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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탄생, 밤의 죽음(3)
펑! 펑펑! 펑!
사방에서 폭죽이 터졌고 모여 있던 무림맹 무인들이 환호를 질렀다.
오늘 드디어 무너졌던 맹주전을 다시 완공한 것이다. 내가 맹주가 된 지도 벌써 오 개월이 지났다.
“감축드립니다, 맹주님.”
갈사량을 선두로 무림맹 인사들이 와서 축하를 건넸다.
“내가 때려 부순 건물인데, 축하를 받으니 오히려 미안하네.”
그러자 광월단주 주승탁이 말했다.
“맹주님께서 때려 부순 것은 맹주전이 아닌 천왕군이라는 악적이었지요.”
그 말을 받은 사람은 천궁단주 종천락이었다.
“물론입니다. 맹주님이 아니셨다면 강호는 암흑천지였을 겁니다.”
집법당주 가경이 칭송을 더했다.
“무림맹의 기강이 과거 천맹주 시절로 되돌아온 것만 같습니다. 이 모두가 맹주님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입니다.”
단주들이 모두 한마디씩 축하의 말을 전했다. 나를 향한 눈빛에 믿음이 가득했다. 지난 오 개월이면 충분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내가 어떤 무림맹을 추구하는지는 알게 된 것이다.
“과찬의 말씀이시오. 자, 다들 오늘 하루는 잠시 일에서 떠나 편히 즐기시오.”
“하하하, 네. 오늘은 마음껏 마시겠습니다.”
무림맹에 큰 연회가 열렸다. 다들 기뻐하며 맹주전이 다시 지어진 것을 축하했다.
무림맹 무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강호인들 역시 크게 기뻐했다. 듣자니 무한 일대에 군웅들이 모여들어 객잔이며 주점이 발 디딜 틈조차 없다고 했다.
맹주가 된 이후 내 인기는 계속 오르고 있었다.
연회가 한창일 때,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맹주전에 들어섰다.
맹주전은 예전과 다르게 지어졌다. 갈사량이 새로운 진법과 기관을 보강해서 훨씬 철통같은 보안을 지닌 맹주전을 만든 것이다. 고맙게도 갈사량은 건축양식은 물론이고 내부의 구조와 벽과 바닥의 색상, 안을 채운 가구들, 심지어 태사의의 나무 장식까지 내 취향에 맞게 꾸며주었다.
내부의 한쪽 벽에는 천왕군을 격퇴한 일이 새겨져 있었다. 다소 미화되고 과장되었지만, 그날의 일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었다.
왠지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과거에는 다른 기록들이 있었다. 당시 내 삶의 기록.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열다섯 번의 싸움, 이젠 강호의 역사로 남은 내 지난 발자취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젠 과거는 다 지워지고 새 맹주 벽리단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앞으로의 내 행보에 따라 이 벽에 기록될 내용들이 달라질 것이다.
과연 어떤 내용들이 기록될까?
붉은 융단을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 위에 놓인 태사의에 앉았다.
임시 맹주전과는 확실히 기분이 달랐다. 반가우면서도 어색했다.
지난 오 개월 동안 바쁘게 맹주 일을 하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무공수련을 했다. 바쁘면 바쁜 대로, 한가하면 좀 더 집중해서. 처음 무공을 배우던 그 시절로 돌아가 열심히 수련했던 것이다.
여전히 마신결은 구 성에 머물러 있었지만 대성에 목말라하지 않았다. 혹 대적을 만나더라도 지금 구 성의 실력으로 상대하겠다는 마음을 먹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였을까? 지난달에는 보법인 마신영풍보의 대성을 이루었다.
마신비행은 최소의 내공으로, 빠르게, 먼 거리까지라는 세 가지 요건을 모두 갖췄다.
마신지로는 내공의 소모는 많았지만 정말이지 아무도 믿지 못할 움직임을 보였다. 눈에 보이는 곳까지 순식간에 순간이동을 하듯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마신부운의 도약력이나 마신암영의 신묘함, 마신탄영의 강력함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마신결의 검결이 비록 구 성에 머물러 있었지만, 지금만 해도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무공의 한계를 이미 넘어섰다.
