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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난투(2)
안가와 섬에 들러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었다.
벽리단의 사정을 알게 된 후, 두 분에 대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이제 진정으로 ‘두 사람’이 아니라 ‘두 분’이 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벽리단의 몸에 들어온 이후 내게 효도는 이런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이왕지사 벽리단의 몸에 들어왔으니 잘 모셔야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분들이었기에 더 빨리 정이 들었고.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달라졌다.
이전에도 진심이었지만 지금은 진심 중에서도 진심이었다. 제대로 두 사람의 자식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마지막 순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던 벽리단의 영혼을 잊어버리지 않는 한, 어찌 두 분에게 소홀할 수 있겠는가?
단아, 걱정하지 마라. 두 분은 내가 평생 잘 모시마. 언젠가 때가 되면 너도 두 분을 만나게 되겠지. 그때 모든 사정을 말씀드리고, 못 다한 효도를 하도록 해라.
아마 그때가 되면 두 분 역시 내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하시는 말씀이지만, 들을 때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듣게 되는 아버지의 말씀.
“위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아랫사람을 더욱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
“아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뒤는 어머니의 변함없는 당부셨다.
두 분을 만난 후에 송화린을 만났다.
그녀에 대한 마음 역시 이전과는 달라졌다. 더 좋아졌다.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고, 벽리단과 함께 있던 순수한 모습도 좋았다. 벽리단을 죽인 것이 그녀가 아니란 것이 밝혀져서 더 좋았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을 벽리단이 안다면 어떤 기분일까?
좋아할까? 싫어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난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벽리단이 그녀를 좋아했던 마음까지 보태서, 더 그녀를 사랑하는 일이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응? 그런 눈이라니?”
“평소와 달라서.”
여자들의 감이란 정말이지 무섭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냥 봤는데도,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을 딱 알아차린다. 굳이 비교하자면 적을 상대하는 내 본능과 비슷하다.
“그냥 좋아서.”
“싱겁긴.”
“오랜만에 보니까 좋네.”
송화린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섬 밖으로 놀러 나가자.”
“그래도 돼?”
내 제안에 그녀가 깜짝 놀랐다.
“돼.”
환하게 웃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소저와 임부인도 데리고 나가도 될까? 두 사람도 많이 답답할 텐데.”
“좋지.”
그녀가 가서 백련과 임연정을 불러왔다. 나와 함께 섬 밖으로 나간다는 말에 두 사람은 한껏 들떴다.
그녀들을 데리고 섬을 나갔다.
좋은 경치도 하루 이틀이지, 반복되는 섬의 일상은 지루하고 적막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북적대는 저잣거리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맛있는 요리도 사 먹고, 그녀들이 필요한 물건들도 샀다. 옷을 비롯해서 화장도구며, 그릇이며, 책이며. 섬으로 제공되는 물품들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직접 골라야 하는 것들을 샀다.
다소 어색할 줄 알았던 세 여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아! 그 옷 너무 예뻐요!”
송화린과 백련의 칭찬에 임연정이 뿌듯하게 웃으며 자랑했다.
“저도 소싯적에는 잘나갔답니다.”
“지금도 아름다워요.”
“송소저가 그런 말 하면 그건 욕이 돼요.”
“아뇨, 전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 제가 뭐라고 그런 말씀을.”
당황해하는 송화린을 보며 임연정과 백련이 함께 웃었다.
오랜만에 그녀들이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우리 이렇게 막 놀아도 되나?”
송화린의 걱정에 내가 대답했다.
“돼. 마음껏 놀아.”
“누가 미행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건 힘들 거야.”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그녀들을 데리고 저녁때까지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배를 타지 않았다.
“자, 다들 놀라지 마시오.”
세 여인이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
정말 높이 날아올랐다. 그녀들을 모두 기운으로 감싼 후, 마신부운으로 함께 날아오른 것이다.
세 여인은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높은 하늘에서 송화린을 보며 말했다.
“미행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세 여인이 동시에 나를 보며 감탄했다. 그녀들의 상식에서는, 아무리 고수라도 혼자서 이곳까지 날아오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다른 사람 셋을, 그것도 손도 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기운으로 감싸서 함께 떠오르는 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녀들의 놀람은 지금부터였다.
쉬이이이이익.
넷이서 나란히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서서 하늘을 날아본 적이 없었던 그녀들이었다.
