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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세신화(1)
지하 밀실은 피냄새가 가득했다.
그곳에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방에 널린 시체들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천소선이 어떻게 이들을 죽였는지 대충 장면이 떠올랐다.
목이 잘린 암흑천병기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시체의 상태나 위치로 미루어 천소선이 꽤나 힘들게 싸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천란 하나가 박살 나 있었다. 천소선에게 듣기로는 천란을 새로 제작해서 두 개였다고 했는데?
한데 부서진 것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천란은 그곳에 없었다.
천소선이 천란을 가지고 갔다?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천소선 정도쯤 되는 고수라면 아무리 무거운 것도 손쉽게 옮길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게 찾아온 것도 이 천란을 차지하기 위한 수작이었단 말인가?
천소선의 절박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게 다 연기였다? 아니다. 그때는 분명 놈은 진심이었다. 게다가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천란이 두 개였다고 솔직히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먼지자국으로 천란이 있던 자리를 알 수 있었다. 분명 누군가 옮긴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내가 이곳에 내려와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천소선이 모두 다 파괴했다고 나를 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다시 만나면 놈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훌쩍 몸을 날려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멀리 물러나 있던 무인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호의가 담긴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마신부운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쉬이이이익.
순식간에 점이 되어 날아오른 내가 마신비행으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 * *
천왕군을 죽였다는 소식에 갈사량과 백표가 환호했다.
“오오! 정말 천왕군을 해치우신 겁니까?”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네.”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정말 기뻐했다. 단지 강적이 제거된 것 이상의 기쁨이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천왕군은 유일하게 나를 위협하는 무공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다시 말해 나의 생존확률이 비약적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백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내가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없네.”
정말이지 이렇게 멀쩡히 그를 이긴 것은 아주 큰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행운을 만들어 낸 것은 마검혈우를 선택한 내 판단력 때문이지만.
“대체 어떻게 없애신 겁니까?”
백표는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을 너무 아쉬워했다. 자기보다 실력이 좋은 이들의 싸움을 보는 것은 분명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확실했다.
하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백표는 마검혈우와 같은 무공은 사용할 수 없다. 마신결의 무공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무공수위가 한참 아래라면 상관이 없다.
크게 감탄하고 끝날 일이다.
하지만 백표처럼 천하제일을 논하는 실력이라면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으로 수련에 방해가 될 수 있다. 한계를 넘어서려 무리하려다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
대신 그 싸움의 핵심을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큰 공간에 위력을 미치는 초식을 한곳에 집중해서 없앴네.”
“아!”
백표가 내 말을 몇 번이나 그대로 따라하며 뜻을 되새겼다.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것 아닌 말인데, 백표는 크게 감사했다.
세상사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남들에게는 별것 아닌 말들이 백표쯤 되는 이에게는 무학의 큰 화두가 되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용해서 실력향상에 도움을 줄 테니까.
“오늘은 우리 셋이 한잔하세.”
“좋습니다.”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과 나눌 축하는 아니었다. 강적을 제거했다는 사실에 모두 기뻐하겠지만, 동시에 걱정도 할 것이다. 이렇게 축하주를 마셔야 할 정도의 적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니까.
두 사람과의 자리를 파하고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천마였다.
천기심환공으로 그를 만났다. 밤새 마실 만큼 술을 준비해서 경치 좋은 곳에서 그를 불러냈다.
[특별히 당신이 좋아하는 술로 준비했다.]
[후후. 기다린 보람이 있군.]
싸움이 있고 지금까지 천마는 조용히 있었다. 당연히 내가 이런 자리를 만들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나 사이에 생긴 믿음이다.
천마와 함께 술을 마셨다.
[마검혈우를 집중시킨 것은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다.]
[고맙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절박함에서 시작되었지.]
[절박함?]
[처음에는 마검혈우를 사용했다간 다른 무인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었지. 한데 나중에는 그 절박함이 다른 걱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냥 떠나면 놈은 화가 나서 그곳에 있는 무인들을 모두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더구나 지하 밀실까지 뚫린 상태니까.]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라면 충분히 그랬을 거다.]
