떻게 되었나?”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조직을 다루는 데 이미 일가견이 있는 백표였다. 실력과 경험, 거기에 배후에는 내가 있었다.
“잘했네.”
내부의 멸마단과 외부의 흑표대.
거기에 맹호단과 천궁단이 친 맹주세력이었다. 나머지는 무림맹을 위하는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이들이 단주를 맡고 있었다.
“맹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군. 고생들 했네.”
“맹주님께서 잘 이끌어 주신 덕분입니다.”
그렇게 우린 서로를 치하했다.
맹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으니, 이제 마음 놓고 하려는 일을 진행해도 될 것 같았다.
* * *
천마가 좋아하는 술을 준비해서 천기심환공을 발휘했다. 눈앞에 갈대숲이 펼쳐진 야트막한 언덕에서 그를 만났다. 천마는 이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갑자기 웬 술이냐?]
[오랜만에 한잔하자고.]
[나야 좋지.]
둘이 나란히 앉아서 술을 마셨다.
우린 잠시 머리를 비우듯, 가져온 술이 다 빌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와 난 이렇게 말없이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자, 이제 할 말 해봐.]
천마는 내가 할 말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긴, 이젠 척하면 삼천리까진 아니더라도 척하면 착이지 정도는 되었으니까.
내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천마의 옆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주로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실 때가 많아서일 것이다.
[주름이 많네.]
[나이도 많다.]
[흰머리도 많고.]
[흰머린 너도 많았잖아.]
[지금은 없잖아?]
[놀리냐?]
[그래, 마지막으로 놀리려고.]
천마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무슨 마지막?]
나를 향한 천마의 눈동자에 피어오른 의구심이 놀람으로 번졌다가 경악으로 바뀌었다.
[너 심검을 터득했구나!]
마지막이란 말을 자신이 죽기 전, 마지막 장난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오해를 해도 크게 했다.
[아, 요즘 이상하게 굴더니! 그래서였구나? 축하한다!]
[정말 축하해?]
[당연히. 심검지경은 모든 무인의 꿈이잖나?]
[당신이 죽게 되는데도?]
[어차피 한 번은 죽어. 게다가 심검에 죽는다면 어찌 여한이 있을까?]
[당신 좋아하는 꼴 보기 싫어서 안 죽이련다.]
[하하. 미운 정이 무섭지.]
천마는 정말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대화로 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시선이 다시 들판을 향했다. 불어온 바람에 갈대가 일제히 한옆으로 쏟아졌다. 하지만 아무리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이리저리 바람에 따라 흔들릴 뿐이었다.
[이혼대법으로 당신을 내 몸에서 빼낼 거다.]
[뭐?]
천마가 깜짝 놀랐다.
[다시 마교를 세워 천하일통을 꿈꾸든, 손자 재롱이나 보며 살든, 아니면 나랑 술이나 마시며 살든, 네 마음대로 해라.]
[너 진심이구나.]
[그래, 진심이다.]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 지난 후 천마가 물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냐?]
[당신이 있으니까 바람도 못 피우겠고.]
일전에 천마가 임연정과 바람을 핀다고 오해를 했었다.
[장난치지 말고!]
나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고민했다. 그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뭐라고 대답을 할까. 계속 한 가지 대답이 떠올랐고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과연 지금 하려던 대답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이제 그 순간이 되니까 알 수 있었다. 어색하고 부끄러운 감정보다 그와의 관계가, 그리고 이 대답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당신은 내 친구니까.]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의 얼굴에 번지는 작은 미소를.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천마의 시선이 다시 갈대를 향했다.
우린 나란히 서서 우거진 채 흔들리는 갈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천마가 침묵을 깼다.
[이혼대법이 정말 위험하다는 것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지.]
[네가 죽을 수도 있어.]
[그렇겠지.]
[이십 대의 젊음에, 이 대단한 무공에, 무림맹주라는 최고의 권력에, 그 어마어마한 돈에. 나 같은 놈 빼주려다가 죽으면 아깝지 않을까?]
[아깝겠지. 귀신이 되어서 복수하겠다.]
[이런 미친! 장난치지 말고!]
[아깝다고 했잖아? 안 아깝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혹시라도 네 속에 내가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이러는 것이라면 조금만 참으면 된다. 너라면 멀지 않아서 심검지경에 이를 거다. 그때 나를 죽이면 된다.]
[당신도 알잖아? 부담스러워서 이러는 것 아니라는 것.]
천마의 깊은 주름이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내가 천마에게 물었다.
[만약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나를 대법으로 빼내줄까?]
[미쳤냐? 난 그런 감정에 휘둘리는 약해빠진 사람 아니다.]
[하하하. 그럼 고민할 것 없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냉정하게 유리한 쪽을 선택해야지.]
하지만 천마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대체 왜 망설이지? 정말 이 세상에 깨끗하게 미련을 버렸어? 천마가 어울리지 않게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싶어? 사는 게 재미가 없어?]
[아니. 나도 살고 싶다. 강호사에 얽히지 않고 이번에는 조용히 유유자적 살아보고 싶다.]
[한데 왜 망설여?]
천마가 시선을 다시 갈대로 향하며 대답했다.
[내게도 넌…… 친구니까. 만에 하나라도 대법이 실패하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천마는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내 천마가 소리치듯 말했다. 앞서 친구라고 한 것이 부끄러워서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젠장! 나도 모른다. 하다가 죽어버리면 나 원망하면 안 돼.]
[내가 할 소리야.]
[좋아, 하자.]
천마가 나를 돌아보았다.
[고맙다.]
내가 그를 보며 말했다.
[나도 고맙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천마가 내 손을 잡았다. 이제 진짜 세상에서도 이렇게 손을 잡을 날이 올 것이다.
