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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비화(4)
기억이 난다는 갈사량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꽤 오래전 일인데 어떻게 기억을 하나?”
“혹시 현현교(玄玄敎)를 기억하십니까?”
“현현교? 아! 기억하네. 한때 영생불사(永生不死)를 내세워 혹세무민했던 사교집단 아닌가?”
“맞습니다. 바로 그들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가 그 무렵이었군.”
이제야 기억이 났다. 당시 현현교가 하북 일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현현교도가 된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바쳤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기도 했다.
“내가 곡부에 간 이유도 그 때문이었군.”
“네, 당시 정의각에서 그들의 본거지가 하북이 아닌 산동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었지요.”
“이제 확실히 기억나네. 내 손으로 다 쓸어버리겠다고 내려갔었지.”
“맞습니다. 실제로도 맹주님께서 그들의 수뇌부와 중요 인사들을 모두 제거했었지요. 현현교는 그때 궤멸했었고요.”
“큰 사건이었는데, 내가 기억을 못 했군.”
“당시 여러 사건들이 많았으니 기억 못 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가 곧바로 기억해 낸 것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입니다.”
“그게 뭔가?”
“맹주님께서 놈들을 모두 제거한 후, 그들의 자료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었습니다.”
“이상한 점?”
“네. 현현교주 배후에 누군가 존재하고 있다는 징후였었지요.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몇 가지 나왔는데, 정확한 증거가 나오진 않아서 보고드리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치밀한 성격의 갈사량이 그대로 넘어가진 않았다.
“이후 제가 따로 정의각을 통해 그 일을 조사했지만 결국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현재까지도 현현교와 관련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이상하게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질문에 산동행의 목적을 기억해낸 이유였다.
반면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현현교.
문득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내 검에 맞아 죽기 직전 현현교주가 이렇게 말했다.
“천하진! 넌 아무것도 모른다.”
영생을 꿈꾸던 사교 교주의 마지막 말 따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갈사량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것처럼 느껴진다.
정말 우리가 뭔가를 놓친 것일까? 혹시 꿈속의 그놈이 현현교와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한데 갑자기 그 일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난 갈사량에게 몽련비술과 관련한 일들을 모두 알려주었다. 내가 벽리단의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감추지 않았다. 총군사에게는 언제나 진실을, 내 지론이기도 하다.
내 말을 듣고 난 갈사량은 크게 놀랐다. 꿈에서 수련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랐지만, 알고 보니 그 꿈이 벽리단의 꿈이었단 사실은 놀람을 넘어 충격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현현교와 관련해서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과연 벽리단과도 관계가 있는 것일까?
* * *
약속시간에 객잔으로 나갔다.
천소선은 어제 그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죽립을 눌러 써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일찍 왔군.”
“한잔해.”
내가 앞에 앉자 그녀가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달라진 만큼 어제와는 서로를 대하는 태도나 분위기가 달랐다.
“여자가 된다는 것 상상해 본 적 있나?”
“아니.”
“그럼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차라리 처음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어. 천형이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 하루 종일 동경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했으니까. 보다시피 꽤 아름다운 얼굴이기도 했고. 하지만 정작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여인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였지.”
그녀가 살짝 죽립을 들었다. 괴롭다는 말을 하면서 그녀는 미인계를 쓰고 있었다. 정말이지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미모였다.
하지만 내게 송화린이란 절세의 미인이 있는 한, 통하기 어려운 시도였다.
내 담담한 표정에서 실패를 직감한 그녀의 얼굴에 살짝 실망감이 스쳤다.
그녀가 술잔을 비웠고, 이번에는 내가 잔을 채워주었다.
“밤새 그냥 어디론가 달아나버릴까도 고민했었지. 깊은 산속에서 약초나 캐며 살아갈까.”
“왜 그러지 않았지?”
“죽는 것보다 더 불행해질 것 같더군. 그렇다고 산속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풀이나 뜯으며 목숨을 연명하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랬을 거다.”
“당신 말대로 내가 노력하면 살 수 있을까?”
“글쎄.”
천소선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거절할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좋아, 당신과 손을 잡지. 함께 놈을 죽이자.”
“잘 생각했다.”
“내게 무엇을 원하지?”
“우선 궁금한 것이 있다. 왜 그렇게 막대한 돈이 필요하지? 맹주전 지하에서 벌이는 일 때문인가?”
“역시 그것까지 알고 있었군.”
질문에 대답을 하는 순간, 그녀는 확실하게 천왕군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천란이라고 들어봤나?”
“천란? 처음 듣는 말이다.”
“이번 대법을 성공시킨 장치지. 그는 천란을 통해 암흑천병기란 것을 대량생산하려고 해.”
“암흑천병기?”
“무인을 천란에 넣고 천왕군이 검은 기운을 불어넣으면 암흑천병기로 탄생하게 돼. 절대적인 충성심에 기존의 무공이 더욱 강력해지고 이성과 기억까지 남아 있다. 게다가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강력한 재생능력을 지니고 있는 병기지.”
“왜 그것들을 만드는 거지? 굳이 그런 것이 아니라도 놈은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
“나도 몰라. 당신이 두려워서거나, 아님 강호를 멸망시켜버리기라도 하려나 보지.”
농담처럼 말한 저 강호멸망이란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돌아가는 상황은 예측불가였으니까.
“난 당장 돈이 필요해.”
그녀의 말에 내가 흔쾌히 대답했다.
“돈은 내가 마련해주지.”
“정말?”
“대신 나를 천란이 있는 지하에 데려다 줘.”
“그건 불가능해.”
“방법을 찾아! 그럼 생(生)으로 한 걸음 걸어가게 되는 것이니까.”
