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천마-270화 (269/304)

=======================================

무림맹주 벽리단(3)

내 결정에 백표가 정말 기뻐했다. 그게 어느 정도였나 하면.

“죄를 짓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가 달려들어서 나를 와락 껴안았다.

“맹주님,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큰 결정을 해주셨습니다.”

내가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미안했네. 내가 자네들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네.”

“아닙니다. 맹주님.”

“백표야.”

“네.”

“지난 생에서…… 내가 먼저 떠나서 정말 미안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지켜드리지 못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백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나는 일부러 백표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말을 해야 한다.

미안한 것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한다. 몇 번이고 하고 또 해야 한다.

가까운 사람이라서 다 이해하겠지 생각하면 안 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 그게 참 잘 안 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말에 담긴 힘은 크다. 거기에 진심까지 담기면 마음의 깊은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는 기적을 만들기도 하니까.

그곳으로 갈사량이 들어왔다.

우리를 보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백표의 표정만 봐도 우리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짐작한 것이다.

갈사량이 모른 척 자신의 용무를 밝혔다.

“우선 마철군을 만나 주십시오.”

“만나서는?”

“무슨 말을 할지는 뻔하지만, 우선은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되도록 마철군이 맹주님을 믿게 하십시오.”

뭔가 복안이 세워진 모양이었다.

“알았네. 그건 어렵지 않지.”

* * *

마철군이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꿈에서 아버지 마봉기를 만났다. 피 칠갑을 한 채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에 기겁했다.

당시에 그는 위기에 빠진 마봉기를 구하러 가지 않았고, 결국 죽었다. 구하러 갔어도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변명을 해본들, 가지 않았다는 그 행위만으로도 그는 아버지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식이었으니까.

“젠장! 빌어먹을! 다 자업자득입니다! 그러기에 누가 그렇게 방탕하게 살라고 했소? 아들의 존경조차 얻지 못하라고 했느냔 말이오!”

혈육을 버리면서까지 얻은 맹주자리인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무심코 창가로 고개를 돌렸을 때, 깜짝 놀랐다.

누군가 방안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철군이 벌떡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구냐!”

사내가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나를 찾고 있었다고?”

순간 마철군이 얼어붙었다. 상대가 바로 자신이 찾고 있던 천왕군을 죽인 고수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물었다.

“왜 나를 찾았나?”

* * *

마철군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살기도, 마기도 아무 기도도 발출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더욱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에게 나는 천왕군이란 괴물을 죽인, 더 무서운 괴물이었으니까.

“부탁이 있어서요.”

마철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무슨 부탁이지?”

“대협께서 격살한 천왕군이 내 단전을 제압했소. 대협이 아니라면 아무도 풀지 못하는 수법이오. 부디 강호를 위하는 마음으로 본인의 내공을 풀어주시기를 바라는 바요.”

“강호를 위하는 마음?”

“무림맹주는 곧 무림맹이 아니겠소? 나아가 무림맹이 쓰러지면 이 강호가 쓰러질 것이오.”

“금시초문이군. 맹주는 맹주고, 무림맹은 무림맹이고, 강호는 강호 아닌가?”

시시콜콜 따지고 묻자 마철군이 당황했다.

“천왕군을 제거하셨던 바로 그 대협대의를 말씀드리는 것이오.”

“내게 대협대의 같은 것은 없는데?”

“겸손하신 말씀이시오.”

마철군은 예를 갖추면서도 무림맹주라는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느껴지는 것은 위엄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내공을 되찾으려는 욕심.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단전을 제압당한 사람은 당신뿐만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아! 물론이오.”

마철군은 앞서보다 더 당황했다.

“본단의 중요조직의 수장들도 모두 함께 당했소.”

“한데 그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군.”

“본인의 단전을 회복하면 곧바로 부탁하려고 했소.”

