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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비화(3)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몽련비술을 발휘해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역시 일정 시간이 지나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곧장 천기심환공을 발휘해서 천마를 불러냈다. 중요한 일이었기에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천마를 보자마자 내가 물었다.
[당신, 저놈 본 적 있나?]
천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본 놈이다.]
그럴 것 같았다. 천마가 알 정도의 인물이라면 나 역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게다가 나이가 젊었다. 우리와 어울릴 만한 배분이 아니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나이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첫인상이 어땠어?]
[묘해. 뭐라고 표현할 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묘해.]
확실히 놈은 나뿐만 아니라 천마의 신경까지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천마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는 듯 황급히 물었다.
[혹시 이거 심마 아니냐?]
[아니다.]
내 대답은 빠르고 단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심마 따위에 빠질 리가 없으니까.]
[이런 미친! 네 건방진 대답을 보니 넌 이미 심마에 빠졌어!]
[하하.]
물론 그건 천마를 웃기려는 너스레였고 진짜 이유는 내 본능이 말했다. 이것은 심마 같은 것이 아니라고.
느낌이란 것이 있지 않는가? 내 나이와 경험, 그리고 마신결이 구 성에 이른 무학까지. 결코 틀리지 않을 예감이었다.
이것은 심마가 아니다.
어쩌면 이 육체에 남아 있던 벽리단의 무의식이, 혹은 마지막 기억이 내게 전하고 있는 전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왜 그렇게 변했었는지를 알리고 싶어서.
* * *
태성상단의 본단에 도착했을 때, 마침 광두는 태성검대의 무인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언제나 잊지 마라.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태성상단의 상인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돈이나 물건보다 사람을 우선하도록! 사람이 있는 다음에 돈이 있는 거다! 알았나?”
“네!”
무인들이 한목소리를 내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흑표대에 비할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잘 훈련되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내 마음에 더 든 것은 그들의 분위기였다. 밝고 건강한 그것은 광두를 닮아 있었다.
“자,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자!”
“네!”
무인들을 해산시키고 돌아선 광두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도련님? 도련님!”
광두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웃음이었다. 무엇으로도 훼손시킬 수 없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바로 그 웃음, 그것은 바로 오직 나에게만 보여주는 광두의 충성심이기도 했다.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광두 역시 이제는 태성검대의 검대주로 잘 어울렸는데 일취월장한 실력과 내공이 느껴졌다.
“너 보러 왔지.”
“맙소사! 드디어!”
“드디어?”
“저를 칼받이로 사용해 버리시려는 순간이 왔군요!”
오랜만에 보는 광두의 너스레가 이렇게 반가울 수 없다.
“그래, 드디어 올 것이 왔지. 하지만 네가 총각귀신이 되어 구천을 헤맬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구나.”
광두는 이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검귀, 도귀, 무귀. 뭐 이런 귀신 이름을 붙이시라고요! 총각귀신이라니요? 저 풋내기 아니라고요! 저 경험 많은 녀석이라고요!”
“하하하.”
장담한다. 이 녀석은 아직도다.
“우리 좀 걷자.”
“네! 도련님.”
광두와 함께 상단의 연무장을 걸었다. 안가에 함께 있다가 근래 상단을 보호하는 일을 맡은 광두와 태성검대였다. 태성상단 자체가 나와 완전히 독립된 곳이었기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요즘 일은 어떠냐?”
“잘되고 있습니다.”
“어때? 검대 일은 적성에 맞느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즐거운 것을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하.”
과연 녀석은 얼굴이 밝고 좋아 보였다.
“아, 보내주신 영약은 잘 복용했습니다. 그 덕분에 일 갑자나 내공이 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절대 안 죽는 칼받이가 되려면, 더 강해져야지.”
“매번 도련님이 이렇게나 신경 써 주시는데…… 전 죽기도 어렵습니다.”
“하하.”
신경 써 줘야지. 내가 무엇 때문에, 또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절대 죽지 마라.
“참, 그리고 그녀와 다시 잘해보기로 했습니다. 찾아왔더라고요. 미안하다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잘해보고 싶다고…….”
얼마 전 헤어졌다던 수란과의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어렵네요. 여자 마음도 잘 모르겠고.”
“누군가를 사귀고 평생 책임진다는 것이 어찌 쉽고 간단한 일이겠느냐? 아무튼 축하한다.”
“축하는 제가 혼인하는 날 해주세요. 요즘 같아선 그녀가 아닐 수도 있어요.”
“하하. 그렇게 바람둥이가 되는 거지.”
“그럼요, 총각귀신보단 그거죠.”
잠시 그렇게 걷다가 내가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내가 어렸을 적 기억 나냐?”
“언제 적 말씀이십니까?”
“내가 변하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그때 일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냥 궁금해서.”
“송소저가 무공수련을 떠나고 좀 지나서부터 변하셨죠. 그때까진 항상 저와 함께 다녔었는데 그 무렵부터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이후에 점점 난폭해지시면서 사고를 많이 쳤지요.”
광두가 자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후회가 됩니다. 그때 억지로라도 제가 함께 있었어야 했는데. 제가 힘이 되어 드렸어야 했는데.”
광두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이제는 내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모두가 힘든 시기였을 테니까.
“그때의 일은 너 때문이 아니다.”
떨리는 광두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내가 차분히 말했다.
“그러니 절대 자책할 필요 없다.”
* * *
쪼로로롱, 쪼로롱.
꿈에서 깨어나니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 객잔 한가운데 서 있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깨어난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까 이곳은 앞서 꿈에서 우리가 도착했던 곡부지부 건너편 객잔이었다. 이 객잔 난간에서 벽리단과 사내가 만났었다.