[알다시피 이혼대법은 위험해.]
[괜찮아. 누구보다 그 일을 잘 해낼 사람이 맡을 테니까.]
[누구? 아, 그렇군. 임연정이군. 왜 그녀와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나 했더니 이런 짓을 꾸미고 있었군.]
[그녀라면 잘 해낼 거다.]
천마는 또 다른 사실도 알아차렸다.
[내가 들어갈 몸은? 아, 악인 놈들을 잡으러 다닌 것도 내가 들어갈 몸을 찾았던 것이로군.]
[마땅한 놈이 없더군.]
[대충 구해.]
[그럴 수는 없지. 당신이 평생 살아야 하는 몸인데. 그래서 생각해둔 사람이 있다.]
[누구지?]
내가 천기심환공을 풀면서 말했다.
[직접 봐.]
* * *
곧장 무림맹 지하뇌옥으로 내려갔다.
가장 깊숙한 곳에 마철군이 갇혀 있었다. 뇌옥의 책임자에게 물으니 식사도 잘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복수를 꿈꾸는 있는 것이리라.
“잘난 맹주님께서 납시셨군.”
쇠창살 너머 그의 표정이 표독스러웠다.
“잘 지냈나?”
“당신이라면 잘 지냈겠어?”
“나라면 후회하고 있겠지.”
“후회? 내가 왜 후회를 해야 하지? 난 지은 죄가 없다. 내 죄가 있다면 나보다 무공이 강한 놈들에게 내 자리를 빼앗긴 것뿐이다.”
“무림맹주에겐 그것도 죄다.”
자존심을 쿡 찌르는 말이었기에 절로 놈의 인상을 찌푸려졌다.
“풀어주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통하지 않는 협박임을 알면서도 그는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맹주가 되었으니 나는 이만 풀어줘도 되잖아? 어차피 내공도 사용하지 못하는데. 당신의 발가락 하나 건들지 못하는 신세가 아닌가? 그러니 날 풀어줘.”
“당신은 영원히 이곳을 나갈 수 없어. 심지어 살아남기도 쉽지 않지. 죽을죄를 지었으니까.”
“죽을죄? 무슨 헛소리냐?”
“천왕군을 도와서 강호인들을 암흑천병기로 만들었지?”
“그건!”
그는 곧바로 항변하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부분이었다.
“너라면 달랐을 것 같아? 천왕군과 같은 괴물이 협박하는데 어쩌라고?”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했겠지. 하지만 당신은 무림맹주잖아? 그 사람들 지켜주라고 있는 자리잖아?”
“닥쳐! 닥치라고!”
마철군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래, 닥쳐줄 순 있지.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문다고 네가 저지른 짓이 없어지지 않는다.”
“언젠가 꼭 너를 죽여 버릴 거다.”
“미안하지만 네게는 그럴 기회가 없을 것 같다.”
피잇.
내 지풍이 마철군의 수혈을 제압했다. 꼬꾸라지듯 쓰러지려는 그를 내가 무형의 기운을 발출해서 바닥에 부드럽게 눕혔다.
이제 마철군의 몸은 마철군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천마가 내게 말했다.
[이놈을 선택할 줄은 몰랐군.]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가장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까. 어때?]
[이 정도 몸과 외모라면 나쁘지 않지.]
[대신 세상에 너무 알려진 얼굴이라서, 여러 피곤한 일들이 생길 수 있어.]
[한동안 죽립을 쓰고 다니면 되겠지.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이놈의 존재조차 다 잊을 거다.]
[그건 너무 오래 걸려. 차라리 놈으로 살아보는 것은 어때?]
내 제안에 천마가 깜짝 놀랐다.
[마철군으로?]
[그래. 마철군이 천왕군을 도와 암흑천병기를 만든 일은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 비록 지금은 뇌옥에 갇혀 있지만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그가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예상대로 풀려나서 놈의 인생을 살아도 상관없어. 전대 무림맹주로 사는 거지.]
[전대 무림맹주였던 너는 마신의 시험에 들고, 전대 천마였던 나는 전대 무림맹주가 되는구나.]
[그렇군.]
이것이 그와 내가 겪게 되는 삶의 역설이자 모순이었다.
[네 결정만 남았다.]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천마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
* * *
마철군을 은밀히 임연정의 연구실로 옮겨졌다.
맹주와 관련해서 특별한 시험을 하겠다는 명목하에 연구실 주위로 철통같은 경계가 세워졌다. 광두와 맹호단이 주위를 지켰고 백표가 믿을 만한 수하들을 데리고 지원을 나왔다.
내가 임연정에게 물었다.
“언제쯤 대법을 시행할 수 있겠소?”
“준비는 이미 다 되어 있어요. 언제라도 가능해요.”
“그럼 내일 아침에 합시다.”
생각보다 빠른 결정에 임연정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어차피 마음의 결정을 내린 이상, 미룰 일이 아니었다.
“네. 준비하겠어요. 맹주께서도 이제부터 준비를 해주세요.”
“그러겠소.”
그녀가 바쁘게 움직였다.
천마가 내게 물었다.
[정말 내일 하려고?]
[말 나온 김에 하지. 내 몸에서의 마지막 밤이니까, 푹 잘 자라.]
내가 이렇게 빨리 대법을 진행할지 몰랐기에 천마는 다시 한 번 놀랐을 것이다.
[넌 정말이지…….]
[좋은 친구지?]
[제대로 미친놈이다.]
[하하하.]
나는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설령 대법에 실패해서 죽게 된다 하더라도 크게 두렵지 않았다.
벽리단으로 새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했다.
지금 이 순간도 그 노력은 진행 중이었으니까.
이것이 내 등을 미는 운명을 상대하는 나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