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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비화(5)
들어선 사람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바로 오래전에 내가 직접 죽였던 바로 현현교주였다.
“왔나?”
사내의 물음에 현현교주가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놀랍게도 현현교주는 바로 사내의 수하였다.
현현교주의 배후에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갈사량의 추측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무림맹 놈들에게 꼬리를 밟혔다고?”
“정의각의 끈질긴 추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갈사량 그놈, 쉽지 않은 놈이지.”
“이번에 천하진이 직접 내려왔습니다. 놈이 나선 이상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현현교주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품에서 작은 약병을 하나 건넸다. 안에는 피보다도 더 붉은 액체가 들어있었다.
“다행히 내려주신 임무는 완수했습니다. 신도들의 피로 만든 천혈악종(千血惡種)입니다.”
“드디어 완성했구나. 고생했다.”
사내가 현현교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현현교주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모습 하나만 봐도, 이 사내가 얼마나 제대로 수하들을 휘어잡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언제 시행하실 작정이십니까?”
사내의 시선이 잠들어 있는 벽리단을 향했다.
“이 아이의 천성이 워낙 바르고 선해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몇 년 정도 옆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고 판단된다.”
“그 정도입니까?”
“선택받은 아이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내가 다시 탄식했다. 놈이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지 몰라도, 벽리단은 몇 년이나 걸려 타락시켜야 할 정도로 천성이 곧은 아이였던 것이다.
벽리단에게 미안했다.
내가 이끌던 강호에서 이런 험한 꼴을 당하게 해서. 이런 놈들이 설쳐대게 해서 정말 미안하구나.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곧 천하진이 본단으로 쳐들어올 겁니다. 제가 죽어야 뒤탈이 없을 겁니다.”
“내 그대를 잊지 않겠다.”
“바라옵건대 대업을 이루시기를. 더 모시지 못한 죄,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현현교주가 큰절을 올리고는 방을 떠났다.
저놈이 죽기 전에 마지막에 남긴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놈의 하수인만 제거했던 것이다.
현현교주는 목숨을 바친 충성심을 발휘했지만, 그가 나가기가 무섭게 사내의 표정이 무덤덤해졌다.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표정.
창문으로 흘러들어온 달빛이 약병을 바라보는 그의 미소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그 너머에서 벽리단은 애처롭게 잠들어 있었다.
쪼로롱, 쪼로로로롱.
침상에서 눈을 떴다.
나는 아주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현현교는 천혈악종이란 약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사교였다. 실종된 사람들은 저 약을 제조하기 위해 모두 희생당했을 것이다. 천혈이란 이름으로 미뤄볼 때, 천 명의 희생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천마가 입을 열었다.
[본교가 없으니 저런 이상한 것들이 설쳐대는군.]
[그래, 차라리 당신네들을 남겨둘 것을 그랬어.]
[화내지 마라. 그럴 가치도 없는 자들이다.]
[아니, 화내야지. 그럴 가치도 없는 것들이 정말 가치 있는 것들을 망가뜨리고 있는데, 불같이 화를 내야지. 나중에 이 새끼들 어떻게 죽이는지 똑똑히 봐라.]
[무섭군.]
[알잖아? 나 무서운 사람인 것.]
[그래, 나는 좀 알지.]
그 약병에 담긴 천혈악종이란 것이 무엇에 사용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것은 벽리단에게 사용될 것이고, 우리 모두의 운명을 바꿔버릴 것이다.
* * *
그날 밤, 나는 다시 몽련비술로 벽리단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잠에서 깼을 때,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술상이 뒤집어져 있었고 벽리단이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어딨어? 애월이 불러오라고!”
앞에선 기녀가 말했다.
“애월이는 떠났어요.”
“떠났다고? 어딜?”
“어제 새벽에 떠났어요. 이 생활은 지긋지긋하다면서. 모르셨어요? 벽공자에게는 인사를 드리고 간 줄 알았더니?”
“이 미친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그년에게 들인 돈이 얼마인데? 데려와! 당장 데려오라고!”
짝!
벽리단이 달려들어서 기녀의 뺨을 때렸다.
“왜 안 가? 너도 나 무시하지? 기녀주제에 나를 무시해? 망할 년! 너부터 죽어!”