[그래서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만들어 낸 승리였군.]
[그리 거창하게 포장할 것 까진 없고. 그냥 정파 꼰대의 노파심 정도라고 하지.]
[하하하.]
천마가 기분 좋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우린 힘차게 건배하고 술을 마셨다. 승리의 술은 꿀처럼 달았다.
[아, 그리고 묘한 경험을 했다.]
[어떤 경험이었지?]
[마신결이 나를 유혹했다. 싸우는 내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더군. 저놈을 죽여라, 내 무공을 익혔으면 당연히 죽일 수 있다. 죽이면 네 성취도 올라갈 거다.]
[그래서 마신결의 대성을 이뤘나?]
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대성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천왕군을 죽이기 전과 죽인 후는 차이가 있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신결에 대한 느낌이 달랐다.
대성을 이루기 위해 상당한 경험치를 쌓은 기분, 최소한 절반 이상은 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 그냥 그렇게 기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봐, 천광이.]
[왜 그러나?]
[자넬 만난 것은…….]
[닥쳐!]
순간 천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부끄러운 말을 면전에서 하려고. 닥치고 술이나 마셔!]
[이봐, 욕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잖아?]
[그럼 더 닥쳐야지!]
[하하하.]
술을 마시며 그와 무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생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봄비를 이야기했고 첫눈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눴다. 배신과 충성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우린 그냥 아무 화제나 생각이 나는 대로 떠들어댔다.
술이 취해서는 여자 이야기를 했다. 지나간 여자들에 대한 흉을 봤고,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술에 더 취했을 때 천마는 손자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우린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마셨다.
* * *
천소선과 사내는 마차에 타고 있었다.
마차 뒤에 천란을 싣고 두 사람은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천소선은 말없이 마차만 몰았다. 그는 충격에 빠져 있었다. 옆자리의 사내가 그렇게 될 것이라 말하긴 했지만,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정말 천왕군이 죽었소?”
“죽었네.”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 일이라면 반드시 소문이 날 테고, 사내는 금방 밝혀질 일을 거짓말하진 않을 것이다.
“우린 어디로 가는 것이오?”
“왜? 데려가서 잡아먹기라도 할까 불안하나?”
“나를 겁쟁이 취급하다간 후회할 날이 올 거요.”
“자네야말로 어설픈 협박을 했다가 후회하게 될 거네.”
“흥!”
천소선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젠장! 그러고 보니 돈도 두고 왔네.’
삼천만 냥을 자신의 숙소에 그냥 숨겨두고 온 것이다.
그때 사내가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불쑥 말했다.
“돈은 내가 챙겼으니 걱정 말게.”
천소선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고?”
사내가 천소선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젠 저쪽 일에 미련을 남기지 말게.”
미련을 남기지 말라고? 그럼 대체 무엇에 미련을 두고 살란 말인가?
“계속 북쪽으로 마차를 몰게.”
사내가 팔짱을 끼며 몸을 비스듬히 마부석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려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소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이라면 사내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놈을 죽이고, 다시 돌아가서 벽리단을 제거하면…… 내가 이 강호의 주인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살의가 뒤엉킨 욕망이 피어올랐다.
그때 사내가 불쑥 말했다.
“미련을 버리라고 했네.”
다시 한 번 마음을 읽힌 천소선이 버럭 화를 냈다.
“젠장! 빌어먹을! 당신도 그놈에게 죽어 버렸으면 좋겠군.”
그렇게 분통을 터뜨린 후 천소선이 마차를 세웠다.
눈을 감고 있던 사내가 눈을 떴다.
“모든 것을 다 말해주든지, 아니면 나를 죽이시오.”
물론 천소선은 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으로 봤을 때, 상대는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많이 알수록 져야 할 책임도 늘어나는 법이라네.”
“아무 것도 모르고 이용만 당하는 것보단 낫겠지.”