북적대는 객잔 안을 살펴보니 과연 구석에 그 사내와 벽리단이 앉아 있었다. 곧장 헤어지지 않고 이곳에서 한잔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모름지기 사내란 술도 한잔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쭉 들이키게.”
벽리단이 사내가 내민 술을 받아서 한 번에 마셨다.
“오! 잘 마시는군.”
하지만 이내 벽리단이 참았던 기침을 내뱉었다. 술을 제대로 마셔본 경험이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하하하. 무인은 자고로 독주를 마시는 법이지. 자네가 존경하는 천맹주도 독한 술을 아주 좋아한다네.”
“어떻게 아십니까?”
“천맹주와 대작을 해봤으니 알지.”
이 새끼!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다니?
저놈을 만난 적도 없지만, 나는 술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놈의 거짓말은 성과를 거뒀다. 사내를 향한 벽리단의 눈빛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경계하던 마음이 줄고, 호감이 더 늘어난 것이다.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는 사이라고 하니, 왠지 마음이 더 가는 것이다.
놈의 한마디, 한마디가 쉽게 잘 먹혀든다.
놈은 우선 외모가 호감형이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은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신뢰를 주는 외모.
“아까 말씀하셨지요? 꿈은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고.”
“그랬지.”
“그럼 꿈이 없으신 겁니까?”
“아니네, 나도 꿈은 있네. 꿈이란 것이 꼭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말주변까지 아주 좋았다.
하지만 어린 벽리단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내 눈은 속이지 못했다.
그에게서 모조품이 가지는 완벽성을 느낄 수 있었다. 꽃잎 하나, 잎사귀 하나까지 모두 완벽하게 만들어진 꽃, 하지만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가짜 꽃, 그와 그의 말들은 바로 그런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금껏 만났던 적들 중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지닌 놈이었다.
대체 누굴까?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자와 연관이 있는 자일까? 아니면 전혀 새로운 인물일까? 아직은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 어떤 꿈이 있으십니까?”
“자네 꿈이 천하진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 꿈은 우리 아우님의 꿈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제 꿈과 비슷하다고요?”
“바로 이 강호를 내 손에 넣는 것이니까.”
벽리단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진담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아우님은 이 강호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벽리단이 대답을 망설이자 사내가 다시 물었다.
“무림맹주 천하진인가?”
“아닙니다.”
“그럼 중원오세의 주인들인가?”
“그들은 더욱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지?”
“강호의 주인은…… 우리 강호인들이겠지요.”
“그렇지. 아주 훌륭한 대답이었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지.”
사내가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이제 자네에게 묻겠네. 자넨 이 강호의 주인인가?”
벽리단이 대답하지 못하자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의 자네 말대로라면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지.”
그건 사내의 말일 뿐이고, 이런 상황에서 어찌 저 질문에 자신이 강호의 주인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사내의 표정이 비로소 진지해졌다.
“난 누군가에게 강호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으면 좋겠네. 그 옆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도 내 이름이 나왔으면 좋겠네. 모두의 입에서 하나의 이름이 나올 때, 그때야말로 그가 이 강호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안 그런가?”
벽리단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그를 응시했다. 가치관을 흔드는 말이었다. 마음 한편에선 틀렸다고 확실히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매력적으로 들리기도 할 것이다.
이 따위 말로 어린애를 흔들어 대?
나는 사내에 대해 더욱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농담이었네. 그러니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지을 필요 없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이런 말잔치라도 벌여야만 강호를 차지할 수 있지 않겠나?”
“아, 그런 말씀이었군요.”
그제야 사내의 말이 농담임을 깨닫고 벽리단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지만 내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로 있었다. 사내의 말이 진심임을 느낀 것이다.
사내가 다시 벽리단의 술잔을 채워주며 화제를 돌렸다.
“좋아하는 여자는 있는가?”
거기에 송화린까지 묻는다? 정말 내 신경을 거스르는 온갖 짓들을 다하고 있었다.
벽리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사내가 싱긋 웃었다.
“있군, 있어. 어때, 예쁜가?”
“제 눈에는 아주…… 예쁩니다.”
“언제 이 우형에게 소개시켜 주시게.”
“멀리 무공수련을 가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런.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냈군.”
“아닙니다.”
“자, 한잔하세.”
놈은 분명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벽리단에게 접근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대단한 기도를 지닌 놈이 열대여섯 먹은 소년과 술자리를 가질 까닭이 없다. 아마 놈은 송화린이 무공수련을 떠난 것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세, 내 우리 아우님의 외로움을 풀어줄 좋은 곳으로 안내하지.”
“어디 말씀이시죠?”
“가보면 아네.”
사내가 벽리단을 데리고 객잔을 나섰다.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놈이 벽리단을 데려간 곳은 기루였다.
광두에게 듣기로 벽리단이 기녀에게 빠져 돈을 갖다 바쳤다고 했다. 아마 이때부터 기루의 맛을 알게 된 것이리라.
기루를 따라 들어가려던 내가 멈춰 섰다.
어차피 기루에서 두 사람이 노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한데 나는 왜 이곳 산동에 온 것일까?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허공으로 날아오른 내가 마신비행으로 곡부지부를 향해 날아갔다.
쉬이이이이이익.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곡부지부까지 날아갔다. 그렇게 곡부지부의 마당에 내려서던 그때, 새소리가 들렸다.
쪼로롱, 쪼로로롱.
안 돼!
침상에서 눈을 떴다.
“젠장.”
두 사람에게서 벗어나서 깬 것인지, 아니면 깨어야 할 순간이 되어서 깬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아직 천소선과의 약속시간이 남았기에 나는 곧장 갈사량을 찾아갔다.
당시에 내가 왜 산동을 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갈사량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 기억납니다!”