짝! 짝!
그때 기녀들을 관리하는 중년 여인과 기루에 고용된 칼잡이 사내들이 뛰어 들어왔다.
“벽공자님, 왜 이러세요! 참으세요!”
사내들이 달려들어서 말렸다. 귀한 손님이니 차마 벽리단에게 손찌검을 할 수는 없었고, 함께 쓰러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 개 같은 놈들이! 이 새끼들아! 다 덤벼!”
둘도 없을 파락호처럼 굴고 있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욕설도, 패악질도 어색했다. 물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였기에 그 미세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겠지만.
그리고 흘러나온 마지막 한마디.
“……너희들만 아니었어도.”
벽리단이 그날의 일을 후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 * *
다음 꿈에서는 낯선 실험실에서 깨어났다.
사내와 벽리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벽리단은 지난 꿈에서보다 나이가 더 든 모습이었다. 이제 몇 년의 세월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의 몸에 들어왔을 무렵으로 보였다.
사내는 살짝 들떠 있었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드디어 놈이 기다렸던 때가 되었음을. 이 순간을 위해서 몇 년을 두고 벽리단을 망쳐왔다.
모든 운명에는 박차가 있는 법, 이제 그 운명에 박차가 가해지는 순간이 된 것이다.
벽리단이 건들거리며 내부를 살폈다.
방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이 많았다. 악귀들을 연상시키는 여러 조각들, 비슷한 느낌의 그림들. 사방에는 이상야릇한 향이 피워져 있었고, 알아볼 수 없는 문자와 숫자들이 적혀 있는 물건들도 여러 개 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벽리단의 물음에 사내가 대답했다.
“내 연구실이라네.”
“무슨 연구를 하시기에?”
“내 꿈을 이루기 위한 연구지.”
“강호의 주인이 되겠다는, 그 꿈 말씀입니까?”
“맞네, 바로 그 꿈이지.”
“이룰 수 없는 꿈을 아직도 꾸시는군요.”
“그보단 희망을 꾼다고 말해주게. 뭐, 그러다 운이 좋으면 이뤄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벽리단이 의아한 눈빛으로 힐끗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몇 년을 만나면서 사내는 단 한 번도 희망이란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긴, 그렇다고 매번 함께 어울렸던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 사내와 만났다. 광두조차 사내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뭔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내는 나타났다. 새롭게 살겠다고 반성을 하면 나타나서 원점으로 되돌리곤 했다.
“며칠 후에 정혼자가 돌아온다면서?”
사내의 물음에 벽리단이 흠칫했다. 이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더군요.”
“오! 이제 우리 아우님이 진짜 남자가 되었군.”
괜히 앞에 놓인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벽리단의 등을 보며 사내가 말했다.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몇 년이나 있다 왔지? 이런 말하기 미안하지만…… 포기하게.”
그때 나는 볼 수 있었다. 벽리단의 표정을.
분노와 서글픔이 뒤섞여 있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송화린이 돌아오고 있는데, 이런 대화나 나누고 있다는 자책감이 든 것이다.
그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지금 이 순간, 벽리단은 송화린이 떠나던 그날의 계곡에서의 이별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순수했던 순간을.
그때 사내가 품에서 천혈악종이 든 약병을 꺼냈다.
“이게 뭔지 아나?”
벽리단이 힐끗 돌아보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뭡니까? 핍니까?”
“피가 아니라 씨라네.”
“씨?”
“그래, 악의 씨지. 사람의 마음에 심어두면 점점 자라나서 열매를 맺게 되지.”
“열매에서는 무엇이 열리는데요?”
“세상을 피로 덮을 혈신(血神)이 태어날 것이네.”
“하하하.”
벽리단이 크게 웃었다. 당연히 사내의 말을 장난이라 여기고 있었다.
“멋진데요? 그런 혈신이라면?”
사내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한번 마셔볼 텐가?”
“하하하. 이거 한 모금에 신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마시지요.”
벽리단이 병을 받아서 망설이지 않고 꿀꺽꿀꺽 마셨다. 지난 몇 년간 함께 어울렸기에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씨가 심어졌네.”
“자, 이제 열매는 언제 열립니까? 하하하.”
