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림맹주 벽리단(5)
마철군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무림맹주가 집법당에 의해 체포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크게 벌어질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집법당주가 갈사량의 편이고, 그날 벽리단과의 대화를 엿들었던 모든 수뇌부들이 일제히 돌아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마철군에 대한 강호의 여론이 너무나 나빴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강호는 열광했다.
“드디어 정의가 이뤄졌군!”
“하하하! 기분 좋군. 오늘 이 술 내가 다 산다.”
“정말?”
“아니. 그만큼 기분이 좋다는 거지.”
“참, 그리고 천왕군을 죽인 그 고수 이야기 들었나?”
“무슨 얘기?”
“그날 마철군이 체포당하는 날,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처럼 굉장한 기세를 내보이며 마철군의 실정에 일침을 가하고는 하늘로 날아갔다고 하네.”
“아, 그분을 맹주로 추대해야 해!”
“한데 대체 그분이 누구신가?”
“아무도 모른다던데.”
“그럴 리가 없지. 누군가는 알겠지.”
“하늘이 우릴 도왔어. 그분이 아니었다면 천왕군이란 자가 이 강호를 집어삼켜버렸을 것이네.”
그때 다른 자리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오늘 술값은 내가 낸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야말로 중원은 온통 축제의 도가니였다.
* * *
갈사량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무림맹에서는 새로운 맹주추대를 위한 특별기구가 만들어졌다.
앞서처럼 무림맹 중요 십 개 조직의 수장들이 후보를 내세우고 투표를 통해 뽑는 방식이었다.
집법당과 천궁단의 수장은 확실하게 우리 편이었다. 갈사량은 집법당주를 앞세워서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놈들에게 당했다. 그래서 마봉기를 맹주에 올리는 치욕을 겪었지만 이제는 일처리를 호락호락하게 하지 않았다.
십 개 조직 수뇌부들 대부분은 권력에 야합해서 맹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스스로의 안위를 따랐던 이들이었다.
벽리단이 맹주가 되면 천궁단주와 집법당주만 제외하곤 모조리 갈아치울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확실히 담을 것이다.
그래서 확실하게 일처리를 했다. 집법당주와 천궁단주를 이용해서 남은 이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뜻을 함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임을 주지시켰다.
마철군을 체포한 그였기에 무림맹 내의 최고 권력자는 집법당주 가경이었다.
갈사량은 다시 가경을 만났을 때 이렇게 경고했었다.
“혹시나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헛된 생각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네.”
“내겐 그런 야망이 없소.”
“자네에게 야망이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네. 다만 이것만은 알아두게. 천왕군을 죽인 사람이 바로 우리 주군이시네.”
“맙소사!”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집법당주 가경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명령에 따랐다.
압도적인 힘을 갈사량이 받치고 있다면, 오직 충성만이 살길이었으니까.
첫 회합에서 집법당주는 한 사람을 내세웠다.
“이번 맹주 후보는 이견이 없을 것 같소만.”
그렇게 딴 사람은 꿈도 꾸지 말라고 넌지시 언질한 후에 자신이 내세우는 후보를 밝혔다.
“천왕군을 죽인 그 신진 고수를 후보로 내세우겠소.”
모두들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수긍했다.
가경이 본격적으로 그들을 설득했다.
“천왕군을 죽인 공로는 능히 맹주 자리에 올라도 될 공이라 생각하오. 게다가 강호동도들 역시 그를 원하고 있소.”
모두들 천왕군을 경험해본 이들이었기에 그 말에 공감했다. 게다가 천왕군을 죽인 사내에 대한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한데 너무 젊지 않소?”
의견을 제시한 사람은 원로원의 서복이었다. 마철군의 내공을 풀려다가 실패했던 바로 그였다. 그는 다른 인물을 지지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서복이 가장 큰 걸림돌을 언급하자, 이번에는 천궁단주 종천락이 나섰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소. 마봉기는 나이가 모자라서 그 모양으로 끝장이 났소? 마철군은 젊지만 늙은이보다 더한 탐욕을 지녔고, 마봉기는 늙었지만 애들보다 못한 욕정의 화신이었소. 다시 말하지만 나이는 중요하지 않소. 어떤 마음과 신념을 지닌 인물인가가 중요하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 새로운 문제가 남았다.