마신결의 대성을 이룬다면, 입신(入神)의 경계에 서게 될 것이다.
과연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선택할 길은 무엇일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곳으로 갈사량이 걸어 들어왔다.
“다시 그 자리에 앉으시니 기분이 어떠십니까?”
갈사량이 물음에 내가 솔직히 대답했다.
“낯설군. 어깨가 무겁기도 하고.”
“곧 적응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부담 가지실 필요 없으십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훌륭하게 잘해 오셨으니까요.”
지난 오 개월간 무림맹은 안정을 되찾았다. 무림맹이란 조직은 맹주가 누구냐에 따라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갈사량과 나는 해야 할 일들을 척척 해나갔다. 내 강력한 무공과 지도력, 거기에 갈사량의 머리가 더해지니 거칠 것이 없었다.
적어도 우린 무림맹 일에 있어서만은 전문가 중의 전문가가 아니던가? 평생을 해온 일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불과 오 개월이었지만 무림맹은 확실하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강호인을 위해 일하는 무림맹이란 인식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 덕분이네. 아마 자네가 총군사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무림맹은 엉망이었을 것이네. 아니, 내가 이 자리에 앉지도 못했겠지.”
갈사량의 권유가 아니었으면 무림맹주가 될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맹 내의 부패는 어떠한가?”
“많이 바로잡았습니다. 애초에 근간을 흔들 정도는 아니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맹주님께서 워낙 기강을 튼튼히 잡아두셨잖습니까?”
이후 마씨 부자가 무림맹주가 되면서 기강이 많이 해이해졌지만, 뿌리가 썩을 정도는 아니었다.
“앞으로도 집법당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몸 챙기면서 일하게. 자네 몸이 자네 몸 아닌 것 알지? 내게 맡길 일은 편하게 맡기고. 자넨 일을 줄여.”
“감사합니다, 맹주님.”
갈사량이 나를 보며 웃었다. 요즘은 자주 웃는다. 전생에는 보지 못했던 웃음이다.
그래, 이번 생은 이렇게 가자고.
“참, 아까 반회주도 왔던데.”
“네, 봤습니다.”
천망회주 반서정의 이름이 언급되자 갈사량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갈사량은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인사하고 간다고 지금 객청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가보게.”
“괜찮습니다.”
“오랜만인데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어서 가보게.”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갈사량이 물러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미뤘던 일을 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일은 맹주전을 다시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 * *
“복귀하신 것 축하드려요.”
반서정의 인사에 갈사량이 미소로 답했다.
앞서 조직 전체가 지하로 숨어들었다가, 벽리단이 맹주가 된 이후 다시 활동을 재개한 천망회였다.
“주군께서 워낙 출중하신 분이시라, 덕분에 또다시 과분한 중책을 맡게 되었소.”
“맹주님 말씀은 다르시던데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갈군사님이 아니었다면 맹으로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이 맹주 자리는 갈군사가 만들어준 자리라고.”
“괜히 치켜세워주신 것이오.”
반서정이 미소를 지었다.
“두 분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서로를 이렇게 위해주는 상하(上下)가 있을 수도 있구나. 부럽기도 하고요. 더구나 두 분은 나이 차이도 많이 나잖아요?”
“나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반회주께서도 많이 봐오지 않았소? 나이를 헛먹은 수많은 늙은이들을. 나 역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지요.”
“군사님은 아직 젊으세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갈사량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음이 아려왔다.
‘조금만 더 젊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좀 더 자신 있게, 적극적으로 반서정을 대할 수 있었을 텐데.
“반회주께선 여전하시오.”
“여전하다니요?”
“전혀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소.”
“어머, 이거 칭찬이죠?”
“물론이오.”
“처음이네요, 군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것도.”
그녀가 활짝 웃었다. 갈사량은 그녀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이든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함부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 소중한 감정을 날려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럼 이만 가볼게요. 부디 보중하세요.”
“반회주도 잘 지내시오.”