처음에는 놀라 비명을 지르던 그녀들이 조금 지나니 기분 좋은 고함을 질렀다.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노을을 배경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일은 평생 한 번도 하지 못할 경험이란 것을 잘 알았기에, 그녀들은 너무 감격했다.
“아아아아아아악!”
“너무 신나!”
“더 빨리!”
세 여인의 계속된 고함에 참다못한 천마가 불평을 터뜨렸다.
[여자 셋이 모이니 시끄러워 죽겠다.]
[처음이니까 참아줘.]
[처음이라서 저럴까? 다음에는 더 시끄러울걸? 그땐 더 친해져 있을 테니까.]
[하하하.]
나는 그녀들을 이해했다.
각자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쌓인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늘을 날고 고함을 지르면서 그 감정의 앙금들을 조금이라도 털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쉬이이이이익.
저 아래로 섬이 보였다. 더 날고 싶다는 임연정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섬으로 내려갔다.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회복한 후,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했으니까.
* * *
자정 무렵, 나는 맹주전 상공에 높이 떠 있었다.
천소선이 두 가지 난관을 말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기관의 암어를 모르는 것과 항상 천왕군이 맹주전에 있다는 것.
난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맹주전에 천왕군 혼자 있다는 말에 떠오른 계획이었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아주 과격한,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될 방법이었다.
스르릉.
수라명왕검이 경쾌하게 뽑혀 나와 하늘에서 지면으로 예리한 각을 만들어내며 맹주전을 겨눴다.
목표가 정해지자 수라명왕검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슷.
수라명왕검 모양을 한 검기가 주위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덟 개의 검기로 만들어진 검이 진짜 수라명왕검을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검기들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속도가 빨라졌다.
휙휙휙휙휙휙.
이전과는 회전하는 속도가 완전히 달랐다. 그야말로 검기로 만들어진 검을 쏟아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공 십일 갑자, 마신결 구 성.
이전과는 위력이 완전히 달라진 마신결 제일초식 환검천폭이 발출되었다.
슉!
날아간 첫 번째 검기의 검이 맹주전 지붕에 부딪치는 순간!
꽝!
굉음과 함께 검기의 검이 폭발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위력이었다. 이 한 방에 맹주전 지붕이 통째로 다 날아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이제 공격은 시작이었다.
슉! 슉! 슉! 슉!
검기의 검이 회전하면서 발출되기 시작했다. 연속해서 날아간 검기의 검이 연속해서 폭발했다.
꽝! 꽝! 꽈아아앙! 꽈아앙!
맹주전이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있었다.
한 방, 한 방이 엄청난 위력이었다. 터진 곳에 또 터졌고, 그 위에 다시 검기의 폭격이 이어졌다.
슉! 슉! 슉! 슉! 슉! 슉!
날아가는 속도도 엄청났고 당연히 검기가 만들어지는 속도도 그와 보조를 맞추었다.
한마디로 난사(亂射)였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방법 같아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기관이 있는 쪽에 집중적으로 검기의 검이 쏟아졌던 것이다. 그 위치가 맹주전의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만 가능한 작전이었다.
기관은 공격형 기관이 아니었다. 맹주전에서 지하밀실로 이동시켜주는 기관으로 정확한 번호를 넣지 못하면 작동하지 않았다.
물론 공격형이 아니더라도 그냥 대충 공격해서는 부서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확실히 부수면 부서질 것이다.
슉! 슉! 슉!
꽝! 꽈앙! 꽝!
그렇게 한바탕 검기의 폭격이 끝났다.
맹주전이 있던 그곳에 흙먼지가 엄청나게 피어올랐다. 바닥 곳곳에 구멍이 뻥 뚫렸고 부서진 기둥조차 남지 않았다.
스르릉, 철컥.
수라명왕검이 검집으로 회수되었다.
나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이 정도에 천왕군이 죽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
과연 저 아래에서 피어오르던 흙먼지에 변화가 생겼다.
후우우웅.
한 지점을 중심으로 먼지가 회오리치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원의 중심에 한 사내가 서서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먼 거리였지만, 나는 그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그는 바로 천왕군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검기의 공격에도 그는 멀쩡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의 호신강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어이, 너. 이리 올라와.”
속삭이듯 말했지만 내 말은 저 아래 천왕군의 귓속에 직격으로 날아가 전해졌다.