“그의 정체를 알 수가 없소.”
서복이 다시 반대의견을 내세우자 이번에는 가경이 나섰다.
“내가 알고 있소.”
이제부터가 갈사량이 준비한 승부수였다.
“그는 산동 벽씨검문의 후계자 벽리단이오.”
가경이 솔직히 정체를 밝히자 모두들 경악했다.
“정말 그가 산동 벽씨검문의 후계자란 말씀이시오?”
“그렇소.”
“대체 일개 지역 문파의 후계자가 어떻게 이런 신위를 발휘할 수 있단 말이오?”
“훌륭한 사부를 두었기 때문이오.”
“사부가 누구요?”
“바로 천맹주의 사부에게 배웠다고 했소. 다시 말해서 천맹주와 사형제간이 되는 셈이지요.”
“아!”
모두들 탄성을 내뱉었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천하진을 가르친 사부에게 무공을 배웠다면 이 대단한 신위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가경이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벽리단과 이야기가 되었다는 뜻. 눈치 빠른 그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오! 그렇다면 난 찬성이오!”
“나 역시 마찬가지요.”
“천맹주를 키워내신 분이라면 분명 훌륭한 분이실 거요. 그분이 키운 또 다른 제자라면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겠지요.”
모두들 그렇게 나오자 서복 역시 더는 반대의견을 내세우지 못했다.
가경이 마지막 쇄기를 박았다.
“거기에 벽공자를 믿어도 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소.”
“무엇이오?”
“그분을 모시는 사람이 바로 전대 군사인 갈사량이오.”
최고의 군사로 알려진 갈사량이 옆에서 보필한다면, 가장 마음에 걸렸던 나이나 경험 문제는 모두 해결이 되는 것이다.
갈사량이란 이름은 마지막 한 방으로 충분했다.
* * *
송화린과 광두를 무림맹 본단이 있는 인근 객잔으로 데려갔다.
“이거 오늘의 술자리 조합이 조금 이상한데요?”
광두의 말에 송화린이 웃으며 말했다.
“일전에도 이상한 조합의 술자리가 있었다면서요?”
“무슨 말씀이시죠?”
“저 빼고 셋이서 술 마셨다던데?”
“아! 그랬었죠.”
일전에 벽리단과 광두, 수란이 술을 마셨던 것이다. 그날을 계기로 광두와 수란의 관계가 한 걸음 더 나아갔었다.
“오늘 이 조합은 뭘까요?”
송화린의 물음에 광두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글쎄요, 지난 조합에 대항하는 조합이 아닐까요? 우리가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다!”
“하하하.”
송화린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 광두가 있으니 이런 즐거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두 사람에게 할 말이 있어.”
“무슨 일이신데요?”
“내가 무림맹주가 되었다.”
오늘 아침 무림맹주 추대기구의 투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전원 찬성의 압도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갈사량이었다. 십 개 조직의 수장들을 압박하고 설득하는 것과 동시에, 마지막까지 강호의 여론이 나를 지지하도록 애쓴 것이다.
광두가 눈을 껌벅이다가 송화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도련님이 무림맹주가 되고 싶으시다는데요?”
“방금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전 그렇게 들었는데.”
송화린의 말에 광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아직 술도 많이 안 드셨는데?”
광두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고 있었다.
“도련님과 지내면서 이런 상황이 여러 번 있었어요. 믿지 못할 말을 이렇게 툭 던지시면 저는 당연히 믿지 못하죠. 한데…….”
광두의 다음 말을 송화린이 받았다. 자신 역시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으니까.
“한데 그것들이 모두 사실로 드러났죠.”
“설마 이번에도 그럴까요?”
“아무리 그래도 무림맹주라니요?”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정말 무림맹주가 되셨다고요?”
“그래.”
“혹시 무림맹이란 이름의 비밀조직을 하나 만드신 건가요?”
“아니다.”
“무한지단주 이런 것 아니고요?”
“아니고.”
“꿈꾸신 것 아니죠? 아니, 지금 이게 꿈인가?”
“꿈 아니다.”
“정말 무림맹주란 말이죠? 저기 저 무림맹요.”