“그런가? 한데 어쩌지? 나는 그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창문을 통해 몸을 날리려고 할 때 마철군이 소리쳤다.

“뭐든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소.”

“뭐든? 내가 무엇을 원할지 알고?”

“그게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소. 돈이면 돈, 권력이면 권력. 미녀라면 미녀. 뭐든 말만 하시오.”

“오호?”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절대강자만의 고독이 있으실 것이라 생각하오. 그 부분은 내가 다 채워드리겠소. 나 같은 사람과의 교분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

그와의 첫 만남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알았다. 다시 연락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밖으로 몸을 날렸고 번쩍하는 순간에 그곳에서 사라졌다.

안가로 돌아와서 갈사량에게 마철군와 만남에 대해 그대로 전해주었다.

“역시 예상대로군요.”

“내공을 되찾을 수 있다면 벌거벗고 춤이라도 출 태세였다네.”

“그보다 더한 일도 할 겁니다. 자리를 지키려는 그 욕망이 결국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겠지요.”

그래, 그 욕망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갈사량의 계획은 쉽게 먹힐 것이다.

“이후 계획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러지.”

내게 맹주가 되라는 말을 할 때부터 이미 밑그림은 그려둔 모양이다.

* * *

“무림맹주가 되려고 합니다.”

내 말에 부모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렇게 놀라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옆에 함께 있던 송우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다들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천천히 또박또박 그들에게 말했다.

“무림맹주가 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 사람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놀람을 서로에게 전하며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감정을 교류했다.

이런 반응은 당연히 예상했다.

나중에 맹주가 되고 나서 말씀드려도 되는 일이다. 그게 여러모로 속도 편하고.

하지만 일부러 미리 말해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모님은 알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두 분에게 반대할 기회를 줘야 했으니까.

맹주가 되고 나서, ‘제가 무림맹주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 부모님은 황당함이나 경악을 넘어서, 굉장한 거리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잖아도 매번 놀라게 하는데 무림맹주가 되면 기쁨보단 충격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미리 말해주는 것이다.

짝!

어머니가 내 등짝을 사정없이 때렸다.

“이놈아! 정신 차려!”

“아앗! 아파요!”

그래, 이러시라고 그러는 거다.

“너, 이 어미 자꾸 놀라게 할 셈이냐?”

원래라면 ‘이 미친놈아, 무슨 헛소리냐!’라는 말이 나와야 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에게 이기어검술까지 보여준 상태다. 거기에 과거 총군사와 맹호단주가 수하로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여전히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내 말이 사실임을 모두들 알아차렸다.

송우경이 슬쩍 나섰다.

“우리 벽서방,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벽서방이란 호칭을 처음으로 듣는 순간이었다. 화린이와의 애정이 깊어진 지금, 저 벽서방이란 말이 기분 좋게 들렸다.

“네,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송우경도 부모란 이름을 지닌 분들이다. 놀람보단 걱정이 그들을 지배했다.

아버지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서 내게 물었다.

“너는 무림맹주가 어떤 자리인지 아느냐?”

그럼요, 아마 당대에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저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잘 알지 못합니다.”

“한데 어찌 맹주가 되려는 것이냐?”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섭니다.”

“의지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갈군사와 백대주를 믿고 있습니다.”

“음.”

아버지의 심경이 복잡해보였다. 아마 지금까지 내가 보여준 놀라운 모습은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다.

하지만 무림맹주는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전적으로 이해한다.

“적어도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무림맹주가 되는 과정에는 욕심이나 무리수는 없을 겁니다. 최대한 순리에 따르겠습니다.”

“단아.”

여전히 걱정스러운 아버지를 향해 내가 차분히 말했다.

“그러니 이 아들의 운명을 한번 지켜봐주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송우경이 경직된 분위기를 풀었다.

“장하네. 정말 장한 일이야.”

그가 아버지를 보고 말했다.