그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숨이 걸린 이상, 그녀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 * *
쪼로롱, 쪼로로롱.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깨어난 곳은 또다시 새로운 곳이었다.
고요하고 아득한 그곳은 등잔의 붉은빛이 희미하게 주위를 밝히는 복도 한가운데였다.
여인의 분향과 술향에 이곳이 기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복도 양쪽 벽은 화려한 그림들이 가득했다.
바로 그때 눈앞의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뛰어나왔다. 하얗게 질린 그는 벽리단이었다.
그가 나를 지나쳐 옆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찌나 급했는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그냥 뛰어 들어갔다.
나는 벽리단이 튀어나온 방으로 들어갔다.
침상에 벌거벗은 여인이 누워 있었는데, 이미 죽어 있었다. 멍 자국으로 볼 때, 목이 졸려 죽은 것 같았다.
곧이어 그곳으로 벽리단과 사내가 들어왔다.
사내가 침상 위의 여인을 살펴보더니 놀라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목이 말라 깨보니 옆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자네가 죽인 것 아닌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벽리단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전 아무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놀았던 기억은 나는데…… 하지만 이 여인과 이 방에 들어온 기억조차 없습니다.”
명문가의 자제로, 그것도 정혼자가 있는 상황에서 기루에서 기녀와 밤을 보낸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될 일이었다. 한데 그 기녀가 죽었으니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기억이 없는 것이 문제지.”
“네?”
그 한마디 의미심장한 말에 벽리단이 사색이 되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죽인 것이면 어쩌지, 두려움이 밀려든 것이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저 사내놈의 수작이었음을. 벽리단을 완전히 옭아매려는 것이다.
벽리단은 처음 온 기루가 신기했을 것이다. 옆에서 예쁜 기녀가 분향을 풍기며 술을 따라주고, 한 잔 두 잔 계속 술을 마셨을 테고. 그러다 인사불성이 돼버렸을 것이다.
“전…… 아닙니다!”
“아우님을 믿겠네. 이대로 옷을 입고 이곳을 빠져나가게. 뒷일은 내게 맡기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고 서 있는 그를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어서 가게.”
누군가 온다는 말에 벽리단이 황급히 옷을 입었다.
나가기 전에 벽리단이 사내를 쳐다보았다.
“걱정 말고 어서 가게. 저녁에 그 객잔에서 다시 만나세.”
“네.”
벽리단이 달려 나갔다.
과연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침상에 벌러덩 누웠다. 옆에 여인의 시체가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워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서서 가만히 놈을 내려다보았다.
* * *
그날 저녁 사내와 벽리단이 다시 객잔에서 만났다.
벽리단은 마치 죄인처럼 완전히 경직되고 긴장하고 있었다.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이 시간까지 온갖 불안한 생각으로 힘들어했다.
“자, 한 잔 마시게.”
사내가 벽리단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벽리단이 단숨에 술을 마셨다. 혼자서라도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 못했다. 무서워서 아무 곳도 나가지 못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이곳에 온 것이다.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은밀히 처리했네. 기루의 주인장에게는 꽤 큰돈을 쥐어주었지.”
“저는…….”
아무 죄가 없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죄책감이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가 벽리단의 약점을 쿡쿡 찔렀다.
“부모님이 알게 될까 두려운가? 혼인을 약속한 그녀가 알게 될까 두려운가?”
벽리단의 눈동자가 떨렸다.
“걱정 말게. 비밀은 반드시 지켜줄 테니까. 이 우형을 믿으시게.”
“감사합니다.”
“자, 일어나게.”
“어딜 가시려고요?”
“다른 기루에 갈 생각이네.”
“네?”
벽리단이 깜짝 놀랐다.
사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이번 일을 이대로 넘긴다면, 이 사건은 자네에게 평생의 상처로 남을 것이네.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지도 모르지. 치유할 방법은 오직 하나라네. 가서 신나게 놀고 그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지.”
벽리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벽리단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객잔 입구에서 사내가 다시 돌아보았다.
결국 끌려가듯 벽리단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이미 제대로 약점을 잡힌 이상 사내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마음은 이미 차가운 분노가 지배하고 있었다.
벽리단은 결국 될 대로 되란 심정이 될 것이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운 법이다. 자포자기가 현실도피와 손을 잡으면 사람이 얼마나 쉽게 망가지는지 잘 알았으니까.
나는 궁금했다.
저놈은 왜 벽리단을 이렇게 망가뜨리려는 것일까?
늦은 밤, 나는 술에 취해 잠든 벽리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벽리단의 눈가에 눈물이 얼룩져 있었다. 진탕 마시고 놀다가 결국 잠들기 전에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함께 있겠다는 기녀를 쫓아냈다. 사내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눈치를 보았다.
앳된 벽리단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벽리단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말해주고 싶었다. 강호가 젊은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강자가 약자를 다루는 방식에, 악인이 선인을 다루는 방식에…… 당하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반드시 이겨내라고.
꿈이 뒤의 일들을 어디까지 보여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후로 벽리단은 점점 타락해져 간다는 점이다.
이 일을 잊기 위해서 점차 유흥에 빠져들 것이며, 자신의 행동에 괴로워하며 점점 난폭해질 것이다. 다시 그것을 자책하며 유흥에 빠지고.
그것들이 반복되어서 망나니 벽리단이 될 것이다. 이미 결과는 그렇게 나와 있었으니까.
그때 방으로 사내가 들어왔다.
무덤덤한 표정의 그가 가만히 벽리단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놈이 풍겨내는 저 역겨운 악의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대체 왜냐?
그때 문밖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내가 지그시 벽리단의 수혈을 짚었다.
벽리단은 아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방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