천왕군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다 싶더니.
파앗.
놈은 그대로 솟구쳐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천왕군이 내 앞까지 도착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경공이었다.
우린 허공에 떠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저 아래 무림맹 주위로 무림맹 무인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와 천왕군은 너무 높이 있었다. 경공으로 날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인가를 쏴서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한 높이였다.
하긴 어떻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천왕군을 돕고 싶은 생각도 없겠지만.
천왕군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로구나.”
“그래, 나다.”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의 진면목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둘 모두 젊은 모습이었다.
예전에 내가 인피면구를 쓴 것을 꿰뚫어본 그였다. 이번에도 역시 지금 이 모습이 나의 본모습임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이렇게 젊은데 어떻게?”
천왕군은 내 강함에 대한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너도 마찬가지로 젊잖아?”
“나야…….”
뭐라 말을 하려던 천왕군이 입을 다물었다. 굳이 대법이나 천란에 대해 말해주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그래, 너도 기연을 얻은 것이로군.”
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넌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있었지.
그와의 대화는 대환영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그와 끝장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주목적은 맹주전 지하에 있는 천란을 부수는 것이다. 지금쯤이면 천소선이 지하에 잠입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딱 일 각만 버티다가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가 맹주전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를 끝까지 추적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변수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만약 놈과 싸우다가 반드시 죽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면, 오늘 놈을 없애버릴 것이다.
어떤 결과가 될지는 싸워봐야 알 것이다.
“자, 해볼까?”
“좋지.”
그렇게 그와 나의 첫 싸움이 시작되었다. 선공을 한 쪽은 천왕군이었다. 놈이 주먹을 날렸다. 엄청난 위력과 그에 어울리는 속도로 날아드는 주먹.
부우웅!
나 역시 검을 뽑지 않고 선학비술로 천왕군을 상대했다.
놈의 공격을 피하며 나도 주먹을 날렸다.
나도 빨랐지만 놈도 빨랐다. 놈 역시 내 주먹을 피한 것이다.
부웅! 붕! 부우웅!
빠르고 묵직한 주먹이 정신없이 오갔다. 그냥 봐선 여타의 권법고수들의 싸움과 다를 바 없어 보이겠지만, 어찌 이것이 보통의 싸움이겠는가? 주먹 한 방, 한 방에 실린 힘이 만년한철도 구겨져버릴 위력이 담겨 있었는데.
긴박감을 느끼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그만큼 천왕군의 공격이 빨랐던 것이다. 천왕군 역시 마찬가지로 간신히 내 공격을 피했다.
놈과 나는 거의 박빙의 실력을 주고받았다. 천왕군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강했다.
나쁘지 않다. 난 아직 마신결을 사용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긴장된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게 어떤 느낌인가 하면, 무공이 강한 사람을 상대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어떤 무공 체계, 혹은 무공 그 자체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완성된 무공을 상대하는 느낌.
완벽한 어떤 것을 상대하는 기분.
그렇다면 놈은 어떨까?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의 싸움은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강물이 서로 굽이치고, 반대편에서 불어온 서로 다른 바람이 부닥치며 또 다른 바람을 만들어내는 대자연의 뒤엉킴이었다.
강공으로 치고받았으며, 효율적으로 충격을 흡수하기도 했고, 공격을 흘려보냈고,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기습을 날리기도 했다.
만약 권법을 배우는 이들이 본다면 천고의 기연이 될 것이다. 그들이 가야 할 종착지가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싸움이었으니까.
나는 새삼 궁금했다.
대체 천란은 누가 만든 것일까? 어떻게 이런 대단한 놈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오늘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천소선에게 천란을 부술 기회를 주는 것과, 놈을 죽일 수 있으면 죽이는 것.
거기에 한 가지가 더해졌다.
놈의 무공을 좀 더 경험해보고 싶었다. 죽이겠다가 아니라, 이 무공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었다. 쓸데없는 무인의 허영 같은 것이 아니다.
마신결의 대성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이 싸움이 필요하겠다는 본능적인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그렇다면 무대가 좀 더 그럴듯해야겠지?
쉬이이이익.
마신부운으로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설마 여기까지?’라고 여긴 지점까지 놈은 뒤따라 올라왔다.
우린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징.
오랜만에 수라명왕검이 울었다.
동시에 천왕군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