“그래, 자네가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나라도 그랬을 거네. 하나 자식걱정이란 것이 자식이 문밖에 나가는 순간부터 하는 것이지 않나? 어리면 어려서 걱정, 나이 들면 나이가 들어서 걱정. 이렇게 온갖 걱정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이런 걱정은 부모로서, 그리고 강호인으로서 큰 복이라 생각하네. 나는 정말 우리 단이가 장하다고 생각하네.”

송우경이 와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라고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딸을 생각하면 어찌 마음 졸이지 않겠는가? 그래도 우리 부모님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이 상황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주는 그가 정말 고맙다.

이윽고 아버지도 마음을 정하셨다. 이미 내가 뜻을 세운 이상, 걱정만 하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 믿으마. 부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잊지 않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도 말씀하셨다.

“좋다. 기왕 뜻을 세웠으면, 꼭 무림맹주가 되어라. 동네방네 자랑 좀 하고 다니게! 우리 아들, 할 수 있지?”

“네!”

“하하하.”

세 분이 함께 웃었다. 이 자리가 끝나면 걱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드시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웃고 계셨다.

그래, 이렇게 미리 말씀드린 것은 정말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삶이 바뀌는 원동력은 아주 큰 데 있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 * *

“무림맹 인사들의 감찰을 명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임시 맹주전으로 찾아온 사람은 노선생이었다.

그를 향한 마철군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그를 총군사의 자리에 앉혔지만, 제대로 그가 해낸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총군사라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다 막아내고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마철군은 알지 못했다.

지금의 마음은 궁지에 몰리자 지난 고마움은 모두 다 잊는, 전형적인 소인배의 마음이라는 것을.

사실 노선생은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를 위해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마음은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사찰을 멈춰주십시오.”

“놈들이 나를 맹주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하고 있소.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 편을 들다니?”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래선 안 됩니다. 그리고 저는 저들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흥! 나는 군사처럼 우유부단하게 굴지 않을 생각이오.”

“우유부단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원칙의 문제입니다.”

“원칙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마철군의 폭언에 노선생이 당황했다.

“맹주님?”

“이건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요. 그대는 옆에서 쫑알쫑알 몇 마디 던지면 그만이겠지만, 나는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문제란 말이오.”

쫑알쫑알이란 말에 노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평생을 모셔왔던 사람이기에 애써 좋은 어조로 말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이해합니다만…….”

“마음에도 없는 소린 그만 하시오! 군사께선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잠시 멍하게 있던 노선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변하셨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셨습니까?”

마철군이 코웃음을 쳤다.

“다들 그런 말을 하지요. 변했다는 둥, 어쨌다는 둥. 혹시 자신이 변했다는 생각은 안 드시오?”

그렇게 따지고 들자 노선생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모두 이 늙은이의 불찰입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그곳을 걸어 나왔다.

자신이 나오는데 누군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집법당주 가경이었다. 그의 방문이 무엇 때문인지를 짐작했기에 노선생은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곳을 나왔다.

가경이 들어오자 마철군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떻게 되었소?”

“맹주님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해온 자들 중 주동자들을 모두 긴급체포 했습니다.”

집법당주 가경의 보고에 마철군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하. 잘하셨소. 비겁한 것들! 군웅이란 이름 뒤에 숨어서 본 맹의 분열을 획책하는 자들이오.”

“이제 헛된 소문을 내는 자들은 없을 겁니다.”

“일벌백계, 엄중하게 처벌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맹의 상황이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엄격한 기준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아시겠소?”

“네.”

보고를 마친 집법당주가 그곳을 나갔다.

가경이 임시 맹주전을 나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갈사량이었다.

“그대가 어떻게 여길?”

가경은 과거 마봉기가 맹주를 지내던 시절 총군사였던 사마천을 배신하고 갈사량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오늘 갈사량이 불시에 방문한 것이다.

마치 맡겨둔 충성을 확인하는 순간이 되었다는 듯, 갈사량이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