“참, 한가하실 때 차 한잔 마시러 오세요. 마침 좋은 차가 들어왔답니다.”
“그러겠소.”
반서정이 그곳을 걸어 나갔다.
갈사량은 창문에 서서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 * *
불루에 간 것은 갈사량이 아니라 나였다.
나는 광두와 몇 사람의 맹호단 무인들만 데리고 그곳을 찾았다.
“맹주님!”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반서정은 깜짝 놀랐다.
“문득 지나다가 차 한잔 생각이 나서 들렀소.”
물론 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방문했다. 반서정 역시 눈치챘을 것이다.
어제 축하연에서 만나 인사를 했는데, 굳이 오늘 다시 들를 일이 없었던 것이다.
“잘 오셨어요. 마침 좋은 차가 들어왔답니다.”
“운이 좋구려.”
반서정이 직접 차를 타왔다.
그녀와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그녀는 굉장히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면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천망회주로 만났고, 오늘은 지극히 사적으로 만났기에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시지요.”
“갈군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역시 그 때문이시군요.”
반서정은 내가 그 일로 방문한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 갈군사님 좋아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존경하고, 남자로서도 좋아하고 있어요.”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그녀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제 감정을 감추고 미루기에는 저도, 그분도 나이가 너무 많잖아요?”
* * *
그날 밤, 갈사량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맹주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생각지 못한 시간의 방문에 갈사량은 깜짝 놀랐다.
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술병을 흔들어보였다.
“무슨 일이 있겠나? 자네와 술 한잔하려고 왔지.”
그제야 갈사량이 안도했다. 그가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이리로 앉으십시오.”
근래 바빠서 둘만의 술자리를 가지지 못했다. 굳이 마시려면 마실 수도 있었지만 내가 참았다. 갈사량 성격에 술을 마신 다음 날에도 숙취를 참아가며 평소처럼 일할 것이 뻔했으니까.
갈사량과 술을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주거니 받거니 취기가 올랐을 즈음, 내가 넌지시 말했다.
“자네도 이제 혼인하고 가정을 꾸려야지.”
갈사량은 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나이에 혼인이라니요?”
“자네 나이가 어때서? 혼인은 조금 늦었을 때가 딱 좋을 때라는 말도 있지 않나?”
“하하, 그런 말 금시초문입니다.”
“나는 자네가 가정을 가졌으면 좋겠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전혀?”
대답은 앞에 놓인 잔을 비운 후에 나왔다.
“네. 전혀 없습니다.”
“하나 반회주 생각은 다르네.”
내가 갑자기 그녀를 언급하자 갈사량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하도 답답하게 굴어서 내가 매파 노릇을 하려고 하네.”
“맹주님!”
“반회주는 허락했네.”
“네? 허락하다니요?”
갈사량이 이렇게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휘둥그레 눈을 뜬 그에게 내가 말했다.
“그래, 늦었지. 하지만 우린 알지 않나? 세상에 늦은 일이 있는 것처럼, 살면서 선택하지 못할 일도 없다는 것을.”
갈사량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게 있던 그가 내게 물었다.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능하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되네.”
“그녀가 불행해지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우선 저는 늙었고.”
“그래, 자넨 늙었지. 하지만 동시에 자넨 강호일통을 이뤄낸 무림맹의 총군사이기도 하지. 세상 누구보다 똑똑하고, 통찰력이 있으며, 동료를 아껴주고 충성심이 깊은 사람이기도 하지. 반회주가 좋아하는 사람은 단지 늙은 자네가 아니라 바로 그런 사람일세.”
“……맹주님.”
“평생을 자넬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지? 맹을 위해 살았고, 정의각을 위해 살았고, 강호를 위해 살았고, 또 나를 위해 살았지.”
갈사량의 몸이 격정으로 살짝 떨렸다.
내가 그의 손을 잡았다. 깡마른 손에 주름살이 가득했다.
“이번만큼은 자네를 위해 살게. 자네의 감정에 솔직해지게. 맹주가 아니라, 자네의 오랜 친구로서 하는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