광두가 창밖으로 저 멀리 보이는 무림맹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그래, 저 무림맹의 맹주다.”
“맙소사!”
바로 그때였다. 저잣거리로 마차가 한 대 와서 멈춰 섰다.
마차를 호위하고 온 이십여 명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똑같은 무복에 죽립을 눌러써서 그들이 어디 소속의 무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마차를 비롯해 객잔 주위에 경계태세를 했다. 그들 중 사내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우리가 앉은 자리로 걸어와서 정중히 인사를 한 후에 말했다.
“맹주님을 모시러 가기 위해 맹호단에서 나왔습니다. 호위 인원은 말씀하신 대로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광두와 송화린이 정말 크게 놀랐다. 긴가민가 설마 했던 일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정말 무림맹주가 된 거야?”
말을 해놓고서 누가 들을까 송화린이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도련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내를 따라 걸어가다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해? 함께 가야지.”
광두가 놀라서 물었다.
“저두요?”
송화린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까지 무림맹으로 데려가는 것이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그래, 당연히 너도 함께 가야지.”
“네? 당연히라고요?”
그러자 내게 인사를 했던 무인이 광두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새 맹호단주님을 뵙습니다. 저는 부단주 청양(淸洋)입니다.”
너무 놀란 광두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광두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내가 가장 먼저 내린 지시다. 이제부터 네가 나를 지켜다오.”
광두가 격정에 휩싸였다. 얼굴 가득 놀람과 기쁨과 걱정이 뒤섞여 번져나갔다.
“이래선 안 될 것 같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해보렴.”
“도련님!”
“이놈아, 귀청 떨어지겠다.”
“제가 어떻게 맹호단주란 직책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백대주께서 하던 일을 제가?”
“광두야.”
“네?”
“넌 그 자리에 넘치고 남는 사람이다. 사실은 훨씬 더 큰일을 시켜야지.”
“도련님?”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일 갑자의 내공까지 늘어난 광두의 무공실력은 맹호단주의 자리에 결코 모자란 실력이 아니었다. 게다가 광두의 선하고 훌륭한 인품까지 생각한다면, 내 말은 결코 듣기 좋으라고 해준 괜한 칭찬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너를 맹호단주에 임명했는지 아느냐?”
“왜입니까?”
“너를 항상 내 옆에 두고 싶어서다.”
광두의 눈빛이 흔들렸다.
맹호단의 무인들이 듣고 있는 자리였다. 앞으로 이들을 이끌 광두를 위해서, 내가 그를 얼마나 아끼고 좋아하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항상 이런 식이시죠. 이런 말에 제가 또 넘어가는 거죠.”
“칼받이의 운명이지.”
“그 칼받이, 요즘 출세의 연속입니다.”
“하하하.”
광두가 내게 큰 절을 올렸다.
“맹호단주로서 맹주님을 제 목숨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광두를 일으켜 세웠다.
벽리단으로 깨어났을 때의 광두가 생각난다.
그땐 나도, 그도 알지 못했다. 무림맹주와 맹호단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 줄은.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인생이 남아 있을까? 어떤 자리에서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까? 그래,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겠지.
“고맙다. 너만 믿으마.”
“네, 믿어주십시오…… 맹주님.”
“가자. 가서 얘기하자.”
송화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얼떨떨하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 역시 무림맹주의 정혼자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갈까?”
“응…… 아니, 네, 맹주님.”
“격식 차리지 않아도 돼.”
“차려야지요. 더구나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는 더욱.”
“가자. 이제부터 할 일들이 많다.”
앞으로 여러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앞을 막을 테고.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들이 함께 있으니까.
나와 두 사람이 오르자 마차는 무림맹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인사는 천마가 했다.
[축하한다.]
[고맙다. 하지만 아쉽군.]
[뭐가?]
[당신 같은 멋진 적이 없어서.]
[또 사람 부끄럽게 하는군.]
[하하하. 당신이 매번 이렇게 부끄러워하니까. 재미있어서 그렇지.]
[조심해. 운명이 너를 무림맹주로 다시 이끌었다면, 아마 굉장한 적이 나타날 거다.]
[어쩌면 그럴지도.]
마차 창밖으로 웅장한 무림맹 건물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