천소선을 응시하던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좋네, 다 말해주지. 갈 길이 바쁘니 마차부터 출발시키게.”
“진작 그럴 것이지!”
천소선이 내심 쾌재를 부르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달리는 마차에서 사내가 물었다.
“자, 궁금한 것이 무엇인가?”
“우선 어떻게 알았소? 천왕군이 죽을 것이라고.”
“벽리단 그놈이 워낙 강했으니까. 나는 둘 모두의 성격과 실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네.”
“벽리단? 놈의 이름이 벽리단이오?”
“자네나 천왕군이나, 백번 죽어도 마땅하지. 그 정도 강한 적을 상대하면서 정체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놈은 산동 벽씨검문의 후계자인 벽리단이네.”
“산동 벽씨검문 벽리단!”
“이젠 의미 없긴 하지만.”
“무슨 뜻이오?”
그러자 사내의 입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흘러나왔다.
“놈은 천하진이다.”
“뭐요?”
“현재 놈의 몸에 전대 맹주 천하진의 영혼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천소선은 경악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의도였는지 사내는 천소선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의 영혼이 들어가기 전, 난 벽리단을 이용해서 혈신강림(血神降臨)의 대업을 이루려고 했지.”
혈신강림이란 말에 천소선은 깜짝 놀랐다. 저 말이 허풍이 아니란 것을 안다. 이미 인간의 상식을 넘어선 인간과 무공을 목격하고 있었으니까.
“왜 벽리단이었소?”
“그의 신체가 삼백 년에 한 명 태어난다고 알려진 광세신화지체(曠世神化之體)이기 때문이네.”
“광세신화지체!”
“신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몸이지. 천신이든, 마신이든, 혈신이든. 그의 육체는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가장 훌륭한 도구라네.”
“맙소사!”
천소선은 정말 크게 놀랐다. 이런 내막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달리는 마차위에서 어마어마한 비밀은 계속 밝혀졌다.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였지.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혈신강림의 대법에 실패했다. 그 실패로 대법을 진행하던 나는 지난 몇 년간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큰 부상을 입었지.”
“왜 실패했던 것이오?”
“처음에는 뭔가 내가 잘못한 것인지 알았지. 하지만 이후에 알 수 있었네. 그 실패는 내 잘못이거나 실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유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사내는 화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자네 조부의 대법은 실패했어야 할 대법이었네.”
원래도 채 이 할이 되지 않는 성공확률이었다. 한데 놀랍게도 대법에 성공했고, 할아버지는 젊어진 모습으로 천란에서 나왔다.
“결과도 실패지 않소?”
그는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니까.
“그건 자네 입장이고, 저들은 성공이었지.”
“저들?”
“내가 대법에 실패하고 부상에서 회복하고 있는 틈을 타고 저들이 개입했지.”
“대체 저들이 누구요?”
“천왕군을 탄생시킨 놈, 암흑천병기를 만들라고 지시한 놈들이지.”
“당신이 아니었소?”
“나? 이런, 오해를 하고 있었군. 나는 저들과 한패가 아니네. 저들이 암흑대신(暗黑大神)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나는 혈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네.”
“암흑대신? 혈신?”
적어도 천왕군이 암흑대신을 따르는 자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검은 기운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했으니까.
“어떻게 지하에 있었던 것이오? 왜 암흑천병기가 당신을 지키고 있었던 거요?”
“암흑천병기는 내가 아니라 천란을 지켰던 것이지.”
“아, 그렇지. 당신은 천란 안에 있었지. 하면 어떻게 미리 천란에 들어가 있었소?”
“그 정도는 내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네.”
하긴 처음 본 순간부터 천소선은 그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주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라면 뭐든 가능할 것 같은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자, 더 물어볼 것이 있나?”
“끝으로 하나 남았소.”
“뭔가?”
“왜 나를 데려가는 것이오?”
“한 가지 정도는 궁금한 것이 있어야 여정이 흥미롭겠지? 우리는 꽤 먼 길을 가야한다네.”
사내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정말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은 천란을 싣고 그렇게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