사내가 지난 고생에 보답을 얻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곧.”
* * *
다음 날 밤, 몽련비술의 구결을 외우며 나는 예감했다. 이 꿈이 마지막 꿈이 될 것임을.
깨어난 곳은 송가장 근처였다.
내가 깨어난 곳에서 멀지 않은 길가에서 벽리단과 광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도련님! 그렇잖아도 요즘 부쩍 기억력이 없으시고 심한 고뿔에 걸린 것처럼 몸이 붕 떠다니는 느낌이 든다고 하셨잖습니까? 한데 왜 이리 술을 많이 드셨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벽리단은 내가 죽기 전의 현상을 똑같이 겪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내 죽음의 원인은 바로 꿈속의 사내 놈 때문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나는 천혈악종을 마시지 않았는데? 대체 왜?
“기분이 좋아 좀 마셨다. 우리 정혼자께서 산동제일미가 되어 돌아오셨는데, 축하주 한잔해야지. 자, 가자.”
“도련님! 가시더라도 술 깨고 내일 가시지요.”
“일 없다. 내 여자 내가 보겠다는데 왜 막아? 저리 비켜!”
벽리단이 광두를 밀어내고 송가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후 일은 그날의 일 그대로였다.
송화린이 나오고, 벽리단은 난동을 피우고.
“흥! 그 반반한 얼굴이 천년만년 갈 것 같지? 너도 늙으면 쭈글쭈글해질 것이라고. 그러니까 잘난 척하지 마라.”
“그만 돌아가!”
“싫다. 이대론 못 가.”
벽리단이 그녀를 억지로 안으려다 송화린에게 밀려 뒤로 자빠졌다.
“그만 가라고! 술 깨고 다시 와!”
“밀어? 지금 날 밀었어?”
벽리단이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저기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날 보내려는 거지?”
“헛소리! 날 대체 뭐로 보고?”
“그깟 무공 좀 배워왔다고 날 무시해? 넌 내 거야, 배속에서부터 내 것이라고!”
“웃기지 마. 난 네 것이 아니야!”
“딴 놈이라도 생겼어? 그래? 이 썅…….”
퍽! 퍽!
송화린의 주먹이 연속해서 날아갔고 술에 취한 벽리단은 중심을 잃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나는 보았다. 이때만 해도 벽리단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저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바로 그때였다.
화아악!
벽리단의 심장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한지에 먹물이 번져나가듯, 심장을 중심으로 붉은빛이 온몸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현상이었다.
벽리단의 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붉어지자, 그의 몸에서 무엇인가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하얀빛이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벽리단의 영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제로 떠밀려서 나온 것이다.
그가 죽은 것은 송화린이 때려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벽리단에게 먹인 천혈악종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하얀빛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빛은 정확히 벽리단의 심장에 적중했다. 심장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그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붉은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은 밀려나지 않으려고 저항했지만, 하얀빛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붉은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벽리단은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이 바로 내 영혼이 벽리단의 몸에 깃드는 순간임을.
벽리단의 영혼은 허공에 떠서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떠나기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처럼,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영혼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이게 진실이라고.
지난 몇 년간 망나니짓을 했던 그 벽리단의 영혼이 아니었다. 원래의 순수하고 착했던 바로 그 벽리단의 영혼이었다.
내가 영혼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영혼이 환한 빛을 내더니 그제야 하늘로 올라갔다.
다행히 지하가 아니라 하늘로 올라갔다. 그의 천성이 선하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이 그가 원치 않았던 음모에 희생당한 것임을 하늘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으로 광두가 달려오고, 벽리단을 업고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날의 일을 모두 지켜보았지만 나는 알 수 없었다.
왜 내가 이 몸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
하늘의 뜻인지, 아니면 이 계획에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오늘의 음모를 꾸몄던 그 사내는 현재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앞으로 내가 알아내고 풀어야 할 일이었다.
짐작하건대 이제부터 몽련비술의 꿈은 벽리단의 꿈이 아니라 내 꿈속이 될 것이다.
쪼로롱,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단아, 편히 안식하여라. 내가 다 밝혀내고, 반드시 복수해주마. 너의 이름으로.
그렇게 난 벽리단의 마지막 꿈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